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이면 가끔 상촌의 산장에 내려간다. 산장은 민주지산으로 가는 길목 오지 속에 허술하게 서 있다. 부천 누나 네는 가끔 주말에 내려가 도회의 삶에 지친 피곤을 풀고 온다. 반달 모양의 돌담이 산장을 둘러싸고 그 뒤편에 밭이 펼쳐져 있어 주말농장 삼아 전원의 즐거움을 톡톡히 맛보고 오는 곳이다. 더구나 산장 건너편에는 도로를 따라 냇물이 흘러내리고 뒤로는 병풍 같은 산자락이 턱 버티고 서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형 지형이다.
누구라도 그곳에 가면 탐을 낼만하다. 앞뒤로 확 트인 공간이 눈을 시원하게 해주고 철따라 피는 꽃들이 산장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거기서 하루라도 쉬고 오는 날이면 세상살이가 부질없어 보일 때도 있다. 이런 재미에 맛 들린 누나도 가끔 전화를 걸어와 상촌에 내려오라는 연락을 넌지시 주곤 한다. 채소를 심거나 수확할 때 그리고 호두를 털거나 오디를 따는 날이면 내 휴대폰엔 불이 붙는다. 그러면 아내와 상촌으로 내려가 진한 전원의 즐거움을 맛보고 올라온다.
누나가 이번 주말에 내려오라고 연락을 준 것도 바로 이런 재미 때문이다. 남자들은 밭에 야콘을 심고 여자들은 쑥을 뜯어 쑥떡을 해먹자는 거다. 말만 들어도 즐거운 이벤트다.
아침 일찍 상촌을 향해 엑셀을 밞은 날은 주말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싱숭생숭 변덕을 부리던 날씨는 화창하게 개어 땡볕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창밖을 스쳐가는 고속도로변 산비탈엔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꽃물을 뿌리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걸려 산장에 들어서자 사람들 몇이 봄맞이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밭두렁에 쪼그려 앉아 쑥을 뜯느라 정신없었고 남자들 몇은 밭에 야콘을 심느라 분주했다. 밭갈이를 하는 경운기 소리 시끄럽게 산자락을 들썩거리고 밭두렁을 오가며 거름을 내는 남자들의 발걸음이 진한 그림자에 젖어 흔들거렸다.
리어카로 거름을 내오던 매형이 너무 늦었다며 농담 삼아 타박을 하자 경운기로 밭을 갈다 말고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던 인식이 형님도 어쩐 일이냐고 악수를 청했다. 일이 많이 진척됐는지 보았더니 겨우 거름 몇 리어카 내고 두둑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나도 괭이로 밭고랑의 흙을 끌어 올려 두둑 만드는 일에 동참했다. 두둑을 따라 비닐을 덮어씌우고 야콘 씨를 심으면 올해 봄 농사는 끝인 셈이다. 작년에 야콘 농사를 망쳐 짓지 않는다고 벼루더니 올해도 건강식으로 먹을 야콘만 눈곱만큼 지을 모양이었다.
그러나 말이 농사지 반거충이들이 무슨 농사를 짓겠는가. 주말 농장 삼아 짓는 농사지만 갑자기 온몸의 근육을 맘 놓고 쓰다보면 금방 일에 지치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도 예전에 고향에서 농사짓던 가락이 있다 보니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 대충 일머리는 알고 있었다. 일이 힘들어 잠깐 쉬는 사이 여자들이 쑥을 뜯고 있는 산자락 묵정밭에 올라갔더니 서울에서 방금 도착한 문수 형님이 반갑다며 악수를 청했다. 이제 일손이 또 한 명 늘어났다. 그러나 일손이라고 해도 문수 형님은 일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시도 때도 없이 마셔 대는 술 때문이다. 매형과 술 실력이 같다 보니 일하다 술 생각이 나면 밭에 퍼질러 앉아 술로 시간을 때우기 일쑤다. 여기다가 고향을 지키는 인식이 형님까지 합세하면 들판은 금방 술판으로 변하고 만다.
조금밖에 일을 하지 않았는데 점심때가 된 모양이다. 밭갈이를 하던 경운기와 농기구들을 모두 밭에 흩으려놓고 점심을 먹는데 밥 보다는 너나 할 것 없이 술잔에 눈이 가있다. 농사꾼 같으면 점심을 후딱 먹어 치우고 미련도 없이 밭으로 향하지만 남자들은 땡볕이 뜨겁다고 그늘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세월 좋게 술잔만 돌리고 있다. 매형은 술맛이 들렀는지 점심 먹고 한참 쉬다가 시작하자며 미리 선수를 쳤다. 정말 천하태평이다. 이렇게 천하태평으로 짓는 농사가 잘 될 리 없다.
작년에도 야콘을 수확했는데 생각보다 재미를 보지 못했다. 옥수수나 고구마 감자 등 심심풀이 삼아 지은 것들이야 제대로 되었지만 술에 젖어 지었던 야콘 농사는 폐농을 하고 말았다. 야콘을 심다 말고 밭에 주저앉아 마신 술기운이 밭고랑에 배었는지 가을에 수확한 야콘은 몸통도 시들하고 굼벵이가 속을 파먹어 몰골이 말이 아니다. 속이 상했는지 내년에는 절대 야콘 농사 안 짓는다고 큰소리를 치던 매형은 작년의 태평농법이 그리웠는지 올해도 또 야콘 농사에 덤벼들었다.
물론 야콘 농사는 다른 농사보다 힘이 들지 않는 장점도 있다. 열대 작물이기 하지만 우리나라 기후와 토양에도 맞고 한번 심어놓으면 잔손이 많이 가지 않아 지금은 그런대로 야콘 농가가 제법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점심을 끝낸 후 여자들은 상촌장에 가서 쑥떡을 만들어 올 차비를 서둘렀다. 밭에서 뜯은 쑥을 차에 한 바구니 싣고 상촌장으로 향하는 사이 남자들은 밭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시 밭이 경운기 소리로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인식이 형님이 경운기로 밭고랑을 타 놓자 그 뒤를 따르며 두둑을 만들고 비닐을 덮어씌웠다. 그리고 비닐위에 막대기를 콩콩 꽂아 띄엄띄엄 구멍을 내고 그 구멍에 야콘 씨앗을 넣고 물뿌리개로 물을 흠뻑 뿌려준 후 흙을 덮어주었다. 이렇게 하면 아무리 억세고 질긴 잡풀들도 비닐을 뚫고 올라오지 못해 누렇게 시들고 만다. 일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경운기로 한창 밭갈이를 하던 인식이 형님이 술상 좀 차려오라고 연신 투덜거렸다.
이때 쑥떡을 하러 상촌장에 갔던 아내가 술상을 차려오고 이내 총총히 사라졌다. 풀색 짙은 쑥떡 몇 개도 접시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쑥떡 한 개를 집어 들자 상큼한 쑥 향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쑥떡에 반지르르 흐르는 윤기가 아주 찰지고 기름지게 보였다. 술잔이 오래 돌아갈수록 남자들은 아예 밭두렁에 퍼들고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서울에서 직장을 퇴직하고 반거충이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신경 써서 농사를 지을 리 없었다. 농사일에 목매인 농사꾼이 아닌 바에야 더 그렇다. 주말 농장 삼아 심심풀이로 짓지만 잘 되면 좋고 못돼도 그만이기 때문에 남자들의 눈길은 온종일 술잔에 가 있다. 취기가 오르면 경운기조차 어디 있는지 모르고 삽과 괭이를 찾느라 시간을 보낼 때도 있다. 두둑을 만들던 손들이 세월아 네월아 술잔을 돌리기 일쑤다. 하루 종일 술기운에 절어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이 높은 탓인지 밭에는 벌써 산그늘이 스멀스멀 내려앉았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게 지글거리던 뙤약볕도 한풀 꺾여 햇살이 약해졌다.
바로 이때였다. 여자들 셋이 산자락 묵정밭에 쪼그려 앉아 쑥을 뜯고 있는 광경이 눈앞에 다가왔다. 상촌장에 가서 쑥떡을 만들어 오더니 재미를 붙여 또 오복이 둘러앉아 칼질을 하고 있었다. 술잔을 기울이는 남자들 곁에 붙어 앉아 기분을 맞춰 주기는커녕 지겹도록 쑥만 뜯는 여자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 야속함 때문인지 인식이 형님이 손가락을 입안에 집어넣고 휘리릭 휘파람을 날려 보냈다. 휘파람 소리가 밭고랑을 지나 산자락에 출렁 가 닿는가 싶더니 쑥을 뜯는 여자들이 고개를 돌려 우리를 쳐다보았다.
예전엔 휘파람으로 여자들의 마음을 많이도 설레게 했단다. 그러나 시골에서 뼈 빠지게 일을 한 탓에 갓 예순이 넘은 얼굴이 더 늙어 보여 도저히 여자들 마음을 설레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음이 설레기는커녕 휘파람을 불면 여자들이 날 살려라 도망을 칠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휘파람 탓이었을까. 십자수 같은 봄꽃들에 둘러 싸여 쑥을 뜯던 여자들이 깔깔대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공이다. 성공, 어릴 적 처녀애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던 인식이 형님의 휘파람 소리는 아직도 살아 황혼기에 접어든 여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것이다.
이제 어지간히 술기운에 젖은 모양이다. 남자들은 간신히 엉덩이를 일으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인식이 형님의 행동은 가관이다. 잔뜩 취기가 올라 연신 혓바닥으로 입술을 훔치는가 싶더니 눈을 껌벅이며 일을 하는데 밭고랑에 넘어질까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괭이를 잡고 두둑을 만드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완전 갈지자 모양이었다. 인식이 형님이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밭둑길 따라 들판도 기울어보이고 봄꽃들이 꽃물을 뚝뚝 흘리는 산자락도 기울어 보였다. 경운기는 아예 밭둑에서 맥 놓고 주인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태평농법으로 짓는 농사가 올해에도 잘되기를 바란다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그런데도 매형은 두고 보라며 큰소리를 쳤다. 농사가 잘 되지 않아도 도회에 살며 심심풀이 삼아 짓는 농사로는 이 태평농법 만 한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