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이 지난 지 39년!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어서 겉으론 멀쩡해 보이던 상처 자국이 속에서 곪아 터지고 있다.
1947년 미·소 공동위원회의 회담이 완전히 결렬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여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유엔의 감시 하에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안을 가결하였으나 소련과 북한의 인민위원회가 이를 거부하자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38선 이남에서는 제헌국회를 구성하고 제정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 이승만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이승만 정부 수립 전후에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격화되고 1946년 9월 서울 철도파업, 10월 대구 폭동, 1948년에는 제주 4.3사건과 더불어 여순 반란사건,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 일대에서 빨치산 활동으로 남한의 치안 상태는 극히 불안한 가운데 1848년 11월 17일 오대산 부근으로 북한군 침투로부터, 10여 차례의 38선 일대에서의 북한군의 침투는 민족 분단으로 치닫던 역사적 과정의 한 단면이었고 4.3 사건과 여순 사건은 60년이 흘러간 지금도 미 완결로 남아있다.
1948년 4월 3일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이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하여 일어난 봉기로 정부에서는 고성읍 신월 리 에 있는 국방경비대 14연대를 제주 항쟁의 진압을 명령했으나 14연대의 80%가 넘는 인원이 사병 및 민간인 출신들로 구성되었으며 그중에는 좌파적 성격을 띠는 장교들, 김지회, 홍순석과 같은 인물 외에도 상당수 있었고 지창수 등 사건의 앞잡이 부사관 들도 포함된 속에 남로당 세포조직이 침투하여 남로당에 물든 장교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이었으므로 항쟁한 사건이 여순반란사건이다. 정부는 일련의 사건들은 공산주의의 활동 일환으로 보고 반란 주동에 직 간접으로 관계되어있던 좌파계열에 대한 공세에 나서고 극기야 1948년 12, 1일에 국가 보안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고, 좌익과 우익의 갈등을 극복하고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반공주의 정책을 천명했다.
1950년 6,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산하를 피로 물들인 3년 1개월의 싸움으로 450만 명의 희생자중, 한국군 22만 7,748명 미군 3만 3,629명 유엔군 3,194명이란 엄청난 피의 대가로 지킨 우리조국이다.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시위 와중에 4월 11일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모습으로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발견의 계기로 4.19 혁명이 발발 하였고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의 정권은 붕괴하였다.
4.19 혁명으로 수립된 허정 과도정부나 장면 정권은 혁명이 요구한 과제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부정축재자, 부정선거 관련자 처리에 미온적이었고, 이승만 정권에 억압되었던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제대로 수렴하지 못하고 반공법과 데모 규제법의 제정 시도, 국민적 지지를 억압하기에 이르러 큰 불만을 불러왔다.
또한 장면 민주당 정권의 내분으로 호응할만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격돌하며 사사건건 대립을 세웠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복잡함 속에 1961년 5, 16일 새벽 박정희를 위시한 군사 쿠데타가 성공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6개 항의 혁명 공약을 발표했다.
1)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태세를 재 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 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를 바 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여 국가 자주 경제재건에 총력을 기울인다.
5)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 중한다.
6)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혁명정권은 1964년 3월에 결성된 「통일혁명당」 창당 준비 위원회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향하며 북한의 노선과 일치하는 강령과 정책을 가지고 있었고 핵심 인물이었던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이 직접 북한에 가서 조선노동당 입당사실이 발각되면서 실체가 드러나 1968년 8월 군, 경, 정 합동작전으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국헌을 위반한 군사 쿠데타는 많은 국민들의 저항을 불러왔고 정치권의 어지러움과 학생들의 민주화운동,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쓴 이념을 달리한 단체들의 난립 속에 4.19 이후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 운동단체인 민민청, 통민청, 민자통 등이 결성되어 활동하였고, 교원노조, 사회당 등 정당, 단체의 주요 인물들을 투옥하고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4,19시기 분출하던 학생, 언론, 교사, 노동, 혁신정당, 통일운동 등 민주적 욕구분출을 억압하였고, 이후 한일회담 반대의 학생시위가 거세지면서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위기에 처한 군사정권은 1964년 8월 인혁당 사건을 발표하여 학생시위 조종은 북괴의 지령을 받아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조직 인혁당이 있다고 발표했다. (1차 인혁당 사건)
1969년 대통령 3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연임하였고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재야세력들은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유신정권에 저항하였다. 유신정권은 「대통령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민청학련」의 정부전복과 국가변란 기도사건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법 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 공산당과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정부전복 후 공산계열의 노동 정권 수립에 이르기까지 과도적 통치 기구로서 민족지도부의 결성 계획까지 하였다고 발표였다. (2차 인혁당 사건)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은 1977년 1월 「한국 민주 투쟁위원회」(민투)를 결성하여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및 기관지인 「민중의 소리」를 8차례 배포하는 등 반 유신 투쟁을 전개했다. 또한 「전국민주청년 학생 총연맹」(민청학련) 등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청년학생위원회를 조직하여 「민주구국학생연맹」 「민주구국 교원연맹」 「민주구국 농민연맹」을 시도하다가 1979년 10월 4일 이재문, 이문희, 차성환, 이수일, 김남주 등을 비롯하여 그해 11월까지 84명의 조직원을 구속한 사건이었다.
「부·마 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체제에 대항한 항쟁이다.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 시위를 시작하고 다음날 17일부터 시민계층으로 확산을 시작으로 부산 마산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했다.
박정희 정권은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
10월 20일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민간인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이처럼 국가의 비상사태에 10월 26일 궁정동에서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었다.
「1979년 10,26사건」으로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으나 전두환, 노태우등 신군부세력이 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고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내리고 5,18 민주화운동 소요를 진압한 뒤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1980년 9월 1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이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전두환 정권시절 1986년 5,3사태, 10,26, 건국대 항쟁, 1987년 6월 항쟁, 등 소요사태가 있었다.
노태우 정권 때 「부산 동의대」 사건은 1989년 5월 동의대 입시 부정에 항의하던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행진하던 중 시위를 해산시키려고 경찰이 공포탄을 발사하여 격분한 학생들이 전경 5명을 납치 폭행하며 학내에 감금하여, 경찰 5개 중대로 증원하여 구금된 전경들을 구출하는 과정에 경찰관 7명이 화재와 추락으로 숨지고 외부 근무 중이던 경찰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91명의 학생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또한 분신 정국(1991년)의 학생소요 사건과 분신 정국(1991년)도 있었다.
문민정부 들어 이념적인 사건은 눈에 띄게 줄어 김영삼 정부 때 연세대 사태(1991년), 김대중 정부 때 여중생 압사 사건 촛불시위(2001년),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2004년), 쌀 비준 반대시위(2005년), 노동 탄압 규탄대회(2006년), 대추리 사태(2006년), 이명박 정권 때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시위(2008년), 쌍용차 사태(2009년), 한진중공업 희망 버스(2011년), 박근혜 정권 시절 국정원 선거 개입 항의(2013년), 철도노조 파업(2013년), 민주노총 총파업(2013), 민중총궐기(2015~2017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2016~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민중 총궐기」에서, 1) 재벌 책임 강화 2) 민주주의) 3) 자주평화 의 3가지 문항에서, 재벌사 내 유보금 환수, 국가보안법 폐지, 공안탄압 중지, 국가정보원 해체, 양심수 석방, 역사 왜곡중단, 역사 교과서 국정화 계획 폐기, 대북 적대 정책 폐기, 5, 24조치 해제, 사드 배치 반대,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 중단 같은 중차대한 예민한 문제들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함은 국민 전체의 고민거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1948년 정부 수립이래 70여년을 지나는 동안 자유민주주의의 보존을 위해 한순간이라도 마음 놓지 못하고 반공의 장벽을 철두철미하게 쌓으면서 젊음을 불살라온 노인 세대에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란 말만 들어도 소름 돋치고 거부반응이 일어남은,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은 이해할 수 없겠으나, 잃었던 국가를 우방과 함께 되찾아 경제 대국으로 만들어 놓은 대한민국이 있었기에 좌 편향된 이념도 토론하고 의사표현도 할 수 있는 자유가 가능한 일이 아닌가. 생각에 잠겨본다.
4, 3사건을 비롯하여 여순사건, 통혁당 사건,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남민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 아직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엎치락뒤치락함을 보면서, 사건당시의 정권들이 반공과 법률로 풀어놓은 정답이 아마도 모범답안이 될 수 없었나 생각도 해보지만, 이념대립 속에 민주화운동전개 과정이 폭력이나 무기를 들고 정부에 대항하는 일들은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정당한 투쟁이라 하여도 국가를 책임진 정권은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을 터이나, 정권유지를 위하여 선의의 국민들도 반공의 올가미로 엮였던 사실다툼은 언제나 끝을 볼 수 있을까?
해묵은 옛 사건이 그 당시 대법원의 판결을 부정하고 새로운 논리와 신설법의 제정으로 뒤집히는 일이 허다한 작금의 현실에서, 5,18 사건은 대법원의 판결이 나서 완결된 사건인데 이제 와서 이의를 제기함은 민주항쟁을 모욕하는 민주 패륜이라는 아우성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 금할 길 없다.
작금의 불씨는 야당 의원들 3명이 국회에서 5,18 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개최로 전국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이미 제정된 「진상규명위원회」법에서는 북한군 개입 여부 진상을 규명하도록 돼 있는데도 북한군 개입설 공청회의 과잉반응은 어떻게 봐야 할지 머리가 헷갈린다. 어느 야당 의원의 말처럼 5,18 유공자의 명단과 공적 조서를 밝히면 오히려 5,18의 망언이 설 자리가 없질 않겠나. 생각도 해 본다.
지나간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을 적폐 청산이라 했던가.
아무리 민주화운동에서 벌어진 일이라 하더라도 무장 세력에 의한 교도소 습격, 예비군 무기고에서 실탄과 무기 탈취, 장갑차와 군용트럭을 탈취하여 시내를 혼동으로 만들고 군 장병을 깔아 죽인 사건, 계엄군에 대항하여 군인을 죽인사건, 순수한 광주시민을 카빈총으로 사살한 끔찍한 사건들은, 일제 강점기처럼 국가를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이 아닌, 민주화운동이란 이름 속에 묻어둬선 안 되리라 보며 철저히 규명하여 순수한 민주화운동자 이외의 곁붙이를 가려내고, 행위자에 대한 처벌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모쪼록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국민이 납득 수긍할 수 있는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여 후세에 남겨지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