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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성경본문|사도행전 13: 24 ~27
24.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26.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고후11:22, 행28:28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눅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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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화)
벌써 3년이 되었는가요? 고 신정수 장로님이 돌아가셨을 때에 가족은 물론이고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장로 훈련을 받고, 안수를 받았는데 단 한 번도 공기도를 하기도 전에 돌아가시다니. 저의 목회를 돕기 위해서 정말 충성을 다 하신 분인데. 사실 갑자기 죽음이 다가오면 우리는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인가? 왜 지금인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죽음에 따르는 수많은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해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25절의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그의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자신을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눅 3:15) 자신은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아니다. 그는 그분의 신을 풀어주는 종도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한 구절입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이고, 말라기4:5절에서 예언된 다시 오마하고 약속된 엘리야의 모형적 인물입니다.
그는 헤롯이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빼앗은 것을 책망하다가 결국 감옥에서 죽고 만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가 그런 메시야의 선구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 [사생 관]이 바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도 바른 사생 관을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인생의 성공적인 경주를 하려면?
딤후 2장 5절에 보면 인생을 경주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인생은 마라톤 경주처럼 긴 경기입니다. 이 긴 마라톤 경기와 같은 인생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까요? [성공적인 인생 경주는 인생을 바로 사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바로 살려면 [사생 관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를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도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생각하려고 합니다만 그것은 이미 늦었습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인물들은 다 사생 관이 바로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사생 관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바른 사생 관을 가지는 것이 성공적인 경주를 하는 기본 비결]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죽음을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departed]라고만 표현합니다. [떠난 분]이란 뜻입니다. 또 [죽음을 단순히 별세]라고만 표현합니다. 이 세상을 떠난 분이란 뜻입니다. 또 [돌아가셨다]고 표현합니다.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침묵을 합니다. 장의사에 가보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단순히 잠자고 있는 것처럼]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경비를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 안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일년 동안에 사용되는 화장품 값이 몇 억 달러가 더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치 잠자고 있는 것처럼 시체를 만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른 사생 관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여기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사생 관에서 사명감도 나오고, 생의 목적도 나오는 것입니다.
2. 죽음이란 무엇인가?
고전15:26절에 보면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바로 우리 인류의 공통된 마지막 원수입니다. 죽음은 또한 하나님의 원수이기도 합니다. 본래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를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을 죽이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생명의 창조자인 하나님의 계획을 반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이기도 합니다.
(1) 왜 죽음은 슬픔을 가져옵니까?
그것은 우리의 애착(attachment)을 끊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게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슬픈 것입니다. 또 하려고 했던 일을 하지 못 한 체 [미결된 사업]으로 남기 때문에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죽음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한꺼번에 거품 속으로 던져 버리기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2) 죽음은 왜 옵니까?
우리는 착실하게 살려고 애쓰던 젊은 사람들이 갑자기 죽었을 때 왜 그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죄 많은 사람들은 건강하게 성공을 하면서 살고 있는 데 왜 하필이면 그 착한 젊은이가 갑자기 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집니다. 어린아이가 죽을 때도 꼭 같은 의문이 우리들을 괴롭힙니다. 솔직히 우리는 왜 그 착하게 살려고 한 젊은이가 갑자기 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현재라는 골짜기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도 없고, 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 외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망의 근본적 원인을 성경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롬 5:12), 또는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본래 인간은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다시 말해서 원죄로 인해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시편 116편 15절에서 ”성도의 죽는 것은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그렇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수고를 그치고, 쉬는 것“(계 14:13)이기 때문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것“(살전 4:14)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9:3절에서는 소경된 사람의 이유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세군에서는 사관생도들의 난에 사망이란 난이 없고, 다만 진급의 난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망은 바로 천국으로의 진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록 14장 13절의 말씀을 유의해서 들어야 합니다. “자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다시 말하면 성도들에게는 죽음이란 천국에 들어가는 현관문입니다. 믿습니까?
(3)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생명체는 다 한번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죽음은 궁궐에 살고 있는 사람이나 오두막에 살고 있는 사람이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옵니다. 두 번 오는 사람도 없고, 안 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꼭 같이 한번씩 옵니다.
(4) 또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아무도 자기의 죽는 날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암에 걸려 의사의 마지막 통고가 있는 말기환자들도 “나만은 더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계는 항상 [착각, 착각]하고 우리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나도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안 죽을 것이란 착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가?
(1) [모든 것은 다 잠정적인 것]이라는 것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만은 그리고 나에게 속한 것만은 영원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올 때 우리는 낙심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여인숙이요 우리는 이 여인숙에 잠간 머물다가 가는 나그네입니다.
(2) 죽음이 올 때 우리에게는 몇 가지의 영적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준비 없는 죽음은 너무도 비참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무신론자인 토마스 스코트는 “아 나의 운명은 너무도 비참하다”고 탄식하면서 죽었습니다. 프랑스의 볼테르는 주치의에게 나의 생명을 6개월만 연장시켜준다면 나의 가진 것의 절반을 주겠다고 했지만 죽고 말았습니다. 중국을 처음으로 천하통일한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서
동서의 문화를 비교해보면 사생 관이 전혀 다릅니다. 동양에서는 아프지 않고 [갑자기 죽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얼마동안 아플지라도 죽음을 준비하기를 원합니다. 유언도 작성하고, 하던 일들도 정리를 하고, 특별히 마음의 준비를 하기를 원합니다. 의사들도 자세가 전혀 다릅니다. 암 말기의 환자에게 한국에서는 가족들에게만 말하고 본인에게는 절대 비밀로 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환자에게 말하면 석 달 살 사람이 석주도 못 살기 때문입니다. 모든 소망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상세하게 말하고, 서로 농담도 합니다. 그것은 준비를 하는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방법을 쓰든지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최근에 이런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Hospice라는 단체를 통해서 말기 환자들에게 소망을 갖도록 돕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들을 돕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문제는 그가 죽은 후에 가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은 후에 환자의 영혼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은
첫째로 알지 못하는 죽음의 세계에 갈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많습니다.
둘째는 가족들에 대한 염려가 많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생명보험을 듭니다만 큰 도움이 못됩니다.
갑자기 죽게 되는 분들을 만나보면 몇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분노가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인가? 왜 지금 죽어야 하는가? 내가 남보다 더 성실하게 살았으면 살았지 죄가 더 많은 것도 아닌데 이것 너무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창조주에 대한 [분노]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다음에는 [하나님과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나를 살려만 주시면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재산을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이 타협을 해도 안 될 때에는 죽음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때에 소망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죽을 때 소망 속에서 자신의 마지막 달려갈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합니까?
☛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로 가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사실 오늘 날 가장 인기 없는 단어가 지옥이란 단어입니다. 심지어 19세기의 유명한 무신론자인 Robert Ingersoll이란 사람은 [지옥이란 말은 종교의 허수아비(scarecrow)]라고까지 악담을 했습니다. 물론 우리 중에 죽음의 체험을 가져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래서 가보지 않은 천국을 믿고, 지옥이 있다는 것도 믿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에서의 통계를 보면 53%가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런데 돈이 많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통계가 내려갑니다.
☛ 죽음을 준비하는 또 다른 방법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 두려움을 버리라고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계 2:10),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계 1:17)라고 했습니다. 또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움이 됩니다만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 셋째로 죽음을 준비하는 길은 천국에 갈 준비를 하고 날마다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요5:24절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또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끝으로 죽음을 준비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종말론 적 삶을 삽니다.
그것은 바로 쓸모 있는 삶, 필요한 삶, 유익을 주는 삶,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는 히브리 격언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죽을 때에는 모든 것을 다 놓고 갑니다.
그러면 이 시간에 우리 모두 자신들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물어볼 때에 다 같이 [천국입니다]라고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죽는다면 나는 어디로 갑니까? (천국입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다 한번은 죽습니다. 그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번은 꼭 죽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을 준비하였다가 그것이 내개 찾아올 때에 주님과 함께 기쁨으로 맞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