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23
돈으로 정치는 살 수 없을까?
세상이 타락했다고 말한다. 도덕과 윤리가 실종되고 오로지 물신주의가 횡행한다는 염려다. 이처럼 도덕과 윤리가 붕괴한 데는 사람들이 돈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진단이다. 여기에 나이가 든 사람들이 빼놓지 않는 말이 있다. 옛날에는 가난했지만, 정이 넘쳤다는 회상이다. 이웃에 대한 정나미는 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배를 도덕과 윤리의 항구로 안내하는 등대였다는 이야기다.
염치를 모르는 정치인들의 낯이 돼지비계보다 두껍다. 입에 올리기에도 거북한 말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뉴스에 오르다 보니 웬만한 거짓말은 애교 수준이다.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그 나라 민도의 척도라는 점에서 누가 그들에게 캡틴 모자를 씌워줬는지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이쯤이면 시민의 정치의식을 의심할 수밖에.
도덕의 사전적 의미를 압축하면 사회 구성원들이 법률이 아닌 자신의 양심에 따라 스스로 지켜야 하는 행동 준칙이다. 물론 도덕이 개인의 양심에만 의탁하는 것은 아니다. 양심이 끌고 가는 도덕의 수레는 사회의 여론과 관습이라는 길 위에 있어야 한다. 여론과 관습의 길은 올곧은 집단지성의 기초위에 이정표를 세우는 게 보편사회다.
윤리는 사회가 정한 준칙을 따르는 것에 더 무게를 둔다. 만약 공동체가 코로나를 예방하기 위해 마스크를 쓰도록 합의하였다면 그것을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 보면 도덕은 개인의 주관성이 우선하고 윤리는 사회의 객관성이 우선한다. 도덕은 자율적인 규범의 성격이 강하지만 윤리는 타자와 합의된 암묵적 규범이다.
옛날에는 정말 도덕과 윤리의 등대가 북극성만큼이나 또렷했을까?
2020년 8월 11일, 임자 없는 암소가 밀양 하남 야촌마을의 강변 둔치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소귀에 붙어 있는 이력을 추적하여 보니 합천 율곡의 어느 축사에 있던 소였다. 장마에 8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떠내려갔던 것이다. 당연히 소의 고삐는 주인 손에 가볍게 들렸다. 우생마사(牛生馬死)의 본보기를 보여준 암소도 대단 하지만 주인에게 소를 찾아준 사람들도 칭찬해줄 만하다.
농경사회는 마을 단위의 공동체 사회다. 가래질하려면 반드시 세 명의 사람이 협동해야만 한다. 세 명을 모으기 위해서는 집집을 찾아다니며 약속해야 한다. 밥도 같이 먹고 일도 같이하다가 보면 정도 붙는다. 반면 산업사회는 철저히 분업화된 일을 한다. 포크레인 기사 혼자 뚝딱 둑을 쌓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날리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가래질하는 사람들은 도덕적이고 포크레인 기사는 도덕심이 없는 사람일까?
화제가 된 소의 생환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이 있다. 먼저 홍수에 떠내려온 암소를 아무도 자신의 소유로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소의 소유자가 누군지를 알게 하는 식별 코드가 소에게 부착되어있었다는 점이다. 전자가 양심의 문제라면 후자는 시스템의 문제로 해석할 수 있다. 돈과 기술이 도덕을 산 경우다.
조선의 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물어본다. 아니면 닭서리를 재미로 알던 시절에도 없던 소를 발견한 사람들이 소 주인을 찾아 백 리가 넘는 길을 헤맸을까 물어보고 싶다.
소도둑 이야기는 흔해 빠진 민담이었다. 소매치기들이 여인네 속주머니를 찢어 닭 판 돈을 훔치는 건 버스터미널의 소소한 일상이어서 볼거리가 못되었다. 역전에서는 사내들이 부녀자를 희롱하고 춘향전을 보기 위해서는 암표를 사야 했으며 다릿목에서는 건달들이 백주에 주먹질을 자랑했다. 그게 어제 일이다.
돈은 양복을 사게 하고 넥타이를 매게 한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는 닭서리가 불편하다. 돈이 도덕을 산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논거다. 그럴듯한 주장이다. 사실 가난할수록 도덕적이라는 근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자식새끼 입에 거미줄 치는데 장마에 떠내려온 소 주인을 찾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해서다.
여야 대선후보들은 제집 소를 팔아주는 양 돈을 뿌리겠다고 경쟁이다. 조금 더하면 뱃속에 있는 남의 집 송아지를 도살장에 끌고 갈 모양새다. 이제 그만이다. 그 돈이 있으면 말끔한 양복을 사시라. 그리고 초승달에도 번쩍거리는 넥타이를 매시라. 아니다. 하는 모양새로는 큐빅넥타이를 매고도 남의 집 외양간을 기웃거릴 태세다.
신축년이 노을도 없이 회색 능선 아래 기운다. 코로나 불루에 더하여 정치판이 우울증을 보탠다. 흰 소의 해라고 덕담을 주고받았는데 코로나에 걸린 검은 소들이 파리가 들끓는 소똥만 내갈길 뿐 맑은 물을 먹은 하얀 소는 보이지 않는다.
분명 양복에 넥타이 맨 사람이 있을 터지만 기부가 줄어든다고 한다. 돈이 없어 재능을 나누려는 사람은 코로나가 발을 묶는다. 이래저래 동짓달 어둠은 깊고 찬바람은 마음 까지 얼게 한다. 코로나가 어촌의 등불마저 가려버린 걸까! 등대도 항구도 보이지 않는 대한민국호의 항해가 불안하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멀지 않았다고들 하는 데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다만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스칼렛의 마지막 대사처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말해야 한다. 그게 산 자의 숙명이다.
물을 거스르지 않은 합천의 소는 새끼를 낳았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