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풍성지
경상북도 문경과 충청북도 괴산을 접하고 있는 문경새재를 넘어서면 괴산군 남동쪽 끝의 연풍면이 나온다. 해발 1,017m의 험준한 고갯길, 새재의 서쪽 기슭에 연풍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연풍은 갈매 못에서 순교한 황석두 루카 성인의 고향이며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으로 초대 교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던 뿌리 깊은 교우 촌이다. 연풍 마을과 문경 새재의 구석구석마다 선조들의 자취와 피의 순교 역사가 어려 있다.
연풍은 전체가 소백산맥의 산릉에 속한 험지이고 문경시와 접경지대에 조령산과 백화산 등 소백산맥의 주봉들이 높이 솟아 있다. 그만큼 험난하기에 예로부터 경기도와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서는 순교자들의 피난의 요로로 일찍이 교우 촌이 형성되었었다.
남부여대(男負女戴)로 보따리를 싸서 박해의 서슬을 피해 연풍으로 몰린 교우들은 새재라는 천험(天險)의 도주로를 이용해 여차하면 밤을 틈타 험준한 산속으로 숨어들어 새재 제1, 2, 3관문 성벽 밑에 있는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문경 땅을 넘나들며 모진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죄인 아닌 죄인, 도둑 아닌 도둑으로 한스럽게 살았던 교우들이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잠깐 눈을 붙인 틈을 타 숨죽여 가며 드나들던 그 수구문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연풍과 새 재가 기억하는 첫 인물은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1821-1861년) 신부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 유학해 13년간의 각고 끝에 1849년 4월 15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그로부터 12년간 새 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의 꽃을 피웠다.
은신처로서 새 재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그는 김대건 신부가 1년 남짓 사목한 데 비해 오랫동안 은밀하게 복음을 전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새재 아랫마을인 문경시 진안리의 어느 주막에서 과로로 지친 상태에서 갑자기 병을 얻어 1861년 6월 15일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선종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생전에 쉴 새 없이 넘나들던 새재의 연봉인 배론 신학당 뒷산에 옮겨져 묻혔다.
연풍에서는 황석두 루카(黃錫斗, 1813-1866년) 성인의 발자취가 빛을 발한다. 부유한 양반집 자손으로 나이 스물에 과거 길에 나섰다가 ‘천국의 과거 시험에 급제’하고 돌아온 그는 가족들로부터 모진 반대를 받았다. 화가 난 부친은 작두를 마당 한 가운데 놓고 아들의 목을 걸게 하였지만 태연히 목을 내밀자 눈물을 흘리며 그만 두었다. 그로부터 2년 이상을 벙어리처럼 산 끝에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켰다. 학식과 신앙이 깊었던 연유로 다블뤼 안 주교는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고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에 종사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황석두 루카는 신앙에 눈뜬 뒤 줄곧 정결을 지키는 생활을 해, 페레올 고(高)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려 했으나 부인이 들어가 있을 정식 수녀원이 조선에 없다는 이유로 교황청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안(安) 주교, 위앵 민(閔) 신부, 오메트르 오(吳) 신부, 장주기 요셉(張周基, 1803-1866년) 등과 함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갈매못 해변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연풍에는 또 한 가지 웃지 못 할 일화가 전해진다. 병인박해로 한국 교회는 9명의 성직자를 잃었다. 천신만고로 3명의 선교사가 목숨을 건졌는데 그중 칼래 강(姜) 신부에 얽힌 이야기가 그것이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칼래 신부가 연풍을 지나다가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도망치다가 붙잡히려는 찰나에 그만 전대가 풀어져 돈이 떨어졌다. 그를 쫓던 포졸들은 돈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틈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연풍 공소로 사용하기 위해 옛 향청 건물(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3호)을 사들이게 되면서부터 하지만 매입 후 논과 집 터 정리 작업 중에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이 1964년, 1972년, 1992년 각 1개씩 3개나 발견되었다. 그중 처음으로 발견된 형구돌은 1974년 절두산 성지로 이전되었다.
또 1968년 10월 6일 시복식 후 황석두 성인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남에 따라 성지 개발이 가시화되었다. 1979년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그해 가을 병방골 평해 황씨 문중 산에 묻힌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확인한 후 다음 해 임시로 수안보 본당에 안치하였다가 1982년 8월 25일 연풍 성지로 천묘(遷墓)하여 노기남 대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연풍 성지 조성과 관련하여 고 오기선 요셉(吳基先, 1907-1990년) 신부의 공로와 미국 부모로부터 사재를 가져다가 형방 건물과 성지 부지를 매입해 오늘의 연풍 성지의 주추를 놓고 30년간의 수안보 성당 주임에 이어 1992년 성지 초대 담임으로 부임하여 2004년 은퇴할 때까지 성지 조성에 평생을 바친 메리놀회 정안빈(Robert M. Lilly) 신부의 공로를 잊을 수 없다.
매년 3만여 명의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연풍 성지에는 황석두 성인과 함께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회장의 다섯 성인상과 반석(오성바위)을 재현하여 1986년 축복식을 가졌다. 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의 동상과 높이 8.5m의 대형 십자가는 순례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청주교구 : 괴산 고마리 공소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원소로 고마2길 19 (고마리 874)
장호원 지역의 교세 확장으로 1892년 공소로 설정된 후 두 번째 본당이 된 고마리 본당은 새 본당 신부로 윤의병 바오로 신부를 임명하였다. 윤의병 신부는 박해 시대 교우들의 신앙과 생활 모습, 그리고 순교를 소재로 한 군난 소설인《은화》의 저자로 한국 전쟁 때 인민군에게 피납 되었다.
층북 괴산군 소수면의 고마리 공소(일명 높은 사랑)는 1892년 여주 ‘부엉골 본당’(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의 마르탱(Martin, 沈良, 1866~? 레온) 신부에 의해 처음 공소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자료들에 의하면 고마리 지역의 신자들은 공소 설립 이전부터 선교사들의 방문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그 후 고마리 공소는 1894년 봄부터 부이용(Bouillon, 任加彌, 1869~1947, 가밀로) 신부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부이용 신부가 장호원에 자리를 잡으면서 본당의 교세는 놀랄 정도로 증가하였다. 한편 본당의 발전과 함께 고마리 공소도 날로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1892년만 해도 이곳 공소에 모이는 신자들이 24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1896년에는 85명으로 증가하였으며, 1902년 이후에는 100명 이상에 이르게 되었다. 게다가 1909년에는 132명이라는 놀라운 숫자를 기록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 신자들은 1906년 11월 28일에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를 맞이하여 견진성사를 받는 기쁨을 얻기도 하였다.고마리 본당 설립은 1920년 9월 23일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뮈텔 주교는 윤의병(尹義炳, 1889~1950, 바오로) 신부를 새 고마리 본당 신부로 임명하였다. 고마리 본당의 설립으로 기존의 장호원 본당 지역은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때 새 본당 지역으로 편입된 곳은 괴산, 청주 지역과 보은, 음성, 진천 지역의 일부 공소들로 모두 22개 공소에 신자 수는 1,453명을 기록하고 있었다.
고마리 공소를 본당으로 설정하게 된 이유는 우선 고마리 공소의 교세가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었고, 또 ‘교우들이 일반적으로 옅심하였다.’는 것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이미 본당 승격의 준비도 되어 있었다. 즉 본당 설정에 대비하여 이미 1920년에 ‘넓고 충분한 성당(21칸의 초가집)’을 건립하였는데, 여기에는 아마도 부이용 신부의 깊은 배려가 있었던 것 같다.
윤의병 바오로 신부는 군난(窘難, 박해 시기 교우들이 박해를 일컫던 말) 소설 《은화(隱花)》의 저자다. 은화란 ‘숨은 꽃’이란 말이다. 기해박해 100주년을 기념하여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현양하기 위해 1939년 1월부터 <경향잡지>에 연재되어 1950년 6월 저자가 인민군에게 납치되기 전까지 만 11년 동안 연재되었다. 박해 시대 교우들의 신앙과 생활 모습, 그리고 순교를 소재로 박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고난과 고통을 극복하며 신앙을 증거하려는 교우들의 고뇌와 비애와 인고와 기쁨들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용인 고초 골 공소 (龍仁 枯草골 公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고초골로 15 (원삼면, 고초골피정의집 - 관할: 원삼성당)
공소란 주임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본당보다 작은 신자들의 모임 장소이다. 고초 골 공소는 천주교 수원 교구 내 한옥 공소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고초 골은 1820년경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산중에 모여들면서 생긴 교우 촌이다. 그런데 고종 3년(1866) 병인박해로 이곳에 숨어 살던 천주교인들은 붙잡혀 순교하였고 마을은 불타 없어졌다. 고종 23년(1886) 조선과 프랑스의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에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자 이곳에 다시 천주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기도 및 집회 장소로 사용할 공소를 마련하였다. 현재 공소 건물은 1891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인근 문촌리의 안기선 전 천안군수 댁에서 누에를 치는 데 쓰던 건물을 옮겨서 지었다고 한다. 신자 수가 증가한 1910년대에 현재와 같은 규모로 증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소 건물은 현재도 미사 장소로 이용하고 있고, 주변에는 피정 장소가 조성되어 있다. 이는 근대 천주교가 정착하면서 한옥 건물의 기능과 형태가 변해 가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경기도 용인시에는 한국 천주교 초기 사적지가 많다. 원삼면 학일리 고초골은 1800년대 중반 교우촌이 형성된 곳으로,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 성지와 연결된다. 북쪽 양지면 남곡리 은이성지와 골배마실은 김대건 신부가 자란 곳이다. 병인박해 당시 고초골 교우촌에서 최소 5명이 순교했고, 마을이 불태워졌으나 복구되었다. 1891년 인근 고택의 부재로 공소를 건립했으며, 초기 한옥 구조를 유지한 채 개조되었다. 고초골 공소는 2018년 등록문화재가 되었으며, 전국 다섯 번째 한옥 공소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들이닥친 한양 포졸들은 마을을 불태웠다. 천주교 신자 신 안드레아(당시 65세)는 가족을 이끌고 더 깊숙한 산골로 숨어들어갔다. 다섯 달을 근근이 버텼으나, 포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신 안드레아와 박 바르실라는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마침내 형장에서 최후를 맞았다. 포졸들이 마을을 덮쳤을 때 잡힌 유군심(세례명 치릴로)은 거꾸로 매달려 채찍질을 당하며 배교를 강요당했다. 요행이 목숨은 건졌다. 풀려나온 유 치릴로는 가솔을 데리고 홍주 대전 골(현재 충청남도 당진군 합덕면 대전리)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해미 포졸에게 걸렸다. 유 치릴로는 1867년 해미에서 아내, 동생의 처(제수)와 함께 순교했다.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학일리 고초 골의 순교자는 이렇듯 기록에 남은 사람만 5명이다.
고초 골은 이름이 특이하다. 시들어 말라버린[枯] 풀[草]라는 뜻이다. 지명유래 이야기는 두 가지 버전이다. 하나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추담 오달제(秋潭 吳達濟, 1609~1637)가 태어나자 이 마을 풀이 3일간 말라버렸다고 해서 고초동이라 했다는 설이다. 하지만 오달제는 서울 태생이므로,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두 번째 설은 병인박해 때 천주교인들이 매우 심한 고초를 겪어 고초 골이라 했다는 이야기다. 한자는 다르지만 두 번째 이야기가 왠지 더 그럴듯하다. 고초 골 순교자 가운데 유 치릴로 가족은 고초 골 태생이고, 신 안드레아와 박 바르실라는 고초 골에 들어와 살던 천주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고초 골에 언제 숨어서 공동체를 이룬 교우촌이 생겼는지는 확실치 않다. 전국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되던 1800년대 초라는 주장도 있고, 1850년 전후라는 추정도 제기된다. 오늘날 용인시 곳곳에 1800년대 초반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金大建, 1821~1846) 신부는 주로 용인의 교우촌에서 자라나고 세례를 받았다. 양지리조트로 유명한 용인시 양지면의 남곡리 골배마실에서 소년기를 보냈고, 인근 은이(현재의 은이성지)에서 세례를 받은 동시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심지어 김대건 신부는 체포되어 문초를 받을 때 자신은 용인 태생이라고 진술하기도 했다. 양지면 남쪽에 고초 골이 속한 원삼면이 있다.
고초골 공소는 2018년 등록문화재 제708호가 되었다. 한옥 공소로는 전국에서 다섯 번째다.
< 내용 출처 :가톨릭 굿뉴스/ 국가 유산 포털 /천주교 녹번동 성당 우리나라 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