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설쳤다. 10여 명이 남을 배려하며 지낸다고 해도 오픈된 한 공간에서 국적, 성별, 연령대도 다양한 사람들이 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층침대를 오르내리거나, 숙소 밖 화장실 갈 때도 한발 띄는 발소리 마저 조심스럽다. 서너 번 선잠 자듯 자고 깨기를 반복했다.
아침 7시 넘어 어둠 속에서 조심조심 짐을 챙기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짐 챙기기 어려웠는지 갑자기 누군가 전체 등을 켰다. 갑자기 밝아진 빛에 움추렸던 몸 기지개 펴며, 이곳저곳에서 본격적으로 짐 챙겨서 나갈 준비를 한다. 숙소 밖 간이 식탁에는 밀크커피와 빵이 3유로에 준비되어있다. 맛보다는 건강을 위해 사과를 꼭 먹으려는 습관이 든 나는 사과 하나 먹고,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후 8시 20분에 오늘의 목표 32km 의 첫걸음을 시작한다.
오늘은 지리산 반야봉 같은 큰 산을 하나 넘어 가야한다. 최정상까지는 7.7km, 능선 같은 길 10km 그리고 내리막길이다. 길 위에 잔돌이 굴러다니는 지리산 종주길 느낌이다.
5km 정도 가니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한다. 일기예보에 맞춰 내리 듯 시간이 정확하다. 준비된 우비를 입고 다시 출발하려는데 비바람이 엄청나다. 이제 되돌아 갈 수 없는 상황인데, 한국에서 우중 종주산행 딱 그 느낌이다.
순례길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철의 십자가가 있다. 소망을 적은 돌을 놓고 가는 곳이라는데, 순례길 위에 서 있는 소원을 실현 중이라 달리 적을 것이 없었다.
약간의 경사를 가진 오르막과 내리막을 달리다 보니, 지리산 벽소령 대피소를 연상시키는 건물도 보인다. 오늘 내가 순례길을 걷는지 지리산 종주길을 걷는지,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상황에 다소 마음에 안정이 생긴다.
오늘의 숙소까지 구굴맵은 2km 직진을 알려준다. 반면에 순례길 화살표는 큰 우회전을 지시하고 있다. 결국, 순례길 위 옛 마을 길을 지나 4km 빙 돌아서 숙소에 도착했다.
폰페라다 시내에 노부부가 단독주택을 깔끔하게 개조하여 운영하는 곳으로 15유로에 이용한다. 오늘의 숙박객 이탈리아 49세 "나나"라는 흡연 여성과 나 둘뿐이며, 노부부는 저녁에 자신의 집으로 퇴근을 한다. 샹그리나 마시면서 파파고 어플로 대화하며 시간을 보낸다. 어제 설친 잠, 오늘은 6인실에 혼자 잔다. 푹 자길 바라며.
550키로 통과
21.10.31. 10월의 마직막 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