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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이 이별 시를 남긴 진주 동향마을
寺名東向君西向 (사명동향군서향)ㅡ절 이름은 동향사인데 그대는 서쪽으로 가니
漢水西流魚不通 (한수서류어불통)ㅡ한강물 서쪽으로 흐르니 물고기도 오가지 못하겠네 ‘송인숙(送寅叔)’이란 시이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인숙을 보내며’라는 뜻인데, 인숙이 도대체 누구이길래 남명은 한해동안 만났다 헤어진 것이 한 평생 같다고 했을만큼 애절한 이별의 정을 나타낸 것일까. 이공량은 진주 금산면서에 대대로 살아온 전의(全義)이씨의 후예로 1500년에 태어났다.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 대사헌을 지낸 송인수 등 명망있는 선비들이 모두 좋아할 만큼 그의 사람됨이 어질었으며, 명종때 선공감 참봉에 임명되기도 했다. 1565년 66세의 나이로 서울서 세상을 떠났다. 후에 그의 아들 이준민(李俊民)으로 인해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나이가 비록 많더라도 반드시 매로 다스렸으며, 마을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가 혹 취하더라도 단정히 앉아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가방(佳坊)에 살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위는 정운(鄭雲) 이공량(李公亮) 정백빙(鄭白氷) 정사현(鄭師賢)이다. 아들 이준민의 지극한 효성은 널리 알려졌다. 당시 이준민의 옆집에 살던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새벽에 발자국 소리만 나면 이판서가 어머니께 문안드리려 가는 구나 라고 하면서 그의 효성에 감복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우선 ‘절이름은 동향사인데’라는 구절을 鳴킹?‘동향사’를 찾아 나섰다. 지금은 없어진 절이지만 남명이 살았을 당시 어딘가에 있었던 절이다. ‘동향사’라는 절을 찾기란 쉽지가 않았다. 동향사를 찾던 중 동향마을이 진주시 미천면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장 김중호씨(52)가 마을 건너편 전의 이씨 묘역 뒤에 옛날 절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했다. 이장 말에 의하면 전의 이씨 묘역으로 말미암아 절이 없어졌다고 했다. 동향사는 찾지 못했지만, 전의 이씨 묘역이 이곳에 있으면, 혹 이공량과 무슨 관계가 있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옛날 진주시 금산면 가방에 있었던 영모재(永慕齋)의 기문(記文)이 허름한 재실인 경모재에 걸려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남명의 시로 알려진 영모당(永慕堂)이란 시 두수가 퇴계 이황, 금계 황준량이 지은 시라고 적어 옆에 걸어 두었다. 선대 묘가 있었다. 남명과 자형 이공량이 동향사가 있었던 동향마을에서 이별하면서 시를 남긴 의문이 풀렸다. 동향마을에 들렀던 것이다. 이때 남명도 동행을 하여 두 사람은 묘소를 참배하고 남명은 지리산으로, 이공량은 서울로 떠났던 것이다. 남명은 자형을 떠나보내면서 못내 아쉬워 ‘절이름은 동향인데 그대는 서쪽으로 가니’라고 하면서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돌렸던 것이다. 남명의 숨결을 찾기 위해. /강동욱기자 kdo@gnnews.co.kr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의 학문 성향을 두고 비교의 대상으로 삼아 자주 거론했다. 일찍이 실학자 성호 이익은 “퇴계는 소백산 아래서 태어나고 남명은 두류산 동쪽에서 태어나니 모두 영남의 땅이다. 上道에서는 仁을 숭상하고 下道에서는 義를 주장한다.” 라고 하였다. 곧 퇴계는 인을 숭상하고 남명은 의를 주장한다는 말이다. 이를 두고 후세사람들은 남명은 실천을, 퇴계는 이론을 중시한다고 했다. 두사람의 학문 성향을 구분했다. 퇴계는 도를 구했고, 남명은 시대를 구했다는 말이다. 남명의 제자들이 임란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을 염두해 두고 한 말로 역시 이론과 실천의 측면에서 구분한 것이다. 같은 목표를 두고 가는 방법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퇴계는 정주학(程朱學)을 통해 공자의 학문에 도달하려는 반면, 남명은 정주학을 거치지 않고 도달하려고 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퇴계는 남쪽에서 서울가려면 꼭 대전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고, 남명은 대전을 거치지 않고도 서울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경상북도와 남도중 어느 도가 더 좋으냐” 하는 식의 질문이다.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남명은 남명이고 퇴계는 퇴계이다. 선현들을 두고 단순 비교를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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