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산책
문득 먼 추억 속에 있는 길을 걷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냥 마음에 묻고 지내다가 꺼내고 싶은 한 가닥 실오라기를 타고 가다보면 문득 혼자서 기쁘기도 하고 슬픔에 겨워 울기도 한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성북동 일대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우선 『혜화동 주민센터(구 동사무소)』를 찾았다. 이곳은 서울시 미래 유산으로 관리하는 한옥이다. 과거 『나폴레옹 과자점』의 창업주께서 거주하시던 유서 깊은 건물이다.
이어서 『과자점』에서 성북동 산마루 쪽으로 올라갔다. 1970년에 선친의 친구 분에게 추천서를 받기 위해 찾은 일이 있었다. 지금은 전혀 분간조차 할 수 없어 그곳이 어딘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어른들이 떠나시고 그 빈자리에 자손들이 대신하여 세교(世交)의 두터운 정을 이어 가고 있다.
15분가량 걸어가면 『간송(澗松) 미술관』이 나온다. 국내 최초의 사립미술관으로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년~1962년)」 선생께서 1938년에 세웠다. 서울시 3대 사립박물관 (간송/리움미술관/호림박물관) 중 하나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으로 손꼽힌다.
「전형필」 선생은 조상 대대로 한양의 종로 상권을 모조리 장악한 부호였다. 막대한 재산을 한국의 귀중한 문화재들을 지켜 내는데 바쳤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선생과 함께 국외로 반출될지도 모르거나 제 빛을 보지 못한 채 잠들어 있는 문화재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그간 모아둔 소장품에 대한 보관과 연구를 하기 위해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葆華閣)』을 1938년에 설립했다. 뒤편에는 지금도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건물은 낡았으나 귀중한 석물(石物)이 함께하고 있다. 선생의 반신상은 그의 공적에 비해 너무 조촐하다.
소장 문화재는 주로 고서화 위주인데, 규모 자체는 다른 대형 박물관에 비해 다소 초라하지만 유물의 질적 수준은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지정문화재는 국보 12점, 보물 32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 등인데 조사 및 지정이 진행되고 있어 국가지정문화재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전형필」선생의 아낌없는 수집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더라면 이 소중한 유산들이 우리 세대에 전달되지 못했을 것이다. 『간송미술관』은 문화재의 전시보다는, 문화재의 보호와 연구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어서 관람이 매우 까다롭다. 개방 기간은 1년에 단 두 번, 봄과 가을에 각각 2주일뿐이고, 5월, 10월 하순에만 대중에게 개방한다. 지금은 새로운 전시실이 공사 중이다.
이곳을 국학의 본산으로 더욱 유명하게 만든 위대한 인물이 바로 「최완수(崔完秀)」실장이다. 평생을 우리 고미술에 대한 연구를 하여 기념비적인 역작을 남겼다. 미술사학자인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선생의 영향으로 1966년 『간송미술관』에 첫발을 디딘 후 심혈을 기울여 우리미술을 연구하였다. 그는 「겸재 정선(1676∼1759)」을 조선 문화의 절정기인 18세기 진경문화를 이끈 주역으로 재조명했고, 「추사 김정희(1786∼1856)」 연구, 불상과 왕릉 연구 등으로 조선 문화의 우수성을 일깨웠다. 특히 「겸재 정선」의 연구는 이를 통해 「겸재」의 진가를 알리고 우리 그림의 독특한 발전과정을 규명한 최고의 역작으로 꼽힌다. 비록 박사학위는 없어도 고미술은 물론이고, 문학과 역사와 철학에 관한 그의 학식은 깊고도 높아 많은 제자들이 배우고 따른다.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 꼽히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한복에 스포츠형의 짧은 머리는 통유(通儒 : 세상일에 두루 통하고 실행력이 있는 유학자)로서 손색이 없다.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그는 역사 속 우리 문화의 정수인 「겸재/추사」와 결혼한 셈이다.
『길상사(吉祥寺)』는 성북동에 위치한 불교 사찰로 1997년에 세워졌다. 원래는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大苑閣)이 위치한 곳이었다. 대원각은 「김영한(1916~1999)」씨의 소유였다. 남편과 사별 후 16살에 진향(眞香)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됐는데 이곳에서 한식당을 하다가 나중에 요정을 운영하여 엄청난 부를 쌓았다고 한다.
당시 정부에서는 대원각을 비롯한 대형 요정들을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 관광유흥음식점으로 지정하여 지방세 감면 등의 특별한 세금 혜택을 주었다. 또한 일본인의 입국제한도 풀어주었고, 통금제한도 예외적으로 무시할 수 있도록 했고, 공공연한 성매매도 성행하였으며 아예 단속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영한(김자야)」은 자신이 시인 「백석(白石) 백기행((白夔行 : 1912~1996)」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정주 출생의 「백석」은 일제시에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를 쓴 시인이다. 「백석」 연구가들은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은 실제가 아니며, 조작되고 윤색된 이야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영한」은 승려 「법정(法頂):1932~2010」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987년 「법정」스님에게 요정 터 7,000여 평과 40여 채의 건물(당시 약 천억 원 상당)을 시주할 것이니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하였다. 「법정」은 처음에 사양하다가,1995년 이를 받아들여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하여 『길상사』를 세웠다. 「법정」스님이 출가하신 사찰인 『송광사』의 옛 이름이 『길상사』라고 한다.
1999년에 「김영한」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화장하여 절터에 뿌려졌다. 따로 무덤은 없으나, 그녀를 기리는 공덕비가 절 안에 있다. 2010년 「법정」스님도 여기서 입적했다. 『극락전』에 「김영한」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진영각』에는 「법정」의 영정과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법정」이 애용하던 조촐한 나무 의자가 계곡 너머로 「꽃무릇」을 구경하는 참배객을 맞이하고 있다.
『심우장(尋牛莊)』은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1933년에 성북동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방 두 칸짜리 집을 지어 1944년 6월 입적할 때 까지 살았다. 집터는 「벽산」 스님이 기증하고, 「방응모」, 「박광」 등 지인들의 도움으로 집을 지었다. 그나마 조선일보의 「방응모」는 제대로 돈을 쓸 줄 아는 선각자였나 보다. 「만해」는 아예 조선 총독부가 있는 남쪽을 등지고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심우(尋牛)는 불가에서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닫는 10단계의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심우도(尋牛圖)에서 유래한 것이다.
「만해」는 이곳에서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면서 잃어버린 소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한 것이다. 그는 결코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그가 기거하던 『심우장』은 민족자존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일제강점기 마지막 남은 조선 땅이었다.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로 변절한 것과는 대조된다.
경북안동 출신으로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1878~1937)」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일제의 눈치를 보며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지 않자, 「만해」는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심우장』에서 5일장을 치러주었다. 그는 「김동삼」의 관 위에 앉아서 울부짖고 식음을 폐하며 마지막 화장하던 날 빈 속에 술만 마셨다고 한다.
「김동삼」은 옥중에서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고 유언을 남겼다. 「만해」는 「김동삼」의 유언에 따라 화장 후 유해를 한강에 뿌렸다.
현재 『심우장』은 사적 제 550호로 지정되어 옛 모습 그대로 관리되고 있다. 「만해」와 관련된 몇 가지 친필유품과 사후에 그와 관련한 문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양도성의 성곽 아래 위치하여 지금도 골목길을 돌아 갈 수 있는데 당시에는 얼마나 더 험준했는지 짐작이 간다.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만해」의 글이 객을 맞이한다. 알 듯 말 듯 한 선문답과도 같은 글에 고개가 무겁다.
잃을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씨 분명타하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또 잃지나 않으리라.
「심우장(尋牛莊)」 「신불교(新佛敎)」 제 9집, 1937년 12호
우리는 「간송」과 「김영한」의 궤적을 통해 돈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지를 배우게 된다. 「만해」를 통해 민족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지성인의 전형을 배운다. 가만히 생각하니 언급한 세분의 궤적이 모두 일본인과 연계되어 있다.
우선 『간송미술관』의 「전형필」선생은 일제로 빼돌려지는 우리 문화재를 지켰다. 민족정신을 수호하고 오랜 문화의 자존심을 보존하고 계승한 빼어난 위인이다. 사실 「장개석」이 대만에 건립한 『국립고궁박물관』은 역대 중국의 진수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문화전통 면에서 중국대륙의 어떤 박물관보다 빛나는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비록 규모는 매우 작을지라도 우리민족의 혼을 유지하고 보존한 공적은 그에 못지않다.
『길상사』에 깃든 사연도 기막힌 일이다. 우리나라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난 계기는 서독에 파견한 광부와 간호사가 시발점이다. 그들이 이역만리에서 벌어들인 외화가 경제발전의 시금석이 되었다. 이어 월남에 파견된 장병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외화도 큰 기여를 하였다. 물론 이를 강력하게 추진한 지도자의 리더십이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정경유착이 자리하면서 그 역할을 한 곳이 요정이었다. 나중에는 일인들이 대규모로 기생관광을 하면서 우리의 젊은 여인들의 한숨과 신음위에서 외화를 획득하는 구조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행여 일인들이 과거의 편견으로 얼마나 우리를 무시할지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부끄러운 자화상으로 「만해」가 살아 이런 모습을 보았더라면 못난 후손에게 통탄할 일이었다.
「만해」가 머물렀던 『심우장』이야 더 무엇을 언급하랴. 아직도 서슬퍼런 「만해」의 유지를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좀 더 솔직하게 살 필요가 있다. 세상이 이상하게 변하여 소위 지식인이라 하는 사람조차 과거 일제하에서 모든 것을 바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에 대한 평가를 달리한다. 해방 후의 행적에 따라 공과를 나누는 것은 그나마 이해를 한다 해도, 확실한 근거가 있는 반일의 행적조차 폄훼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성북동에는 유서 깊은 유적지가 많다. 『최순우 선생의 옛집』을 비롯하여 조선 시대 민가의 별장 정원인 『성락원』, 「이태준」의 가옥으로 전통 카폐인 『수연산방』, 『이종석 별장』, 『삼청각』, 『정릉』 등 구경할 만한 곳이 있다. 언젠가 다시 성북동 길을 돌아 삼청공원에 이르는 길을 걷고 싶다. 성북동에 살다가 산업화에 밀려 미아리로 떠난 자신의 삶을 노래한 「김광섭(金珖燮):1904~1977」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가 오늘도 산마루에 정처 없이 서성이고 있다.
세월은 흘러 사람은 떠나고 없어도 역사의 자취는 숨 쉬며 그 흔적과 교훈을 남긴다. 유달리 성북동에는 그런 곳이 많이 남아 있다. 일상의 지친 생활에서 벗어나 가까운 옛 도성 안의 유산을 찾으면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살아가는 여유와 의미를 주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생각이다. (2022. 9.29 작성/ 10.5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