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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행(四川行) 16
“쏴아아아아”
“하야!.....하!”
“두두두두두두두....”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여섯 필의 말과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폭우를 뚫고 너른 관도를 질주하고 있었다. 무정 일행이었다.
일행은 바로 당가로 갔다 거기서 당세극을 만나 떠날 것은 제의했으나, 당세극은 거절했 다. 자신들은 하루정도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고하면서 먼저 출발하라는 말이었다. 뻔한 수작이었다. 먼저 정(釘)을 맞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무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馬)만을 부탁했고, 당세극은 마치 호남아인 듯, 커다랗게 웃으며 말을 내어주었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다면서.....
허나 당세극은 그 결정을 후회했다. 무정은 한사람에게 세필씩의 말을 원했다. 가면서 지치면 그대로 갈아 탈 요량인 것이었다. 당세극은 안색을 핼쓱하게 만들며 마지못해 내주었다.
“아따...대장!....이제 좀 쉬어야 하는 것이 아니오?.....니기미.. 말도 마지막이요. 헐떡거리는 게 곧 죽을 것 같소!”
날아오는 빗속에서 악을 쓰면서 하귀는 무정에게 말했다. 어제부터 쉼 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족히 이백여리는 달려온 것 같았다. 엉덩이의 감각이 아예 없었다. 말도 말이지만 자신도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든 하귀였다.
“다왔다. 이놈아!...조금만 가면 아예강(雅汭江)이 나와!. 조금만 버텨!....”
“쓰벌.....대체 이놈의 비는 갑자기 왜 이지랄로 오는 거야..... 니기미”
고죽노인과 상귀가 빗속에서 악을 써댔다. 그 만큼 비는 거세게 왔다. 그동안 비가 안와서 많은 사람들이 애태우는 것을 마치 알기라도 하듯 십여 장 앞도 잘 안 보이는,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줄기였다.
이윽고 야트막한 구릉을 넘는 순간 무정은 속력을 줄였다. 일행은 선두의 무정을 따라 같이 속력을 줄였다. 무정은 완전히 말을 세우고는 전면을 향해 시선을 응시했다. 저 아래편에 거대한 안개의 띠가 엄청나게 크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아예강(雅汭江:중국발음은 야룽지앙이랍니다.) 이었다. 이름 그대로 새의 부리처럼 크게 휘돌며 흐르고 있었다.
“카악...튓.. 아 대장 뭐하요?...갑시다. 추워 죽것소. 쓰벌”
상귀가 투덜대며 재촉했다. 절기상으로는 칠월의 여름이지만 흠뻑젖은 그들에게는 춥게만 느껴졌다. 시간은 이미 초경이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무정은 발로 말의 옆구리를 박찼다. 힘찬 소리와 함께 무정의 말이 달려 나갔다. 그 뒤를 일행이 바짝 뒤쫒고 있었다.
“으흐....이제 좀 살것네...니기미..”
“글게요 성님. 고 참 따숩네....”
객잔의 가운데 피워진 불가에 앉아 상귀와 하귀가 노곤 노곤 늘어지는 신형을 추스르고 있었다.
일행은 지금 강가주위의 한 객잔에 투숙해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손님도 없는 듯 했다. 무정일행을 제외한 사람들은 없었다. 당연했다. 이런 날에는 사공도 나오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일박을 하게 된 일행이었다.
객잔에는 특이하게도 일층주루의 가운데 부분에 동그랗게 맨땅이 나와 있어 불을 피울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강이 있어 습한 곳이다 보니 그런 구조를 갖게 된 것 같았다. 주인이 피워준 불을 가운데 두고 각기 차나, 화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이거 내일도 비가 오면 곤란하겠는데...”
고죽노인이 혼잣말처럼 웅얼댔다. 비가 그치지 않으면 건널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을와산(日瓦:중국발음이 을와랍니다.)은 강을 건너면 바로 나오는 곳이었다.
“쓰벌, 뭘 그런 걸 걱정하쇼. 하루 더 있으면 되지..”
“쯧쯧..... 지금 놀러 왔냐? 아주 소희가 없다고 살판났구만 살판났어.....”
약간은 노곤한 기분이 좋은지 상귀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고죽노인이 쏘아 붙였다. 상귀와 하귀는 그런 고죽노인의 말에 헤죽헤죽 웃었다. 확실히 잔소리꾼이 없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문득 상귀는 소희를 만나던 날을 생각했다.
소희는 그들이 이곳에 처음 와서 기분 껏 놀다가 만난 여인이었다. 거나하게 취하고 힐끔거리며 유곽을 돌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이 소희였다.
당연한 듯이 상귀는 하귀를 데리고 그 여인에게 다가갔고 하룻밤 청할 생각이었다. 헌데...
“딴 데 가지 말고 꼭 여기 있어, 누나가 일 끝나고 밥해줄 게... 알았지.”
“누나는....집도 없는데 어딜 가?....걱정 말고 다녀와... 꼭 여기 있을게.”
“그래. 착하구난 우리 군아....”
“카악, 퇘...... 소국 이년아 빨랑 안들어 오고 뭐해. ....... 시발, 그 거지새끼 어디 못 치워! 손님 떨어져 이년아!”
덥석부리 장한이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여인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에 소년의 몸이 움츠러 들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그 남자를 노려보더니 다시 소년에게 눈을 돌렸다.
소년에게 은은한 미소를 보여주던 여인은 이윽고 몸을 돌려 차가운 얼굴로 옆의 조그만 유곽 안으로 들어갔다. 군이라는 소년은 이제 아홉에서 열 살 정도로 얼굴에서 때 국물이 졸졸 흐르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돌아 들어가는 누나의 뒷모습을 보면서 또랑한 눈을 침울하게 만들었다.
누나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소년이었다. 그의 눈이 땅바닥을 향했다.
그리고는 쪼그리고 앉아서 밤이슬을 맞기 시작했다.
“.......”
상귀와 하귀는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들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던 것이다. 저 아이처럼 밤이슬을 맞은 적이 어디 한 두 번 이었는가.....상귀와 하귀는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여인치고 사연 하나둘씩 없는 여인은 없다. 헌데 유독 그녀와 동생인 듯한 저 꼬마는 신경이 쓰였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던 그들은 서로 바라보았다.
“쓰벌, 하귀 너 내 성질 알지?...니기미...카악...툇!”
“암요, 성님, 한번 해 보쇼! 저 방쉐이를 그냥,,,,,”
상귀와 하귀는 고개를 끄떡이며 유곽문을 거칠게 제끼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 여인이 아니라 그 인상 더러운 덥석부리를 찾았다. 이런 곳에는 꼭 있는 실세를 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장원을 샀다. 여인을 빼내오는데 물경 오십 냥의 은자가 들어갔다. 물론 그게 전부다 실세한테 간 것은 아니다. 반쯤 죽을 정도로 주물러 놨으니 치료비라도 얹어 줘야 될 것 아닌가,
장원이 백냥정도 들었다.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그들은 더 이상 돈을 쓰지는 않았다. 멀쩡한 물주가 있었다. 고죽노인이라는...........
그렇게 그들은 같이 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성님, 미쳤소? 뭘 그리 실실댄다요?”
하귀의 말에 상귀가 퍼뜩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다들 보는 눈이 완전히 이상한 놈 취급이었다. 그는 목울대를 울렸다.
“카아아아아압....투이엣!.....쓰벌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뭘 그리들 쳐다보고 난리들이셔?”
걸쭉한 상귀의 입담에 고죽노인은 인상을 있는 대로 썼다. 확실히 왜 자신이 이런 놈들과 같이 사는지 이해가 안가는 그였다. 그는 애써 상귀를 무시했다.
“그런데.....아미와 청성, 점창은 와 있을까 모르겠네........”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다시 흘렀다. 힐끔 상귀와 하귀를 보니. 노인네 아니랄까봐 쓸데없는 걱정도 많다는 무언의 눈빛이었다. 그는 아예 그쪽으로는 눈길도 안주기로 작정했다.
“아마 아미와 청성은 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허나 점창은 시일이 좀 걸릴 것입니다. 지형상 저희보다 더 먼 곳에 있으니까요. 그리고 당문은......음.......”
말을 하다 말고 명경은 침음성을 흘렸다. 왠지 너무나 계산적으로 흘러가는 당문이었다.
전가주(前家主) 암격제(暗擊帝) 당현(唐炫)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수하들은 지금 원로들로 대우받아 강호의 대소사에는 당현과 같이 관여하지 않고 있지만 왜 그들이 당문이 변해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그였다.
무정은 말을 우물이는 명경을 보면서 과연 정파라는 의미가 뭔지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어느 정도 강호라는 것을 좀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허나 아니었다. 그가 알고 느끼는 강호는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란 것을 근자에 들어 깨달아 가고 있는 그였다.
“무시주...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명경의 무정에게 물어왔다. 무정은 상념을 접고 명각을 바라보았다.
“마책사의 말대로 정말 오이랏트가 이일에 관여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일행은 뜬금없는 소리에 명경을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럼 마책사가 무정을 끌어들이기 위해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쓰벌, 그게 뭔 말이우, 그럼 그 인간이 거짓말로 우리대장을 속여 부추긴 것이요?”
상귀가 눈을 찢으며 소리쳤다. 사실이라면 용서할 수 없었다. 뱀 같은 머리를 지닌 자였다. 막 그가 계속 말하려 할 때 무정의 음성이 들려왔다.
“거짓말이라는 것, 나도 아오...”
“.........”
상귀의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왔다. 뭔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당췌 알아들을 수 없는 상귀였다.
“오이랏트에 대해 아시오?”
무정의 음성이 계속 들렸다. 그는 명경에게 묻고 있었다. 명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강호상의 일은 잘 알아도 이런 문제는 잘 모르는 그였다.
“오이랏트에게 감숙을 주려 한다고 했을 때 거짓말인줄 알았소. 오이랏트는 원의 후예, 감숙 따위에 만족할 그들이 아니오. 그들이라면 사천까지도 바랬을 것이오, 서장과 운남이 붙어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세를 확장하는데 엄청난 요지로 볼 수가 있소...”
“............”
명경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확실히 이곳은 그렇게 본다면 상당한 요충지다. 자신이 오이랏트의 수장이라도 그리 했을 것이었다. 무정의 말은 계속되었다.
“내가 화가 나는 것은 거짓말 때문이 아니오. 오이랏트는....... 절대로 이런 기회를 놓칠 자들이 아니오, 그들은 반드시 올 것이오. 나라도 그렇게 하겠소. 그것조차 짐작하지 못하는 마대인의 아들에게....... 화가 나는 것이오.
“!........”
명각은 두 눈을 크게 떴다. 혜안(慧眼)이었다. 이 정도까지 내다 볼 수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저 무공만 높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 알겠는가, 무정이 웬만한 병법서들은 전부 독파했다는 것을...........
창밖에는 아직도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내일은 떠나기를 기대하면서 무정은 불가에 몸을 뉘였다. 우선 자신의 체력부터 회복해야 하는 그들이었다.
“제길 영감이 재수 없는 소리만 하니까 이런 것 아뇨. 쓰벌”
“이 싸가지 없는 자식이.... 야 이놈아! 이게 왜 내 탓이야,”
아침부터 싸우고 있는 상귀와 고죽노인은 서로를 보고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원인은 한가지였다.
“쏴아아아아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다만 조금 가늘어졌을 뿐이었다. 무정은 밖으로 나갔다.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쿠콰콰콰콰”
장대비에 불어난 물이 엄청난 속도로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배는커녕 수룡(水龍)이 와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갈 정도의 엄청난 강물이었다.
“흐음....이것 참, 어떻게 해야 될지 난감 하군요..”
명각이 무정의 뒤를 따라나와 강물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엄청난 물이었다. 어느새 뒤에는 일행이 모두 나와 있었다. 다들 이런 물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건너간다.”
짧은 무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행의 고개가 순간적으로 홱 돌아갔다.
“아.씨 대장! 미쳤수, 난 못가우. 저걸 보고도 그런 마음이 나슈?.,쓰벌 난 못가! 아~
쒸”
상귀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내심 다들 동조하고 있었다. 십오장이 넘는 강폭이었다.
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글게요. 어쩔라구 그럽니까? 뛰어서 낼름 건널 수도 없잖수?”
하귀가 말을 거들었다. 옆의 명경과 명각도 은연중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있었다.
“일단 시도해 보겠다. 배로 가는 것은 아니니... 보채지 마라”
말과 함께 무정은 말에 매어져있던 물건까지 챙겨들고는 강가로 갔다. 일행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미쳤군 미쳤어...”
“그러게요 성님. 대체 왜 저런지 모르겠네여.”
“.......”
어이없는 목소리들이 흘러 나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정은 그냥 건너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허리에 철삭(鐵索)을 두르고 말에 매어져 있던 짐까지 등에 진 상태에서....말(言)은 되었다. 허나 그건 말이라 되는 일이었다.
무정의 생각은 간단했다. 자신이 이곳을 뛰어넘을 테니 철삭을 잡고 따라 오라는 것이었다. 다들 경공술은 익혔고, 디딜 곳도 철삭이니 가는 거야 별 걱정 없지만 문제는 어떻게 철삭을 건너편 강둑에 건는 문제였다. 그런데 지금 무정이 걸어서 건넌다고 저 난리였다.
“말려야 되는 것 아닙니까? 무시주는 경공도 없지 않습니까?”
명경이 우려가 섞인 목소리로 명각에게 말했다. 명각은 고개를 끄떡였다.
“사제의 말이 맞네. 아무래도 말려야 될 듯 싶네. 고죽노......!”
명각은 고죽노인을 부르려 하다 말을 잇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이들은 너무나 편안하게 무정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훌훌.....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나는 말릴 생각이 없소이다. 대사님들”
오히려 웃으며 말하는 고죽노인이었다. 명각은 눈을 좁혔다. 도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는 것인지...
“카악, 튓..... 우리 대장은 말이지....”
상귀의 음성이 들렸다. 명각과 명경은 그를 쳐다보았다.
“단 한 번도 허튼소리 한 적이 없었소....쓰벌”
무정의 팔이 올라가고 있었다. 서서히 묵기가 나오고 있었다.
“니미.... 대장은 한번 한다고 하면.......”
상귀는 무정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묵기가 일장이상이나 나오고 있었다.
“반드시 해내는 인간이요.....저 인간은...”
상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귀나 고죽노인이나 같은 표정이었다.
“허어~”
명각은 어이가 없었다. 고작 그런 이유라니..... 신의도 좋고, 의리도 좋지만 이건 다른 경우였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무정에게 가려고 했다.
“사형, 잠깐만”
명경의 소리가 들렸다. 명각은 명경을 보았다. 명경은 눈을 부릅뜨고 손가락으로 무정을 가르켰다. 명각은 그 손을 따라 눈을 돌렸다.
“ ! ”
엄청난 묵기였다. 이제까지 무정이 보여주었던 묵기와는 비교가 안 되는 양이었다. 거의 삼장가까이 뻗어나가는 묵기가 펼쳐지더니 중심에 있는 무정이 보이지도 않았다.
무정은 온힘을 짜냈다. 조금씩 몸을 비틀며 그가 낼 수 있는 모든 묵기를 피워 올렸다. 온몸의 수많은 관절이 따끔할 정도로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빨리 가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또다시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문득 그의 몸 이곳저곳에 힘이 시작되는 곳이 느껴졌다. 양 무릎과 골반, 단전과, 가슴의 명치부근, 그리고 양 어깨와 미간이었다.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가슴과 무릎에 무언가 힘차게 들어서고 있는 것이었다.
무정은 이제 서서히 묵기들을 몸 안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밤마다 모르게 서서히 연습을 해서 그런지 속도가 처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묵기의 량이 워낙 많아 일각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묵기는 아직 일장이상이나 더 남아 있었다.
“저...저건, 도대체.....”
명경의 턱이 벌어졌다. 듣도 보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체도 알 수 없는 수많은 묵기가 무정의 몸에 빨리듯이 들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인간이 기를 다루는 것은 무공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허나 저것은 기를 다룬 다기 보다는 흡기(吸氣)쪽에 가까웠다. 사공(邪功)에서나 보이는 방법이 시전 되고 있는 것이었다.
허나 무정의 흡기는 사공은 아닌 것 같았다. 말 그대로 흡기일 뿐 괴이한 편법을 가지고 하는 마공이나 사공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정파의 고수들도 가끔 흡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정말 가끔이었다. 그만큼 하기가 어려운 방법인 것이었다.
“하아아아~”
긴 한숨이 무정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이제 거의 다 빨아들인 것 같았다. 그는 눈을 떴다.
머리위의 묵기를 제외하고는 몸 주위의 묵기는 보이지 않았다. 온몸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그는 문득 주위를 둘러 보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거의 정지해 있었다. 흐르는 급류도 정지한 듯이 보였고 자신을 보는 사람들도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심지어 빗방울조차 손으로 쳐 낼 수 있을 정도로 느릿느릿 내리고 있었다. 무정은 살짝 위로 떠 보았다.
“ ! ”
일장을 넘어 근 이장 여 부근 까지 수직으로 올랐다. 그는 얼떨떨했다. 한번 도 이런 식으로 최대한 묵기를 끄집어내서 몸 안에 넣어 본적은 없었다. 이건 또 다른 경지였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눈이 적응 안 되는 것 뿐 이었다. 지금 무정은 어지러움을 상당히 느끼고 있었다.
몸 안의 묵기가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빨리 실행에 옮겨야 될 것 같았다. 그는 눈앞의 목표를 보았다.
물에 떠내려가는 부표물이 목표였다. 무정은 그들 중 단단해 보이는 것에 시선을 주었다.
약 이장 간격으로 늘어서 있는 것들을 눈으로 확인했다. 무정은 몸을 굽혔다. 그리곤 힘차게 땅을 박찼다.
“스파앗~”
“허억...”
무정의 입에서 헛바람이 나왔다. 너무나 빠른 속력에 목표를 놓쳐 버린 그였다. 게다가 육장이 넘게 와버렸다. 촛점이 맞지 않아 가물거리는 그의 눈앞에 천천히 흐르는 거친 탁류가 들어왔다. 무정은 이를 악물었다. 일단 가라앉았다가 신형을 솟구칠 요량이었다.
“찰박....”
“...........”
이상한 소리가 났다. 무정은 고개를 내렸다.
“ ! ”
자신의 발이 물에 빠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 빠지기는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아주 천천히 빠지고 있었다. 그는 한발을 들었다.
“찰박”
또다시 물위에 발이 올려졌다. 무정은 눈을 번뜩였다. 그는 그대로 신형을 박찼다. 그의 신형 뒤로 엄청난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촤아아아아아”
명경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솔직히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본건 무정이 묵기를 흡수하고 눈을 떴다가 없어졌다. 사라지고 다시없어졌다 사라지고, 그러더니 또 사라졌다. 허나 이번에는 달랐다. 다른 것도 같이 사라지고 있었다.
“휘류류류류류류”
무정의 뒤에 둘둘 말려있던 철삭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력으로 풀려나갔다. 그리고는.......
“촤아아아아아아”
강의 중간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솟아났다. 근 십여장에 달하는 높이였다. 물방울이 자신들에게 튈 정도로 큰...
“패애애애앵....”
철삭이 엄청난 힘으로 단단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났다. 성공한 것이었다. 일행은 건너편 강가를 보았다. 굽이치는 강물 사이사이로 무정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바위에 단단히 철삭을 묶고는 앉아서 묵기를 방출하고 있었다. 흡사 먹구름 같은 묵기는 공중으로 퍼져 나갔다.
“서,.....설마.....등평도수(登萍渡水)를... ”
“뭣!..”
명경의 말에 명각은 반문했다. 등평도수는 도가의 비전이다. 물위를 빠르게 수평으로 걷는 그야말로 이야기책에나 나옴직한 말이다. 근자에 이르러 등평도수라 함은 그 정도로 빠른 경공이라는 칭호로 사용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어쩌면 홍관주나 소림의 자랑인 청천하일불(靑天下一佛) 덕경(德勁) 정도가 가능 할법한 일이었다. 허나 그들조차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 명각이었다.
“소제는 그렇게 밖에 설명이 안 됩니다. 사형”
명경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닫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분명히 강중앙의 물 기둥은 무정이 발을 디뎠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저 무정이란 자의 능력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아따, 빨리 갑시다. 울 대장 목 빠지것소!”
상귀의 재촉에 명경과 명각은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나갔다. 이미 고죽노인과 상귀는 철삭을 신나게 촐싹대며 건너고 있었다.
무정은 묵기를 방출하고 일어섰다. 굉장한 어지러움이 그를 덮쳤다.
“주르륵”
“ ! ”
무정의 코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무정은 건너오는 일행이 보기 전에 얼른 닦았다. 그리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확실히 이 방법은 상당한 힘을 낼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그만큼 상당한 타격도 주는 것같았다. 코피를 쏟다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그였다. 뭔가 몸에 무리가 가게 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시각도 그리 오래 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한 반각정도, 아니면 일각정도? 그 이상 하면 몸의 균형이 무너지는 같은 느낌이 방금 전까지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온몸이 조금씩 쑤시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함부로 쓰면 안 되는 힘인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그였다.
그는 강가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 멀리서 동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들이었다. 자신의 몸은 나중에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었다. 문득 험난하게 굽이치는 강물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콰콰콰콰콰”
어떻게 저 강물을 건널 수 있었는지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때였다.
“꽈둥,”
일행과는 상관없는 하류에서 두개의 나무둥치가 서로 부딪히더니 한그루의 둥치가 박살났다.
“!”
무정의 머릿속에 무언가 휙 하고 지나갔다. 갑자기 홍관주와의 비무 때 마지막 한수가 생각났다. 공기를 타고 가는 자신의 몸과 초우, 바로 저 나무와 같았다. 물을 타고 흘러가는 나무, 어디에 걸려서 빙글 도는 나무를 박살내고 간 것이었다.
“어이 대장, 뭐 하요? 다들 왔소, 어서 갑시다.
하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정은 고개를 돌렸다. 뭔가 아쉬운 표정이 그의 얼굴에 남았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언젠가는 다시 생각날 것이었다. 괴물을 보는 듯 쳐다보는 명경과 명각을 바라보며 무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입장을 바꿔 봐도 십분 이해가는 그였다.
“저산인가?”
무정은 턱짓으로 전방에 보이는 산을 가르켰다. 고죽노인이 고개를 끄떡이며 말을 했다.
“맞네. 저것이 을와산일세........ 비속에서 봐서 그런지 어째 을씨년스럽네. 그려”
“칵, 큽, 이 영감탱이 또 씰데 없는 소리하네, 재수 없어져, 그만해 영감”
“글게요, 이상하게 노인네가 뭐라 하면 잘 들어맞아요. 그만해요 영감”
“........”
괜히 한마디 했다가 쿠사리만 맞는 고죽노인 이었다.
무정은 고개를 돌려 산허리에 안개구름을 걸친 산을 쳐다 보았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잘 보이지를 않았지만 왠지 그 산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기대되는 그런 두근거림이 아니었다. 왠지 기분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은 몹시 좋지 않은 느낌이었다.
빗줄기는 하릴없이 계속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무정은 신형을 옮겨 빗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동료들도 하나, 둘씩 빗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는 사천성의 끝자락, 짙어져 가는 운무가 세상을 뒤덮고 있는 을와산의 초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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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