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제가 발생하면 조급하게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조용히 나를 들여다보고 원인을 분석해야 합니다. 거미줄이 생겼다고 거미줄만 제거할 것이 아니라 원인인 거미를 잡아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원인을 알면 문제는 다 풀립니다.
잘 가다가 믿음이 흔들려 쌓아놓은 탑을 순간 무너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문제 역시 원인이 있습니다. 이는 누군가의 말에 현혹되고, 누군가의 말에 적당히 타협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누군가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어서 그것이 미혹이나 유혹이라 여기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해서 그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그랬습니다. 아담은 분명히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손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는 남편인 아담을 꼬였습니다. 이때 아담은 단호히 거절했어야 합니다. 하와야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들었으니 그럴 수 있다 해도 아담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장본인이니 ‘절대 안 돼!’라며 뿌리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의 말이기에, 사랑하는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만 선악과를 먹고 맙니다.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에덴에서 쫓겨나 인생의 무거운 짐을 져야 했습니다(창3:17~19).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6)고 경고하십니다. 가족이 죽일 만큼 원수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나를 넘어뜨릴 수 있는 자가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으니 네 믿음에 확신을 가지고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제게 ‘철산예루살렘교회’를 ‘한국예루살렘교회’로 바꾸라 하셨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제가 가장 사랑하는 목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는데 뜻밖에도 그 목사님은, “이 목사, 무슨 한국예루살렘이야? 그냥 철산이라고 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이구, 잘했네. 이 목사는 충분히 그렇게 되고도 남을 사람이지.”라고 격려해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태클을 걸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누구와 의논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후로 다시는 하나님의 일을 사람과 의논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는 수제자였습니다.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마16:15)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말한 후 예수님께 큰 칭찬을 받았고, 하늘 문을 여닫을 수 있는 천국열쇠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곧 고난을 받은 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너무 놀라,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마16:22)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16:22)라고 꾸지람을 하셨습니다. 솔직히 베드로의 행동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스승이 고난을 당하고 죽는다는데, “그러셔요?” 하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되레 베드로의 말에, “고맙다. 나를 걱정해줘서.”라고 어깨를 토닥거려주셔야 인간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에 아예 동조하지 않으셨고, 수긍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대쪽 같은 믿음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것은 다 불의(不義)이기 때문입니다. 불의와는 타협해서도 안 되고, 불의와 타협하는 자에게 봄은 절대 찾아오지 않습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삼십일 동안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이든 구하면 사자굴에 넣는다.’는 금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심지어 그 명에 어인(御印)이 찍힌 것을 알고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측근이 타협을 요청했을 수 있습니다. “저들이 당신을 참소할 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삼십 일만 참으세요. 그것이 지혜입니다.”라고 말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에게 타협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앞서 가셔서 사자의 입을 봉하셨고, 그를 더욱 높이셨습니다.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느브갓네살왕이 만든 신상 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왕은 그들을 심히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에 타협을 시도했습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단3:15). ‘이제라도 금신상에 절하면 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단3:16)라며 단호하게 타협이 없음을 밝힙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대쪽 같은 믿음입니까? 이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탄복하셨고, 주의 천사들을 급파하사 풀무불 가운데서 그들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을 보겠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더니,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진 3절에는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다’고 나와 있습니다. 3절 즈음에 아내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거나 아내와 의논했다는 대목은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아브라함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했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냐? 하나님의 명령은 타협해서도, 누군가와 의논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의논하면 절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아브라함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예’, 오직 순종뿐입니다. 순종할 때 기적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어느 잔칫집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이 가셨습니다. 그런데 잔치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를 알게 된 예수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2:5) 했는데,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아구까지 채우라”(요2:7)고 하십니다. 그 말에 하인들은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만일 하인들이 집주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면 집주인은 노발대발했을 것입니다. “뉘 집 잔치를 망칠 셈이냐? 물을 내다 주라니.”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누구와 의논하지 않고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받들었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고, 하마터면 썰렁해졌을 잔칫집이 더욱 흥겨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아멘’ 할 때 기적이 따라오고 우리 삶도 흥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말씀은 우리의 지식이나 상식, 그리고 경험에 반(反)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와 깊이 의논해야 할 것 같고, 누군가의 조언을 충분히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우리가 취할 태도는 오직 ‘아멘’ 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 우리는 예수님과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1:19).
마귀는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놈은 우리와 가장 가깝고,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미혹을 역사합니다.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다가오기 때문에 혹하기 쉽고,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거듭 당부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
여러분, 신앙은 타협이나 협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순종뿐입니다. 할렐루야!
달콤한 마귀의 궤계에
절대 속지 말아라
신앙에는 절대
타협이나 협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