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6回 忠州全國漢詩紙上白日場 要綱
1. 趣旨
2023 제16회 忠州 全國漢詩白日場을 下記와 같이 지상백일장으로 개최하오니, 이에 관심을 가진 全國의 漢詩 同好人 여러분께서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2. 詩稿 마감 : 2023년 6월 30일 도착분
3. 主催/主管 : (사)해동연서회충주지부/中原吟社
4. 參加對象 : 漢詩 創作同好人
5. 詩題 및 押韻:
1) 詩題 : 金生寺址尋訪
2) 押韻 : × ․ 尋 ․ 林 ․ 欽 ․ 斟 ․ 箴 ․ 心(侵目)
★ 原韻詩 參照
★ 詩題는 5言 排律로 作詩(첫구 운자 없음)
★ 반드시 주최측의 시고지에 自筆로 제출요.
6. 作詩上 유의사항 :
1) 詩稿紙 작성시 반드시 楷書(정자)로 쓸 것.
2) 違簾.對不合.疊字.疊意외 일반관례에 준함.
7. 考選 : 斯界 權威者에게 委囑, 嚴正 考選함.
8. 入賞者 發表 : 2023년 7月初 個別通知
9. 施賞 : 壯元 1人 상장 및 부상 일백만원
次上 1人 상장 및 부상 오십만원
次下 1人 상장 및 부상 삼십만원
參榜 7人 상장 및 부상 각 이십만원
佳作 20人 상장 및 부상 각 일십만원
10. 施賞式 : 2023년 12월 9일 오후3시 충주문화회관 전시실
* 수상작은 제42회 해동서예전에 전시함.
11. 送稿處 : 우편번호 27400
충북 충주시 거룡8길 15. 2층 중원음사/해동서당
12. 問議 : 徐東亨 010-8727-5456 / 崔殷盛 010-6589-5731
(사)해동연서회충주지부 / 중원음사
原韻詩 - 金生寺址尋訪(侵統)
吾史稱書聖 우리역사에 서성으로 칭하는
金生寺址尋 김생선생 사지를 찾았네.
聾灘廻綠水 벙어리 여울엔 녹수 맴돌고
堤防繞松林 김생 제방엔 송림이 둘렀네.
瓦片僧名顯 와편에 절 이름이 나타나고
墟碑筆跡欽 유허비엔 필적을 흠모하네.
楷行傳字集 해행은 집자되어 전해지나
篆隷有言斟 전예의 말로만 짐작한다네.
王法何盲信 왕희지 법을 어찌 맹신하는가!
我文必戒箴 우리글을 반드시 경계해야하네.
墨魂千歲響 묵혼이 천년을 울렸나니
時習促求心 시습을 촉구하는 마음뿐이네.
第16回 忠州全國漢詩白日場 簡介
金生寺址
김생사지는 新羅의 名筆이자 海東書聖인 김생(711∼791)선생이 晩年에 창건한 사찰 터로 2000년 12월에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김생사지는 조선 후기 학자 李種徽의『修山集』의 <金生寺重修記>와 『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통하여 北津崖 金生寺에서 頭陀行(고행을 통해 세속의 욕망을 떨쳐내는 수행 방법의 하나)을 닦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북진애는 현재 충주(蘂城)의 북쪽나루인 忠州市 金加面 遊松里 (김생로 325) 盤松부락으로 탄금대 건너편이다.
절터 내에는 1986년에 嘉軒 최완수선생 짓고 雲谷 김동연선생의 글씨로 충청북도에서 세운 <金生遺墟集字碑>가 있다. 절터의 서쪽 강가에는 김생이 쌓았다는 金生堤防이 있고, 동쪽으로는 충주댐 흐르는 물이 벙어리 여울(聾灘)을 만들며 탄금호로 흘러 들어고 있다. 이 사지는 주변에 將臺石이 많고 석탑재와 기와조각, 도자기조각이 산재해 있어 이곳을 ‘瓦當밭’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瓦塼類가 많이 출토되었다. 1999년에 地表조사를 했고, 2002년과 2004년에 충청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를 했다. 그 결과 건물터와 築臺 등의 遺構가 확인되었으며 '金生寺'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문헌기록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金生 김생(金生, 711∼791)
선생은 자는 知瑞이며 신품사현의 첫 번째로 한국서예사의 鼻祖이다. 특히 해동서성으로 불린 김생은 성덕왕 10년(711)에 가난하고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씨에 능하였고 원성왕 7년(791) 80세까지 붓 잡기를 쉬지 않았다. 『삼국사기 권48 열전 제8 김생조』에는 "나이 80이 넘도록 붓을 놓지 않아 예서, 행서, 초서가 신묘한 경지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金生> 父母微 不知其世系 生於景雲二年 自幼能書 平生不攻他藝 年踰八十 猶操筆不休 隸書行草皆入神 至今往往有眞蹟 學者傳寶之
송나라 휘종 연간(1102~1106)의 일로 고려학사 홍관이 進奉使를 수행하여 변경(하남성)에 머물 때, 휘종황제 조칙을 가지고 온 송의 한림대조 양구와 이혁이 김생의 행초 두루마리를 보고 놀라 "뜻밖에 오늘 王羲之의 친필을 보는구나" 하였다. 이에 홍관이 "아니다, 신라사람 김생의 글씨다"라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우기면서 "천하의 왕희지를 제외하고 어찌 이와 같은 신묘한 글씨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끝내 믿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崇寧中 學士洪灌隨進奉使入宋 館於汴京 時翰林待詔楊球李革 奉帝勅至館 書圖蔟 洪灌以金生行草一卷示之 二人大駭曰 不圖今日得見王右軍手書 洪灌曰 非是 此乃新羅人金生所書也 二人笑曰 天下除右軍 焉有妙筆如此哉 洪灌屢言之 終不信
고려 때 李仁老는 김생에 대해 '用筆이 신과 같아 초서도 아닌 듯 행서도 아닌 듯한데, 멀리 57종의 諸家體勢로부터 나왔다 (用筆如神 非草非行 逈出五十七種齊諸體勢)고 하였고, 李奎報(1168~1241)는 왕희지와 짝하여 '神品第一'로 극찬하였다. 李匡師는 '탑본 역시 奇偉하고 법이 있다'고 하였고, 成大中은 백월비 글씨에 대해 '그 획이 마치 삼만 근의 활을 당겨서 한발에 가히 수많은 군사를 쓰러뜨릴 것 같다(其劃如張 千鈞之弩 一發可碎千軍)'고 하면서 孫子의 '그 형세가 험하고 그 마디가 짧다(其勢險 其節短)'는 말에 비유하고 있다. 요컨대 김생은 한국서예 祖宗으로 王羲之에 비견되는 入神의 경지라는 이야기다. 곧 선생이 단연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 유행했던 중국풍의 글씨를 외형적으로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변화로운 짜임과 활달한 運筆로써 자신만의 독창적 경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유일한 서첩인〈田遊巖山家序〉는 왕희지의 <蘭亭序>에 버금가는 묵적으로〈海東名迹〉·〈大東書法〉에 실려 있다. 특히 대표작인〈太子師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는 보물 제1877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한편 1995년 발족한 김생연구회에서는 120여점의 선생 묵적을 수집하였고, 3회에 걸쳐 학술발표대회를 가졌으며, 조선 정조 때 세워진 <趙棨墓碑> <徐命九墓碑> <李玄緖墓碑> 集字碑를 발견하여 탁본하였다. 이에 사료를 모아 <金生書集成> 3권을 출간하고, <金生書法字典>을 만들었으며, 특히 <趙棨墓碑> 는 法帖으로 출간하여 서예인의 習書에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 史料를 항구 전시할 전시관을 추진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