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갑산 장곡사 찾던 날
전 상 준
가로등이 고추 모양을 하고 있다. 단조로움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일까.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다. 지역 특산물 홍보 아이디어가 새롭고 신선하다. 회원 한 분이 북한에서는 전구가 ‘불알’이다. 형광등은 ‘긴불알’, 상드리에는 ‘떼불알’ 스타트 전구는 ‘씨불알’ 가로등은 ‘줄불알’이다. 이곳 고추 모양의 가로등은 어떻게 불릴까 하며 농담이다. 재미있다. 새로운 모양의 고추 가로등이 보일 때마다 웅성거린다.
충청남도 청양군이다. ‘청양고추’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고추 중 가장 맵다고 한다. 주 생산지에 대한 설은 두 가지다. 고추 이름과 지명이 일치하는 청양이란 것과 경상북도에서 고추가 많이 나는 청송군의 ‘청’과 영양군의 ‘양’ 자를 따서 ‘청양’이라 했다는 주장이다. 내 능력으로는 어디가 맞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확실한 것은 여기서 본 고추 가로등이 지역의 특산물인 ‘청양고추’의 홍보를 톡톡히 하고 있다.
(사)대구문화재지킴회에서 실시하는 문화재 현장심화학습 날이다. 전세 버스는 아침 일찍 출발 충청남도 청양군에 있는 칠갑산 장곡사와 고운수목원을 찾았다. 길이 멀어 장곡사에 도착하니 열한 시가 넘었다. 관광객이 많지 않아 한국의 아름다운 길 백선에 든 진입도로의 벚나무 길을 버스로 올랐다. 이 킬로미터도 더 되는 거리다. 편하기는 하나 벚나무 길의 풍치를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칠갑산 장곡사’란 일주문을 지나 조금 오르니 절집들이 앞을 막는다. 계곡의 경사면을 따라 배치되어 있고 여기저기 보수 공사를 하고 있어 분위기가 산만하다.
먼저 맞배지붕의 다포양식을 한 하대웅전(보물 제181호)을 둘러봤다. 대웅전에 있다는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을 찾았으나 불상은 보이지 않고 좌대만 있다. 바로 상대웅전(보물 제162호)로 갔다. 이곳도 다포양식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여기에는 국보 두 점과 보물 한 점이 있다 해 찾았다. 국보로 지정된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석조대좌(국보 제58호), 장곡사 미륵불괘불탱(국보 300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부석조대좌(보물 174호)다. 여기서도 보물은 다른 곳에 보관되어 볼 수 없었다. 장곡사에 있다는 국보와 보물을 보겠다고 버스 속에서 장곡사 안내 팸플릿을 보며 회원들과 함께 미리 공부까지 하지 않았는가. 실물을 보지 못해 서운했다.
상대웅전 옆 나무 그늘 밑에서 아래쪽으로 이어진 계곡을 바라본다. 잡목이 우거진 산비탈 저기쯤에 화전민이 보인다. 물도 없고 거름도 먹인 적이 없는 메마른 밭에는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처자는 힘든 삶에 가난이 원수처럼 생각되었다. 시집가던 날 집에 홀로 있는 늙은 홀어머니 생각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칠갑산 고갯마루 바위에 앉아 멀리 움막 같은 집을 바라본다. 산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애간장을 녹인다. 어머니와 헤어지지 않을 수 없는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짓는 애처로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쉬움을 안고 하대웅전으로 다시 내려와 대웅전 옆 건물 앞에서 문화재 정화활동을 했다. 화단에 난 잡풀을 뽑고 주변을 정리정돈 했다. 절 전체를 다한 것은 아니지만 문화재지킴이 회원으로서 마음을 가다듬기에는 충분하다. 모두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참여하는 모습에서 내가 이런 분들과 함께 문화재 지키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꼈다.
점심 먹는 장소로 선택한 장승공원에는 ‘콩밭 매는 아낙네 상’이 있다. 가수 주병선이 불렸다는 ‘칠갑산’ 노래 속 아낙이 콩밭에서 포기마다 설움의 눈물을 심는다. 공원에는 한낮의 뙤약볕이 따갑다. 무명옷에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쪼그리고 앉아 호미를 꼭 쥐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한 줄기 바람 속에 환청으로 들려오는 ‘칠갑산’의 구슬픈 노랫가락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대구문화재지킴이 회원이 담당하고 있는 문화재는 대구 경상감영공원에 있는 선화당(대구 유형문화재 제1호), 징청각(대구 유형문화재 제2호)과 대구 달성공원의 달성토성(사적 제62호), 관풍루(지방문화재 자료 제3호)다. 매주 하루 네 곳 중 한 곳에서 문화재 정화 활동을 한다. 간단한 주변 청소와 문화재 훼손 여부를 관찰하고 공부를 하러 온 학생들이나 구경 온 관광객에게 문화재의 중요성을 홍보하는 정도다. 활동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회원 각자의 마음 자세다. 우리의 문화재를 우리 손으로 지킨다는 자부심과 봉사정신이 그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여기에서 이루어진 정화활동도 우리 회원들의 문화재 사랑 정신의 연장선에 있다.
하대웅전 건물 뒤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건물 뒤로 돌아가니 “당신의 발길을 돌리는 곳”이란 안내 문구가 보인다. 멈칫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상대를 배려하는 글귀다. 마음이 아름답다. ‘출입금지’란 글자에 익숙해진 내게 무언의 가르침을 준다. 또 있다. 화장실에서다. “인생의 낙은 교육에서보다 절욕에 있다. 허욕을 경계해야 한다.” 소변기 앞 벽에 있던 글귀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못 배운 사람보다 사회악의 중심에 더 많다고 한다. 그 이유가 마음속 과욕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도 쥐꼬리보다 못한 지식을 과신하며 으스댄 일이 있다. 소변을 보는 짧은 시간이지만 공감하며 반성했다. ‘그래, 내 능력과 분수를 알아야 해.’ 내가 알면서 하는 잘못만 절제해도 세상을 편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다. 거창한 구호나 가르침보다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전세 버스에 올라 주병선의 ‘칠갑산’ 노래를 들으면 다음 심화학습 장소인 ‘고운식물원’을 찾았다. (원고지 13.9장)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