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롭게 극복한 제사문제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창세기 47장 29절)
시골에서 제사를 지내는 일은 집안의 큰일 중 하나이다. 우리 집안의 경우 1년 동안 아버지 제사부터 4대조 조부모까지 열 분의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매달 한 번꼴로 제사가 돌아왔다. 예수를 믿으면서 처음으로 겪는 신앙의 어려움이 제사 문제였다. 예수쟁이들은 부모 제사도 안 모시는 불효자이고 기독교는 불효의 종교라고 생각하는 게 당시 불신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나는 제삿날 음식을 차려놓고 절하는 것만이 효도의 척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유교적인 분위기의 농촌마을에서 신앙을 이유로 제사를 피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자연히 예수를 믿는 내게는 제삿날이 돌아오는 것이 고통이요, 시험처럼 느껴지곤 했다.
매번 제사가 돌아올 때마다 이번에는 어떠한 방법으로 모면할까 고민도 많이 하였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제사를 피하려다가 어머니와 사촌형님들로부터 책망을 받곤 하였다. 특히 제사는 밤에 지내다 보니 피할 수 있는 방법도 별로 없었다. 한번은 제사가 며칠 앞으로 다가오면서 나는 또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고민하던 중에 ‘그동안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나 같은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고 그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으니 훌륭한 집사, 장로님들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예수님께서 내게도 방법을 주실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제사 문제 하나 해결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장차 큰 일을 하며 기독교인이 되어 천당에 갈 수 있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를 내어 어머니와 사촌 형님들을 설득하기로 하고 제삿날을 기다렸다.
제삿날에 나는 과일과 북어 등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일찌감치 제사에 참례하였다. 그리고 형님들께 “나는 절 대신 기도를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조상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현이며 방법만 다를 뿐입니다”라고 선언하고 절은 하지 않고 혼자서 기도를 했다. 우리 집안에서 제사에 참여하는 인원은 남자들만 15~6명 정도였다. 모두가 제사에서 절을 네 번 정도 하는데 나는 한쪽 구석에서 제사를 지내는 20여 분간 혼자 엎드려 기도를 하였다. 혼자 기도를 하면서도 나의 마음은 고통스러웠다. 형님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나의 행동을 좋게 보았을까 아니면 비웃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 때문에 예수님을 버릴 수는 없다는 오기가 생겨 참고 기도를 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시간 20여 분이 왜 그리 길게 느껴지는지 그동안 많은 생각을 하였다. 어려움 없이는 성공이 있을 수 없고 고통 없이는 천당에 갈 수 없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자 새로운 각오가 생겼고 이 시험을 이기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세 번 정도 참석하여 기도하니 집안의 가장 어른이신 사촌 큰형님이 나를 불러 앞으로는 제사에 참례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사람들은 조상께 제사를 지내면 돌아가신 조상의 신이 와서 제사 음식을 음복하고 가는 것으로 알았다. 때문에 음식 준비에 정성을 다하였고 제사 지내는 시간에는 추운 겨울날이라도 문을 열어놓아 돌아가신 조상의 신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귀신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예수쟁이요, 예수쟁이가 와 있으면 귀신이 오지 못한다고 알고 있었다. 예수쟁이인 내가 앉아 있어서 조상님들이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는지, 아니면 제사 중에 혼자서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이 보기 안 좋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큰형님의 이 같은 결론에 다른 형제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때 어머니께서는 “나도 죽으면 물 한 그릇 못 얻어먹겠구나”라고 낙심하여 대단히 섭섭하게 생각하셨지만 나는 어머니도 예수님을 믿게 하면 설득이 되겠지 생각하고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아버지 제사를 분리하여 추도예배로 대신하였다. 나는 이 문제가 집안의 다툼이나 시비의 대상이 되지 않고 순리대로 해결되었다는 데 마음으로 감사하였다.
이후에도 나는 제삿날에 추도예배를 드리기는 했지만 집안 제사 비용에 협조하고 식사도 같이하여 형제들 간의 우애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 제사 문제는 신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허례허식이 심했던 당시의 관습을 개선했다는 의미도 있다. 당시 시골에서는 관혼상제의 허례허식 풍습이 주는 폐해가 적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때 우리 동네, 이웃 동네 사람들까지 몰려와서 만 3일 동안 장례를 치렀다. 우리 집은 빚을 얻어 그 장례비용을 충당했다. 어린 나이에도 보니 장례식 때 무려 10여 번이나 제사를 드리는 것이나 발인제나 산에 가서 지내는 제사에 사용하는 비용이 너무 많다고 느껴졌다. 이런 일로 가난한 시골 살림은 더욱 빚에 쪼들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은 가난한 형편에 너무 많은 비용을 지출하여 이 빚을 갚는 데 무려 5년이 걸렸고 그나마 결국 5년째에는 논 300여 평을 팔아서 모두 갚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허세를 배격하고 실질적이고 생산적인 투자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만이 효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살아 계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돌아가신 후에 제사를 성대하게 드리는 것보다 백 배, 천 배 큰 효도라고 생각한다.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여 추도예배를 드리는 것도 제물을 차려놓고 절하며 지내는 제사에 못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지 부모님을 추모하는 방법만 다를 뿐인 것이다. 나는 추도예배 때에는 반드시 부모님이 살아 생전에 가지고 계셨던 생활신조나 기억나는 일화 등을 전하며 부모님의 사상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몇 년 전에는 3, 4대까지 지내는 제사를 2대까지만 추도예배를 드리자는 의견을 모아 이야기했다. 부모님을 향한 효성이라는 면에서 추도예배는 제사를 지내는 것에 못지 않게 합리적이고 교훈적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