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콜라의 탄생에는 에피소드가 숨겨져 있다. 두통약을 배합하다가 실수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986년 미국 애틀랜타시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존 스티스 펨버턴((John Stith Pemberton, 1831~1888)이 코가 잎과 콜라 열매의 성분을 이용해 두뇌건강과 두통치료를 위한 약물을 만들었다. 원래는 소화제와 포도주가 들어갔다. 하지만 포도주에 함유된 알코올 때문에 많은 사람이 마시지 못하자 포도주를 탄산수로 대체해서 새로운 음료를 만들었고 펨버턴의 경리 직원이었던 프랭크 M. 로빈슨(Frank M. Robinson)이 주성분의 이름을 조합해 코카콜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느날 한 손님이 두통약을 사러 왔다. 환자가 모르고 안입 꿀꺽 마셔버렸다. 그런데 그 맛이 아주 독특하고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이 약을 달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펨버턴은 이것이 음료 역사의 대혁명을 일으킬 것임을 예감했다. 그래서 오랜 연구 끝에 진한 갈색의 탄산 음료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것이 바로 코라콜라의 등장이다. 그 뒤로 판매량이 해마다 급증해 당초 25갤런을 기록하던 것이 1887년에는 1,049갤런으로, 4년 후에는 36만 갤런을 넘게 되었다.
코카콜라는 신비한 색채, 처음 마실 때 풍기는 약간의 약 냄새, 이어지는 짙은 향과 여운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 잡으며 1919년까지 30여 년 동안 꾸준히 팔려나갔다. 그 사이 몇 차례 주인이 바뀌고 장사 수완이 좋은 우드러프가 2,500만 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코카콜라 음료공장을 사들여 코카콜라 회사를 세웠다. 1923년 우드러프의 아들 로버트 우드러프가 코카콜라의 2대 사장이 되어 코카콜라를 세계적인 음료로 만들었다.
2차 대전이 일어나자 코카콜라는 잠시 곤경에 빠진다. 우드러프는 군인들이 갈증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전선의 군인들에게 코카콜라를 제공할 수 있다면 현지 사람들도 이 음료수를 마시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 세계인들이 즐겨 마시는 음료가 되어 더 이상 판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결국 코카콜라에 대한 판매촉진을 위한 대대적인 광고전략은 국방부에 까지 영향을 미쳐 코카콜라를 군수물자로 공급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코카콜라는 명실공히 미군의 ‘생명수’가 되었고 미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여성의 곡선미를 연상케하는 유리병의 코카콜라가 따라다녔다. 2년이 지나지 않아 코카콜라는 영국, 프랑스, 스위스, 네달란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시장에서 엄청나게 팔려나가 판매량이 60억 병을 넘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코카콜라의 성과도 연기 처럼 사리지고 말았다. 이때 우드러프가 고안해 낸 것이 ‘현지화주의’를 추진함으로써 다시 한 번 위기에서 황금기를 만들어냈다. 현지화주의란 현지 인재를 활용하여, 현지에서 생산하고, 현지에서 판매하는 방식을 말한다. 모두 현지인에 의해 만들어지고 관리되었으며, 본사는 기술적인 부분만 제공, 모든 광고는 본사가 책임지는 전략이었다. 이렇게 해서 코카콜라는 한 푼도 투자하지 않고도 상당한 로열티를 거둬들였다.
2012년까지만 해도 인터브랜드 선정 브랜드 가치 순위에서 늘 1위를 차지할 만큼 강력한 브랜드 였다. 2020년 기준으로는 순위가 조금 내려앉아 6위에 랭크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음료 시장에 진출해 있는 만큼 여전히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거대 기업 브랜드다.
코카콜라는 명실공히 국가와 지역 민족과 피부색, 종교를 불문하고 매일 200여 국가에서 20억잔씩 넘게 팔리며, 전 세계 70만명의 직원과 3000만 개의 소매 판매점을 가진 세계 최대의 다국적 음료 기업으로 성장했다. 맥도날도, iPhone과 함께 세계화를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코카콜라의 본사는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있다.
註) 갤런(부피의 단위) : 영국에서는 약 4.545리터, 미국에서는 약 3.785리터에 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