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태국불교에서 비판불교와 무아설에 대한 논쟁
6-1. 비판불교
일본에서 최근 수십년 동안 여래장과 관련된 문제, 그리고 명백한 모순으로 간주되는 무아와
연기의 가르침에 관련하여 특히 활발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무아와 일종의 불변하는
자아로서의 여래장 사이에 긴장이 발생하지만, 그것은 모든 존재는 본질적으로 또는 원래
깨달은 존재 [본각사상(本覺思想, 일본어: hongaku shis?)]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고, ‘순응’과
같은 경향으로서의 일본 문화에서 불행한 정치적·사회적 영향이라고 주장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동아시아 불교의 여래장사상과 관련된 비판불교운동[조동종 계열의 고마자와(Komazawa,
駒澤)대학 노리아키 하카마야(Noriaki Hakamaya, 袴谷憲昭)와 시로 마츠모토
(Shiro Matsumoto, 松本史朗)교수와 같은 인도-티베트 불교의 학자 및 전문가들이 이끄는
운동]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무아 및 연기설로서의 근본불교 가르침에 모순되는
전체 여래장사상과 본각에 대한 비판은 사실상 거의 모든 일본불교에 대한 불교 전통 내부로
부터의 공격이고, 동아시아 불교의 대부분은 진짜 불교가 아니라는 공격이다.
시로 마츠모토는 모든 것의 기반으로서의 실재는 기체(基體, dh?tuv?da)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1986). 이 기체라는 말은 마츠 모토가 [자아(?tman)의 경우에서뿐만 아니라
『대반열반경』의 불성 (buddhadh?tu)으로서의] ‘참된 영역 또는 요소에 관한 교리’라고
말하면서 만든 말이다.
이 사상은 존재들의 인과관계와 관련된 붓다의 가르침, 즉 깨달음의 경험에서 발견한 진리와
모순되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여래장은 기체이고, 따라서 붓다가 비판하고 부정하기 시작한
바로 그 예이다.
마츠모토에 의하면 여래장사상은 결국 불교의 이단이다.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모든 것이
진정으로 평등하고 진정으로 똑같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그 자체가 현 상황을 받아들인
불이익과 이것을 포함한 불의에 대한 차별의 한 모습으로 이어진다.
마츠모토의 동료 이자 공저자인 하카야마는 어떤 의미에서 자아는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
없음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여래장의 전체 사상은 불교의 중심사상인 이타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것에 반대된다고 주장한다.
마츠모토는 나중의 연구에서 이 여래장인 기체를 (‘모든 존재는 하나에서 생기고 하나로
돌아간다’는) 사유의 영원하며 근원적인 방식과 연결시키고, 그것을 개념적으로 일본
토속종교와 결부시킨다. 다른 곳에서 마츠모토는 모든 사유와 개념화를 뛰어넘거나 혹은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그 사상들은 일반적으로 선불교에서 제공하는 이해방식의
중심이다―여래장 및 본각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그가 이해하는 다른
사상들은 전혀 진짜 불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노리아키 하카마야는 선(禪)은 불교가 아니고, 『유마경』에서 발견되는 유명한 비이분법의
교리는 불교가 아니고, 유식도 불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를 표현한다고
주장했다.
비판불교운동의 존재에 주목하면서, 분명히 그것에 대해 평가할 만한 입장이 아니다. 분명히
우리는 여래장전통에서 (때로는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널리 불교도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문헌들과 수행법들을 가지며, 역사를 통해 수많은 지지자들에 의해
불교도로 간주된 문헌들과 수행법들을 가지고 있다.
이 문헌과 종파, 수행법 들은 붓다 당시의 시간으로까지 돌아갈 수 있는 다른 문헌, 종파와
수행법들,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진화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 모든 진화와
발전은―때로 다른 불교도들은 거부했다―붓다(또는 한 붓다)의 의도에 따라 행동하는
불교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선의로 착수한 것이다.
불교 내의 한 집단이 불교의 특정한 발달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거부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불교 부파 밖의 비판적인 입장에 서있는 학자는 종교적 연합에 대한 지지자들의
주장에 따르는 진정한 불교도로서 이 모든 발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결국 불교 역사에서
여래장사상은 일반적으로 (아마도 적절한 해석의 대상이 될 때) 합법적인 발달의 한
방식이나 다른 방식으로서 대승불교로 받아들이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이론’에서는 다음의 사상에 더욱 민감하다. 즉 B는 A에서 합법적
발달을 할 수 있고, 그것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C는 B에서 합법적 발달을 할 수 있고,
그것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그리하여 결국 Y로부터 합법적 발달을 하여 Z에 도달하고,
또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Z는 A와 공통점이 거의 없거나 또는 전혀 없으며, 일부 또는
참으로 많은 방식은 그것의 정확한 반대일 수 있다.
A에 대한 지지자는 그러한 근거에 따라 Z가 정확하지 않고 별개의 존재라고 전적으로 거부할
수 있다. 그리고 내부자로서, A의 지지자로서 Z를 거부하듯이 F 또는 L도 (또는 심지어 B)
거부할 가능성이 있듯이 그들은 그렇게 할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Z의 지지자들은
결국 그들은 A와 전혀 다르지 않은 입장을 해석하는 방법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같은 그룹이나 가족의 (이 경우에 티베트 랑통학파에서 여래장을 이해하는 방식처럼,
불교의) 모든 구성원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다.
다카사키는 여래장의 원전들은 단지 비불교도들이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트만을
가르쳤다는 비판에 대해 그들이 자각했고, 그들은 이 비난을 거부하고 비난에 대해 스스로를
방어했다고 비판불교의 열성적 신봉자들을 상대로 지적한다.
그렇지 않으면 Z의 지지자는 그들이 궁극적으로 참된 가르침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A는 (티베트의 젠통학파의 경우에 여래장을 이해하는 방식처럼) 단지 예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자로서 우리는 진정으로 불교도가 되기 위해 선의로 주장하는 집단내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분쟁과 전략을 단지 주목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점에서 그들의 자기 정의를
받아들인다.
이 책의 접근 방식은 전체 대승을 택한다면 역사적·지리적 확장에 비추어 볼 때 공통된 핵심이
거의 없는 텍스트, 부파 및 수행의 방대한 범위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대승보다 불교 전체를 말한다면 더욱 그렇다.
누군가가 (비판적 불교운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교 내의 발전(자체적인 자아 이해의
측면에서)이 실제로 불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그 사람이나 집단은 의도적으로나
수사학적으로 ‘불교’의 정의를 제한한 것처럼 보인다.
이 제한된 정의는 아웃사이드로 전락한 텍스트, 부파와 수행의 새로운 정의를 제안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불교도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설명적 주장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의도적인 지시이다.
그러므로 그 주장은 그들 자체의 자아 이해에 의하면 불교도가 아니지만 스스로 불교도라고
생각하는 텍스트, 부파 및 수행이 아니다. 그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주장은 오히려 그들이
불교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채택한 불교의 정의에 의해 불교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반드시 불교에 대한 보다 엄격한 정의이고 다른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마츠모토, 하카야마 등은 동아시아의 여래장 전통은 진짜 불교가 아니라고 간주한다.
왜냐하면 어떤 특정 문헌과 교리에 표현된 붓다의 본각의 경험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 불교의
정의(그들의 불교에 대한 정의)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경험에서 붓다는 절대적 중심사상인 연기설과 무아를 발견했다. 이것이 그가 가르친 것이고
불변하는 절대의 모든 형태를 반대한 것이다. 이것을 유지하는 것 만을 불교라고 부를 수 있다.
따라서 비판불교의 지지자들은 인도의 초기불교 원전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 종사하는 외부인의
입장과 진짜 불교로 간주되는 것에 대한 합법적인 접근을 채택한 내부자의 접근 방식을
결합시킨다.
문헌적 연구를 기반으로 한 초기 인도불교의 교리적 지향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지지하는 것이
아닌 것, 혹은 그것과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것이 아닌 것, 혹은 그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은 진짜 불교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비판불교운동의 존재 자체를 일본의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대승불교의 한
차원으로 여기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양립할 수 없는 무아와 연기설 혹은 중관학파의 공사상에
기초하여 여래장사상에 대한 거부에서, 그들은 불교 역사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하나의 문제는 어떻게 정립된 무아와 연기설 혹은 중관학파의 공사상의 가르침들을 불교의
정체성으로 여기는가 하는 문제이다. 불교가 역사에 존재했듯이, 불교 교리사에 대한 묘사의
관점에서 이 교리들은 분명히 존재할 수 없다.
적어도 여래장에 대한 어떤 방식의 이해는 무아설 혹은 중관학파의 공사상과 어긋나는 것이다.
여래장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이해는 대승불교에 과거에도 널리 퍼졌고, 현재에도 퍼져 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의 자기 확신으로 그들은 불교도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무아설을 정법으로
채택하더라도, 여래장의 교리를 부파 내에서 이 정법들과 일치하거나 또는 정법의 교리들과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것들은 불교도들이 씨름하고 논쟁하는 문제들이다. 그것들은 불교 전통(들)의 구성원인
내부자들의 문제들이다. 그들이 말한 것을 주목하고 설명하기는 하지만,
외부자들로서 우리는그들의 해석적인 규정을 따라야만 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