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수 시인의 시 세계 침묵으로 강요된 역사의 귀환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1.해방 공간과 좌,우익 대립
김진수 시인의 시집 《좌광우도》(실천문학 2018)는 과거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아픈 생생한 우리의 역사를 증언한 서사시다. 해방공간 이후 민족 분단의 획책과 기어이 그런 현실이 고착화되면서 발생된 시대적인 상황 하의 비극을 담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한 생지옥 같은 여순 사건 때의 기록되지 못한 삶을 다루고 있다. 이후 지금까지 회복되지 못한 과거를 외면한 채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대한민국이란 국가와 국민은 70여 년을 망각하며 살아왔다. 1948년 10월 19일에 벌어진 참극에 대한 어떤 해명이나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것마저 당연한 것이 되었다. 국가가 한 일이라고는 너무도 당당한 ‘여순 반란사건’이란 명칭뿐이었다. 특히 그 당시 함께 살았던 지역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사람들끼리 무고로 살육되어버린 비극은 치유로 가는 노정에서 더 큰 장애가 되었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여수반도에서 벌어졌던 여순 사건은 사람에 의해 자행된 역사이고 국가 권력이 사주使嗾하여 자행된 참극임에도 불구하고 책임지는 주체는 없었다. 그런 시대적인 외면에 분노하며 정의 이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명예 회복과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충정에서 비롯된 김진수 시인의 시심을 우리는 외면해선 안 된다. 따라서 시인의 용기는 비극적인 과거 역사의 반복을 막고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전망을 담아 그 의지를 실현하려 한 것이다. 특히 시집 내용이 여순 사건에 관계된 실재적인 서사를 담고 있어 그 기록적 가치는 역사의 과오를 이해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본다. 또한 여순 사건 당시에 각 지역에서 발생된 학살과 만행에 대한 사실적 접근을 통해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은 의의가 크다고 본다. 그런 문학 이외의 특징을 갖게 된 역사적인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일본이 패망한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하에 의해 시작된다. 남북한 통합 정부 수립이 난망을 거듭하면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 발생된 여순반란사건으로 야기된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발생된 역사는 해방을 맞으면서부터 이미 잉태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남로당 결성 및 여운형 피습 사건 그리고 좌익 진영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으로 이승만 정권은 기선을 잡게 된다. 이후 1948년 7월 17일 제헌 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이어 8월 15일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공포하게 된다. 이후 이승만 정권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된다. 그 수단으로 친일 경찰과 군인을 대거 증원하는 데 이런 기회를 틈타 좌익 사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국방경비대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다. 이어 남한 단독정부는 은연중 반대파의 정치 세력뿐만 아니라 군부 내 북한 정권에 동조하는 사상적 기반자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특히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남로당 계열의 군 조직에 대한 위기를 감지한 이승만 정권은 정치 인사뿐만이 아니라 대대적인 숙군肅軍을 감행한다. 그런 과정에서 기 발생된 제주 4·3 사건에 대한 군의 토벌 파병 지원이 필요하게 되면서 발생된 1948년 10월 19일 ‘여순 반란 사건’은 역사적으로나 여수와 순천 지역 주민에게는 매우 불행한 사건이 되었다. 사실 여순 사건은 엄밀하게 본다면 여수에 주둔한 14 연대 소속의 일부 좌익 사상을 가진 군인들의 반란으로 ‘여순 반란 사건’이란 명칭 사용은 부적합한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따라서 ‘14 연대 군인 반란사건’이란 명칭이 합당한 것이다. 그런 사태가 벌어진 원인을 다시 언급한다면, 공교롭게도 1948년에 발생된 제주 4·3 사태를 들 수 있다. 제주 4·3 사건은 과거의 역사에서 벌어진 부당한 실상을 알리는 노력에 힘입어 국가로부터 상당한 신원에 대한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더 많은 진실을 밝히는 진전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여순 사건은 지금껏 묻혀 잊어진 현대사의 미제로 남겨져 있었고, 아예 국가의 관심에서도 한참 벗어나 있다. 특히 1948년 10월 19일 여수 14 연대 일부 군인들의 제주 4·3 토벌 파병에 ‘동족상잔’ 반대란 명분으로 내세운 항명에서 비롯된다. 거기에 합류한 군인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여수와 순천 지역이 반란군에 장악된다. 이후 이승만 정권은 여수와 순천 지역 전체를 반란 지역으로 묶어 토벌하는 과정에서 많은 지역민들이 억울하게 살상되는 결과를 빚었다. 얼레빗으로 비유되는 살상은 일차적으로 반란 군인들과 좌익계 인사에 의해 주도되었고, 이후 국군에 의한 토벌 과정에서는 우익에 의한 좌익계 색출이라는 명분으로 참빗으로 빗어내듯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되었다. 사실 국군이 여수와 순천에 진공 할 때는 이미 주력 반란군은 구례 지리산과 광양 백운산 인근으로 도주한 뒤였다. 국군에 의해 진행된 토벌 작전은 고스란히 여수와 순천 지역민에게 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더 큰 상처는 지역 주민들에게 좌익사상 혐의자로 전락시켜 생존한 사람들의 고초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남한 정부 수립 과정에서 획책된 근대사의 광기가 깊숙이 관여되었음을 알게 된다. 여순 사건의 진압 과정에서 발생된 억울한 살상은 토벌대로 내려온 국방경비대의 군인 및 경찰들과 폭동을 주도한 반군들 간 우발적인 살상이 아니었다는 것이 사후 자료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을 등에 업은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 간 권력 다툼에서 비롯된 현대사의 비극적인 실상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2. 여순 사건의 징후와 실체
그런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는 1948년에 발생된 ‘여순 사건’ 전체를 문학적으로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그 사건 이후 격화된 좌우 이데올로기의 심화와 1950년에 발생된 6·25 전쟁은 그런 해결의 기회를 더 요원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근, 현대사를 관통하는 역사의 격랑은 그대로 역사 사회 변동으로 흡수되어 버렸고, 가해자인 국가 권력과 대척점에는 첨예한 여순 사건이 존재하게 된다. 그런 시각에서 접근할 때 문학 비평이라는 관점에서 역사 내외적인 상황을 망라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복잡한 해방공간 이후에 발생된 과거 역사 속에서 벌어진 실체를 문예 미학적으로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김진수 시인의 여순 사건에 대한 역사의 부당함을 증언한 시에서 분별할 수 있는 부면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특히 여수와 순천에서 양민으로 실존했던 사람들까지 공산주의자로 무고하여 청산해버린 긴 세월의 연좌된 삶을 들출 수밖에 없다. 그 시간만큼 좌익이라는 볼온적 사상으로 내몰려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김진수 시인의 문학적인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근, 현대사까지 신원이 회복되지 않아 비주류로 은둔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그렇기에 그 파장은 매우 깊고 넓게 퍼져가야 하고 역사의 양심을 회복하는 기제가 되어야 한다. 지금껏 여순 사건의 진실과 그 시대의 역사를 발굴하는 지역 단체의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고 국가의 반성과 피해 지역민에 대한 사후 보상이나 불명예스러운 신원 회복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 문제점을 문학적으로 발언해온 김진수 시인에 대하여 심정적 이해를 돕기 위해 생의 이력을 들춰볼 필요가 있다. 김진수 시인은 여수 삼산면의 초도가 고향이다. 그곳은 여수 손죽도 거문도와 더불어 일찍이 일제 침탈 이후 통치 시기부터 일본인의 입도入島가 많아 치안을 위한 주재소가 들어서면서 낙도였지만, 중앙 못지않게 일제 통치시기에 자유롭지 못한 섬이 된다. 그런 빌미는 기어이 해방 이후 여순 사건의 참화로 이어졌고, 아픔은 깊어져 가족들의 내면에 유폐될 수밖에 없었다. 초도에서 여순 반란사건의 초토화 작전 과정에서 피해자 중 시인의 외조부도 포함된 불운을 당했다. 초도에서 초토화 작전을 수행한 사람은 일제 때 일본군 해군 하사관으로 복무했던 친일 부역자였던 사람이 주도하였고, 그 사람은 할당 인원을 채우기 위해 젊은이들을 끌어다 즉결 및 일부 포로처럼 끌고 가 억울하게 누명을 씌워 거짓 성과를 만들어냈다. 그런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어머니의 기억 저편을 받아 적은 <헛장>은 진실을 기록한 서사시다. 그 광기의 시작은 가장 생물학적 결정론처럼 이데올로기에 꿰맞춰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갔음을 간증하고 있다. “어머니의 피가 붉어 내 피도 붉다”라는 단언부터 비감스런 내막을 품고 있다. 억새풀밭에 숨듯 은밀하게 들어선 봉분 위로 해거름이 비치고 오랜동안 사람 손이 닿지 못해 흐릿한 비문만 새겨져 있다는 망금산, 그곳에서 “마을마다 개몽댕이질을 하고 다녔다고,/피투성이가 된 사람들 보고/이번엔 저 봐라! 빨갱이가 틀림없다고,”생사람을 빨갱이로 몰아간 황국 순사 미야모토라는 사람이 실재 인물로 등장한다. 김진수 시인이 증언하고 있는 시편은 역사 저편에서 버젓이 벌어졌던 여순 사건의 실체를 밝히고 있다. 그 사람들을 무고하게 죽음으로 몰아 “여수 바다 어디쯤에다 수장을 했다드라고,/뜬소문만 수군수군 떠밀려 오드라”는 풍문이 마지막으로 전하는 부고장이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가족마저 빨갱이라는 연좌제로 기나긴 고통의 세월을 죄다 천형으로 덧씌워 버렸다. 그 이후 여수 사람들에게는 좀체 함부로 사람들 앞에 먼저 “나서지 마라! 나서지 마라!”라는 말이 후손에게 전하는 유언 같은 입말이 되었다.
3. 여순 사건의 총체적 발화들
피해자의 마음속으로 타들어가는 역사의 아픔은 그 사람들의 가슴을 더 붉게 했을 것이다. 그것은 좌익으로 대표되는 빨강에 물이 든 사상이어서 붉은 것이 아닌 인간에 대한 배신과 분노에서 붉은 피가 치솟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난히 눈 내린 날이면 참아왔던 분노로 사람들의 가슴은 더 붉어졌고, 금세 눈마저 녹일 비통함에 빠져든다. 시인은 <시방,눈이 내린다>는 그날 지리산과 순천에도 눈이 많이 쌓였다는 데 “여수 땅엔 닿자마자 흔적도 없다”는 시인의 사유는 여순 사건 때 품은 원혼으로 이어지고 “가슴에 천불이 꺼지지 않아”서 그럴 거라 추정한다. 눈 내리는 날 풍경마저 시인은 감상에 사로잡혀 낭만에 빠질 여유도 없을뿐더러 그 당시의 ‘여순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누가 누구의 적인 줄도 모르고/너네 나네 등 겨누던 손가락총”으로 죽어간 그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렇게 당한 사람들이 끌려간 곳은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마래터널 지난 한켠에서 햇살바라보기를 하고 있는 <형제무덤>이 있다. 불안한 눈빛으로 끌려온 “그날은 깊은 겨울밤이었다/기침 소리마저 꾹꾹 얼어붙어 버린/종산초등학교 맨바닥에 빼곡히 수용됐던/여순사건 부역 혐의자들의 일부”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을 ‘대한민국 헌병’들은 “깊게 파진 웅덩이 앞에 나란히”세워 “다섯 번에 또 다섯 번/쏴 죽이고, 장작 덮고, 기름을 붓고/그렇게 일백 이십 오명”을 죽여 사흘 밤낮 불 질러 태웠다는 역사의 그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김진수 시인의 시는 시 미학적인 요소보다 역사의 사실을 기록한 문장임을 유념해야 한다. 한 곳에서 불타 고통에 겨워 껴안고 비명에 간 사람들을 ‘형제’로 명명하여 위로하였다는 구전을 받아 적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토록 죽임을 당하고 죽임을 수행토록 한 국가 폭력이 자행된 만행을 증언한다. 이런 것은 역사적인 사료에도 밝혀져 시의 사실성을 강화시켜준다. 모든 일에는 철저하게 진실을 은폐해줄 명분을 찾게 된다. <각색된 이름>이 만들어진 과정도 그중 하나로 증언하고 있다. 한없이 아름답기만 한 여수 까막만이라 불린 소호 바다가 한눈에 보인다는 구봉산 자락을 가리킨다. 그곳은 신월리로 본래 물금과 봉양, 신근정 마을이 있었던 곳으로 일제 때부터 군 비행장으로 사용되다 해방 후는 미군 주둔지로 재사용된다. 해방 이후 국군 14연대가 주둔하면서 불행의 씨앗을 잉태하게 된다. 그 14 연대 주둔 병력 일부가 제주 토벌 작전 투입에 항명한 사건을 대한민국 초대 총리 이범석은 기자회견장에서 “여수에서 국군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이 사건의 성격을 분명하게”국민들에게 밝혔다는 데, 무슨 연유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여순 반란 사건’으로 각색되어 버렸다. 이후 국군에 의해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토벌 작전은 반란군과 양민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진행되었다. <뜨거운 항쟁>은 그런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다. 일부 시내로 잠입한 반란 군인을 색출 토벌하는 과정에서 엉뚱하게 불똥이 민간인들에게 확산되면서 여수 지역이 미친 광풍에 휩싸이게 된다. 좌익이란 색출 혐의도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동네 주변 사람들을 “서국민학교 종산국민학교 진남관”앞에 모이도록 한 뒤 그 사람들에게 동조했던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은 “짧은 머리 미군빤스 지까다비에 새 고무신”을 착용한 사람들과 그런 혐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해명할 기회도 없이 등 뒤에서 손가락 총으로 가리키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참살당한 사람들에게 국가는 합법적인 혐의를 덧씌우기 위해서 ‘국가보안법’에 내란죄와 연좌제까지 합법화시킨다. 문제는 없거나 하지도 않았던 허구를 조작하여 사실로 각색해내는 국민 기만이 있었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군이 아무렇지 않게 반란군 토벌 작전을 빌미로 주민 학살을 자행하였다는 데 있다. 잘못된 국가 권력의 또 다른 남용 사례인 <환상의 여학생부대>는 그 허구성을 여실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런 부대는 여수여자중학교 여학생들로 조직되었고, 그 여학생들 치마 속에 권총과 카빈 소총을 숨기고 다니다 진압군에게 미인계처럼 다가가 총격을 가했다는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잘 짜인 연극 대사처럼 긴박하게 연출되었고, 그 배후로 여수 여중학교 교장 송욱을 내정하는 치밀함도 보여준다. 마치 역사의 시간표만 다르지 ‘80년 광주 사태’ 때 광주 시민에게 내란을 획책하는 폭도로 규정하고 그 배후로 김대중을 수괴로 몰았던 것과 닮은꼴임을 볼 수 있다. 역사의 반복은 모양새도 닮아있다. 피해자는 항상 하위층으로 힘없는 민중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권의 권력 유지가 흔들릴 때마다 누군가에게 속죄양을 만들어 국민의 관심을 기만했던 역사가 반복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토록 사실이라던 명분으로 자행된 광주사태의 실체가 다 허구로 밝혀졌듯이, 당시 여수 여중학교 교사였던 전병순씨의 소설 속 증언을 보면 그런 실체를 듣거나 보지도 못했고 그런 혐의가 있었던 학생은 없었다는 것이다. 애꿎은 송욱 교장은 이후 조작된 혐의를 벗지 못하고 총살이라는 풍문만 남겼다. 국가 권력의 사주로 자행된 여순 사건은 더 치밀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애기섬 수장터>처럼 불법을 자행한 가해자도 국가의 작전 지침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래서 여순 사건은 지금껏 추측과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여순 반란 사건 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다시 죽음의 사선을 피할 수 없게 된다. 6·25가 터지면서 반 강제나 기만에 의해 가입된 ‘국민 보도 연맹’ 원들을 사상통제 수단으로 예비 검속을 시행했다. 그때 분류된 사람들을 끌어다 인민군 지원이나 부역 협조를 우려하여 예방 학살을 자행하게 된다. 시인은 ‘애기섬’에서 있었던 실상을 “민족과 반민족 좌우 갈등으로 이어진/동족상잔의 비극/그 서막을 알리던 제주 4·3과/여수 신월동 국군 제14연대 반란사건/그때는 용케 피했지만 6·25가 터지고/보도연맹원 예비검속만은 피할 길이 없었다./경비정 갈매기호에 실려 간 애기섬은/여수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뱃길이었다./양민들의 손발은 좌우도 없이/철삿줄 동앗줄에 단단히 묶이고/죄명도 알 수 없는 바윗돌까지 채워져”수장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 중 그때 끌려가 죽임을 당한 아버지를 뵙겠다고 백발이 다된 ‘유복자 김양기’씨가 애기섬을 찾아 원혼을 위로하며 절규를 한다.
아들도 뜬금없이 간첩으로 몰려서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고문을 당하고 시킨 대로 원하는 대로 자인서를 써줬다고 운다. 불가촉천민처럼 짓밟혔다고 운다. 서럽고 분하고 억울했지만 그래서 더욱 살아야했다고 운다. 울면서 묻는다. 학살의 진원을 묻는다. 애기섬에서 수장된 새빨간 역사의 진실을 또 묻는다. -<애기섬 수장터> 부분
그 말을 듣고 있는 바다는 진실을 알고 있지만, 말해줄 수 없다. 그날 겁에 질린 사람들처럼 시퍼렇게 앙다문 파도만 뱃전을 밀쳐낼 뿐이다. 애시당초 있지도 않은 죄를 물었기에 죄를 지은 사람도 없듯 <모스크바엔 모스크바역이 없다>고 항변한다. 광기에 휩싸였던 여수반도에서 자행된 만행에 대한 역사의 증언은 끝이 없다. 그만큼 폭압적 만행이 횡행했다는 방증이다. 그 배후에는 악명 높은 이름으로 몇 번의 시집 지면을 채우고 있는 일제 관동군 헌병대 출신 ‘김종원’과 수도 경찰의 악랄함이 있었다. 여순 사건의 학살에는 이승만 정권에 빌붙은 친일부역자들로 주구走狗가 되어 광기를 진동케 했다. 주민을 이유 없이 폭행하는 것은 선한 행동이며 아예 죽임마저 정당화한 인명경시는 잘못된 국가의 힘이 어떻게 남용되고 있는 가를 증명하고 있다. 이젠 피살자를 부관참시 할 수 있는 ‘부관참시법’까지 만들어 여수 순천 지역을 피의 광란에 더해 인륜마저 저버리는 반란 지역으로 고착 합법화시켜버린다. “그 이후로/여수에는/아무리 태극기를 내걸고 만세 삼창을 외쳐대도/모스크바로 낙인찍힌 마을이 있었다./돌산읍 죽포리와 서덕마을이 그렇고/둔전도 그랬으며 승월 임포 율림 굴전 백초 두문포와/군내리 평사리에도 전설의 오르그가 살았었다는/모스크바 마을로 한 두름에 엮였다.”며 광기를 증언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스크바엔 모스크바역이 없듯, 그 마을에는 그 어디에도 좌익으로 구분해야 할 사람은 없었다는 항변이다. 다시 한번 <아나키스트>는 정말로 여수반도에 존재했는가라고 질문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단연코 민중은 있었으되 무정부주의자는 없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상적 무정부주의자 이전 중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마저 관심이 아예 없었다는 민심을 전하고 있다. 여수 사람들은 오로지 삼시 세 때 먹고살기 위해 “허이,휘어이/힘없고 배곯은 참새 떼나 쫒고 사는 일이” 전부였다며 혐의를 만들어 씌워도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우매한 국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는 백성은 그저 백성일 뿐이고 좌익과 우익 사상을 품었다 해도 이 나라 백성이라는 뜻이다.
활어통 바닥에 납작 엎드렸던 광어 도다리들이 순환 모터가 멈춰 선 수조를 뛰쳐나와 땅바닥에 온통 널브러진 횟집 앞에서 구경꾼의 논란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왼쪽으로 눈이 쏠려있으면 광어고 오른쪽으로 쏠려있으면 도다리라며 광어와 도다리의 구분법을 잘 안다는 자 오늘도 그 자의 높은 목청 아래 함부로 분별해선 안 될 슬픈 과거사가 또 한 번 들춰지고 뒤집어진다 -<좌광우도> 부분
음침하기 짝이 없는 ‘마래터널’을 지나 ‘만성리’를 가리키는 해안선의 푸른 바다의 수려한 풍광은 여행객의 시선을 압도한다. 그러나 과거 여순 사건의 역사적 학살 현장을 떠올리면 생각은 달라진다. “굴 밖 비렁에는 요령 없이 터널을 빠져 나가다/무지막지한 손가락 총에 맥없이 수장된/수많은 통곡소리가 아직 파도치고/태풍이 쓸고 간 만성리횟집은 밤이 돼도 컴컴하다”는 암울한 시적 울림은 감정선을 넘고 만다. 기어이 ‘여순 사건’의 역사적인 장소성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럴 때 시인은 만성리 횟집 활어 통에서 쏟아져 나온 광어를 떠올렸다. 사실 횟집에서 광어와 도다리는 많은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된다. 능숙하게 말로 풀어낸 물고기의 외양을 묘사하다 보면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는 물속에 사는 물고기일 뿐이다. 사람도 얼굴 생김새보다 궁극은 인간답게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에서 본다면 같다. 인간의 잣대로 구분 짓는 그 자체가 잘못된 판단임을 시인은 충고하고 있다. 김진수 시인의 ‘좌광우도’는 물고기를 통해 여순 사건 발생 당시 민중적인 의식과 삶을 광어에 빗댄 시적 완성에서 최고의 환유에 닿고 있다. 또한 그 당시의 위정자들과 국가를 조롱하는 가슴 아파 더 슬픈 희화성이 깔려있다. 그것은 김진수 시인의 역사의식이자 문학에 대한 자긍심이며 양심에 근거한다. 또한 여순 사건에 대한 진정한 화해는 진심 어린 역사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며, 인간 존엄에 대한 인식과 각성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 김진수 시인은 경계의 눈빛을 거두지 못한다. <백악기에 산다>는 하찮은 도마뱀에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시인은 거구에 비해 소심한 것은 아닌가 싶겠지만,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과 같다. 그 작은 도마뱀도 한 때 “아주 먼 옛날 백악기에는/저런 징한 것들이 이 세상을 주물렀다고 하는데”라며 우리의 역사 공간에 저런 것들이 실재했다는 것이다. 위기에 몰릴 때는 가차 없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처럼 우리 사회 어딘가에 그런 족속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세력들은 해방 이후 청산되지 못한 친일세력과 그 이후 부도덕하고 부당하게 정치 경제 구조 속에 견고하게 세력화한 집단들을 일컫고 있다. 비참하게도 “오늘도 묵정밭은 과거사로 시끄럽다/세치 혀도 안 되는 혓바닥을 시커멓게 날름대는 것으로/모든 과거사는 조상 탓으로 돌리며/틈틈이 잘라낸 꼬리 춤에 휘둘려 사는/우리는 아직도 백악기에 산다”며 시인은 경고를 보내고 있다. 그래도 문학을 통해 부단하게 꼬리 잘린 도마뱀 같은 부류를 찾아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대한 시인의 소명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부단하게 들춰내는 것이 문학의 존재 이유다.
4. 문학의 지향 지점
<동박새>의 대상화는 시인의 마음으로 현현하고 있다. 피의 역사로 기억되어버린 여수 동백은 그래서 더 붉게 핀다는 “사월이 가면 또 늦으리/전라선 열차를 서둘러 타자/푸른 새벽마다 오동도 동백 숲/마침내 그곳, 그곳에 이르면/행여 지나다 꽃송이는 밟지 말자/그 길의 끝은 늘 거기 있어도/원망도 그리움도 툭툭 털고 가는/모진 저 발걸음 선연한 꽃 다짐/그 속엔 얼어붙은 상처가 있다/가슴마다 뜨거웠던 그리움이 있다//새야, 그래서 늘 푸른 새야/네 작은 날갯짓도 차마 서러워/이 길 끝자리 넋 놓고 바라보는/꽃잎이 붉다 잎사귀도 푸르다”는 한 맺힌 여수반도의 동백꽃을 빌어 해원한다. 그러면서 절정을 가리지 않는 동백을 가리키며 굳이 붉고 푸르고를 따지거나 물을 필요가 없다 한다. 푸르거나 붉거나 죄다 상관없이 동백 제 한 몸에서 나왔을 뿐이라는 김진수 시인의 시집을 일별 하면서 ‘여순 사건’에 연관된 시를 위주로 개진하였음을 다시 밝힌다. 그것은 여순 사건이라는 좌표 속에서 문학적인 상상력마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했고, 그런 사실마저 과거뿐만이 아니라 현재적인 입장에서 숙고, 천착하였음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었으면 한다. 역사 변동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지금은 70여 년 전 발생한 여순 사건의 과거를 현재적인 국가 정치 환경과 유추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이후 문학까지도 정치 사회와 경제에 걸친 다양한 연관성에 대하여 외면할 수 없다. 문학 비평에 우선한 문학의 공리성은 순수성과는 달리 역사, 사회 변동의 맥락에서 변별성을 요한다. 그 변별성은 결국 문학의 시대적 총체성을 제 문제로 확대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순 사건의 발발 원인은 결국 해방 이후 남북 분단의 단초가 된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비롯되었다. 이후 좌, 우익의 첨예한 이념 대립과 친일 세력의 청산 실패 그리고 사회적 배분에 대한 불만과 모순이 가중된 데 있다. 따라서 문학을 통해 정치 사회 경제에 예속 도구화되는 폭력성에 끝없이 저항하는 인간의 존엄성이 현실과 괴리감이 있어선 안 된다는 주의 주장은 유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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