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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祥寺
'人生은 느끼면 비극이고, 생각하면 희극이다'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한시대를 풍미했던 최고급 요정 대원각 이자리에 "길상사" 라는 사찰로 다시 태어난다. 대원각 안주인 김영한 여사의 뜻으로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 1996년 5월 20일에 대원각은 기존 건물을 개보수, 새로운 사찰인 길상사로 자리잡는다. 특이한 점은 여느사찰의 일주문과는 다르게 사천왕이나 화려한 탱화가 보이지 않았다. 성북동 하면 부잣집 들이 연이어 있고 여러나라의 대사관저가 몰려있는곳 그곳의 중심이라 할수있는 곳에 푸름이 짙은 길상사가 있었다. 극락전의 전경 대원각일 때에는 "금실" 과 "은실" 이 있던자리 라고한다. 지장도량 이라서 아미타부처님을 중앙으로 왼쪽엔 관세음보살 오른쪽에 지장보살님이 계신다. 사찰의 코스모스는 또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가련헌 자태가 한껏 단장한 옛여인의 모습 일까.... 아직 붉은 상사화가 몇송이 남아있다. 꽃무릇 이라고도 하고 석산 이라고도 하는 꽃... 서울에서도 이렇게 만나지다니 감개무량 하다. 철이 지나서인지 많이 시들어 대공만 남아 있는게 많다. 옛날 한여인이 스님을 사랑해 매일을 그리워 하였지만 결코 만날수 없는 인연 안타까운 마음으로 절 앞마당에 꽃을 심었는데 잎이 진다음에 꽃이피고, 꽃이 진다음에 잎이나니 꽃과 잎은 영원히 만날수 없는 인연 이 여인의 운명과 흡사하여 상사화라 부르지 않았을까... 종각이 있는 자리는 옛대원각 시절 경비실 이었던 것이라 한다. 吉祥寺의 역사는 매우 짧으면서도 그 설립 계기가 특이해 잘 알려져 있다 이 사찰은 1960년대와 80년대 말까지 삼청각,청운각과 함께 최고급 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자리에 세워진 사찰이다 서울 성북동 三角山 깊숙한 산자락의 대원각 주인이었던 김영한(金英韓)여사가 7000여평의 대지와 건물 40여동 등 천억원대의 부동산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해 97년에 지금의 吉祥寺로 탈바꿈하게 되었다고 한다. 요정 대원각의 주인 김영한(金英韓) 할머니는 법정 스님께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싯가 천억원 대 재산을 시주하겠다는 김영한 할머니 무소유를 말씀하시며 받지않겠다는 법정스님 결국,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하여 길상사가 되었다. 이날 법정스님은 김영한 할머니에게 길상화 법명을 주고 108 염주를 할머니 목에 걸어주었다. 그후 길상화는 길상사 경내를 산책 하면서 "나 죽으면 화장해 눈 많이 내리는 날 길상사에 뿌려주세요. 유언하고 이튼날인 11월14일 108 염주 한 벌을 목에 건 채 83세에 세상을 떠난다. 그해 12월14일 흰눈이 많이 내리던 날, 그녀의 유언대로 길상사 경내에 스님들이 재를 뿌려주었다. 길상사는 쳔주교와도 연(緣)이 깊은데 개원 법회엔 김수한 추기경이 참석하였으며, 2000년엔 천주교신자인 최종태씨가 성모마리아상과 유사한 형태의 관세음보살 석상을 조각하여 봉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길상사에선 수녀님과 천주교 신자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천주교신자인 최종태씨가 기증한 성모마리아상과 유사한 형태의 관세음보살 석상 길상사를 기부한 김영한 할머니 길상화(吉祥華) 시인 백석(白石)과의 소설 같은 러브스토리.
청산학원 3학년 시절의 백석 18세 때의 김영한 (자야 김진향)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집안이 몰락하자 가난한 탓에 16살에 몸 약한 신랑에게 팔려갔다.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에 남편은 우물에 빠져 죽는다.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끝에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 그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스스로 한성 기생 ''眞香''이 되었다.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잡지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미모와 시와 글, 글씨,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기생이였다. 스물 세살때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스승이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함흥감옥을 찾아가지만 면회를 거절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신지식 여성에서 다시 기생의 길을 택한 그녀 함흥기생이 되면 지역유지의 도움으로 스승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때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된다. 김영한 보다 네 살 더 많았던 백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있다가 우연히 만난 기생 김영한과 첫만남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짐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이별은 없을 것” 하지만 백석 집안에서 아들이 기생에게 빠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키게 된다. 그러나 결혼식날 밤 집을 빠져 나온 백석은 영한에게 달려와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하지만 영한이 거절하자 백석은 1939년 만주로 떠나게 된다 이것이 두 사람 사이에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백석은 만주를 유랑한 뒤에 광복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그녀가 떠난 후 그녀가 서울로 돌아간 뒤였기에 만날 수 없었고 그것이 영영 이별이 된다. 평생 백석을 그리워한 김영한은 1996년 2억원을 들여 자신의 연인 백석을 기리는 "백석문학상"을 재정하고 같은해에 대원각을 시주하게 된다. 침묵의 집 맞은편 다리를 건너면 무소유를 몸소 실천한 김영한 할머니의 공덕비가 세워져있다. 金英韓여사의 일화 한가지.. 어느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 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백의 춘하추동 오언율시 중에서 가을 편이 ‘장안 달 밝은 밤에’로 소개된 적이 있다. 진나라 때부터 민간에서 불려진 노래로 이백 외에도 중국의 여러 시인들이 ‘자야가’를 썼다. 백석이 하늘에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 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영한은 ‘내 사랑 백석’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백석은 그 녀를 子夜라 불렀는데 子夜가 죽기 열흘전 기운없이 누워있는 노령의 김영한여사에게 젊은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 천억원대의 재산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후회? - 그 사람 생각을 언제 많이 하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가 어리둥절 ??? - 천억을 내 놨으니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소용 있어.. - 다시 태어 난다면 어디서.. 다시 한국에서?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文學 할꺼야.. -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천억이 그 사람 詩 한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詩를 쓸거야.. 김영한 여사의 또 다른 일화 80평생 보통사람과는 다른 인생을 살다가신 분 서울 대원각 부지에 길상사를 지어 기부하신 분으로도 잘 알려진 그 분. 1999년 12월 어느 날 KAIST에 김 영한 여사의 유언장이 전달되었다. 국가과학기술 영재양성에 써달라는 유언과 함께 100억원이 넘는 김영한 여사 소유 부동산을 KAIST에 기부하고 빈 몸으로 떠나신 분. 그 분은 힘든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가난한 나라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셨습니다. 우리나라가 부디 부강한 국가로 발전하기를 기원하면서 생을 마치시는 순간에도 국가과학기술발전을 위해 잔여재산을 기부하신 아름다운 분 -모셔온 글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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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의 유래
길지만 한 번 읽어보시고 참(眞)을 생각해볼만한 자료인 것 같아 보냅니다.
無所有 노래에 연호하는 남녀들"
-자유대한을 사랑하는 무소유 노래 불러야-
이법철, bubchul@hotmail.com
등록일: 2010-03-16 오후 1:39:11
작금의 한국사회는 2010년 11일 길상사에서 입적(入寂)하여 동월 13일 송광사에서 다비식(화장)을 치룬 박법정(朴法頂)스님을 추모하는 일부 고해대중들이 다투워 추모사를 하고, 눈물짓고 있다. 그것은 대통령 임기내내 자신이 목숨바쳐 보위(保衛)해야 할 대한민국과 국민들의 안보정서는 아랑곳 없이 대북퍼주기로만 임기를 마치다시피하고 죽은 DJ, 노무현에게 보였든 인정 넘치는 굿판같다. 법정스님을 향한 추모사는 신화로 변할 지경에 이르렀다. 왜 이러한 현상이 오는 것일까?
고해대중의 일평생 자나깨나 화두는 돈이다. 고해대중이 법정스님의 '무소유'론(論)에 감격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돈 때문에 울고 웃고, 양반이 되고 천민이 되고, 성공과 실패자가 되고 천인공노할 범죄자가 되고, 남자는 지조를 꺾고, 여자는 정조방매(貞操放賣)까지 하는데, 무소유론에 심취하여 책을 구매하려고 다투워 경쟁하고, 소장하여 두고두고 독서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제마음대로 돈을 벌지 못하거나, 돈은 많지만, 보시하기는 싫고, 마음으로라도 무소유사상속에 '버리고 떠나며', '맑고 향기롭게' 관념적으로 살아보겠다는 심산(心算)인가? 아니면 돈에 대한 집착을 떠나 보시를 시작하려는 것인가?
글은 진짜 그 사람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 작가는 돈을 위해 국화빵, 붕어빵적 글을 써 낙양의 지가를 올릴 수 있는 것이니, 이는 작가의 자유다. 작가의 의도대로 고해대중이 정신없이 돈에 대한 화두를 내던지고 무소유를 연호하고, 감격하여 훌쩍이며 합창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가산(家産)과 가족(家族)을 정리하고 자연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 결론인가? 아니면 고달픈 인생에 관념적으로 한번 해보는 것인가?
60년 중반, 필자는 해인사에서 법정스님을 처음 해후했다. 그는 해인사 해우소(解憂所) 가는 길 옆 건물의 끝방에 기거하면서 책을 읽고 글쓰기 공부에 매진했다. 그의 글쓰기는, 첫째, 사찰환경과 자연에 대한 찬미였다. 둘째, 무소유, “내 호주머니는 먼지 뿐일세”식의 글을 썼다. 그다음, “버리고 떠나기”, “맑고 향기롭게”를 연속 발표했다. 그는 마침내 신조어(新造語)의 글쓰기로 대성공했다. 명성과 돈이 따랐다. 돈많은 여신도들이 후원인이 되려고 경쟁했다. 예나 지금이나 승속(僧俗)간에 유명인사에게는 일부 여성들이 설치는 것 아니든가? 해인사 밑 숙대 재학생인 미스 유가 정성을 다하기도 했다.법정스님의 무소유 노래에 감동받은 여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법정스님에게 1200억 상당의 대원각(大苑閣)의 부동산을 바치는 요정주인이 등장했다. 15세 동기(童妓)출신이다. 그녀는 70년대 일인(日人)들을 위한 한국 제일의 기생관광의 대모인 대원각 주인 김영한씨이다. 그녀는 대원각에서 가난한 한국의 딸들에게 일인들을 위해 가무(歌舞)하게 하고 술따르게 하고 몸팔게 해서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법정스님을 만나 업보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갈 수 있다는 법어에 일평생, 술 팔고, 몸 팔아서 번 돈을 일순에 바치는 결심을 했다고 전한다. 여성은 종교적으로 겁을 주면 큰돈을 내놀 수 있다는 것을 필자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법정스님에게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부인 홍라희 여사가 후원회장으로 등장했다. 불교계는 물론 세간에 부러움의 화제가 일어났다. 법정스님이 입적하기 전 삼성병원에서 입원가료를 받아왔는데, 병원비 6천2백만원을 홍라희 여사가 전액 지불했다는 언론보도는 또한번 세인을 경탄케 했다.
어느 정부 고급 공무원 부인은 무소유를 보고는 감동하여 남편의 3개월치 월급의 돈을 남편 모르게 법정스님에게 송금했노라는 자랑을 하며, “돈이 없는 분이라서 보냈는데 잘했지요?”라고 필자에게 문의해왔다. 남편은 뼈골이 빠지게 돈벌어 가정에 내노니 부인은 괴상한 내조를 하는 것이다. 승려의 “호주머니에 먼지 뿐일세”가 돈많은 여신도들의 송금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것을, 필자는 예전에 미쳐 깨닫지 못했다.
“내 호주머니에는 먼지 뿐일세”의 무소유 노래는 급기야 불교계를 뒤흔들었다. 부지기수의 승려들이 여신도들을 상대로 무소유 노래를 부르는 전성기를 일으킨 것이다. 법정스님처럼 1000억이 넘는 보시를 받을 수 있고, 재벌회장 부인을 후원회장으로 만날 수 있다는 웃지 못할 사행심이었다. 어쨌든 “호주머니에 먼지 뿐일세”의 노래는, 인정많은 보살님들의 지갑을 열게 하는 신통한 주술의 힘을 보였다. 그러나 기가 찬 것은 백화점을 소유한 모 승려가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신도들에게 자신의 무소유사상을 강변하며 신도들의 지갑을 열게 한다는 소식이다. 사기협잡이요, 추태가 아닌가? 진짜 무소유를 실천하는 승려들은 무소유를 말하지 않는다.
법정스님은 진짜 무소유한 일생을 살았을까? 모두 버리고 떠나서 그의 호주머니에는 먼지 뿐이었을까? 아니다. 그는 불교계의 어느 승려가 따를 수 없는 유소유(有所有)의 행복을 누렸다. 무소유는 그의 희망사항을 노래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는 세계 여행에 자주 나섰다. 그는 출판사에 불같이 호통을 치면서 인세(印稅)를 챙겼다. 수십억의 인세와 신도들의 보시금, 사찰 방문 때의 보시금, 길상사에서 회주스님께 드리는 약값조의 보시금 등으로 어렵지 않게 살았다. 그런데 신화같은 전설을 만들어 우상화하여 이득을 보려는 출판사나, 일부 승려들이 낡은 옷 한 벌을 세상에 보여주며, “이것이 그분의 전 재산이라오” 라는 홍보는 불교계에서 늘 써먹는 진부하고 고전적인 홍보로 고해대중은 식상해 한지 오래이다. 인정속에 눈물로 석별하는 고해대중에게 진실해야 한다.
법정스님의 돈은 어디로 갔을까? 신화같은 찬사의 절정은 법정스님의 수십억 돈은 수혜자를 알 수 없는 불우한 학생들에게 학자금 보조로 지금 되었다고 한다. 불우한 학생 학자금 보조를 해주었다는데 이빨 가는 자가 있을까? 언제나 법정스님의 보시는 익명이었고, 수혜자도 이름이 없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을 떠나 맑고 향기롭게 모두 지원하고, 법정스님은 누더기 옷 한 벌 남기고 떠났다는 측근들의 주장이다. 법정스님에 관한 영화라도 제작해야 할 기막힌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눈물많고 인정많은 고해대중은 훌쩍이며, 성자(聖者)의 무소유행에 찬가를 부르며 신화적인 이야기를 입으로 전할 수밖에 없다.
법정스님은 불교 이외에 어떠한 사상을 가진 분일까? 그는 목포상고의 선배인 DJ를 추종했다. 자신의 입으로 DJ에게 송금을 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의 글은 자유대한을 사랑하고 보위하는 글은 없다. 세습독재체제 속에 수백만이 비민주, 무인권속에 기아로 죽어가는 것을 환히 알면서, 김일성, 김정일의 폭압정치에 대해서는 꾸짖는 것은 커녕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박정희를 독재자로 증오했다. 자유민주를 위해 월남으로 간 장병들을 증오했다. 왜 미국편에서 베트남 공산당에 총부리를 겨누냐는 지론이다. 그는 진보적 승려들이 부안방폐장, 새만금, 천성산, 사패산 등 국책사업의 저지할 때, 배후의 총사령관이었다. 사패산 농성에는 현장에 나타나 대정부 투쟁을 독려했다. 법정스님이 건재했다면, 이명박정부의 ‘사대강 살리기’는 큰 암초를 만났을 것이다. 버리고 떠난다면서 왜 그리 집착했을까?
법정스님은 불교계 내부에도 정치필봉을 들어 선전선동에 나섰다. 94년, ‘4,10 승려대회’ 때 자신이 지원하는 승려들이 종권을 잡게 하기 위해 투쟁적으로 나섰다. 결과는 어떤가? 당시 송서암 종정을 내쫓고, 당시 서의현 원장을 멸빈케 되었으며, 임원두 종정 사서실장을 멸빈 시키는 등 많은 승려들이 중징계의 화를 입었다. 비민주 무인권적인 보복정치인 중징계를 받은 승려들을 사면받게 하기 위해 필자는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만, 법정스님은 단 한줄의 사면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은 냉혹한 처신을 했다. 부모형제를 떠나서 부처님께 귀의한 같은 승려들을 무슨 권한으로 멸빈을 시키는 것인가? 청춘을 산사에서 보내고 난후 다 늙어 조계종에서 내쫓으면 늙은 몸을 이끌고 어디로 가야할까? 법정스님은 냉혹했다. 불면나찰(佛面羅刹)은 무엇인가?
고해대중은 법정스님의 신조어,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 ‘맑고 향기롭게’, 로 감동받아 찬사 가득한 추모사가 충천해지고 있다. 명작소설 ‘성녀 아도라타’가 생각난다. 창녀를 땅에 묻고 비석에는 ‘성녀 아도라타’가 묻혀 있다고 주장을 하니 추모객이 정사진을 이룬다는 이야기다. 필자는 법정스님의 입적을 보면서, 통도사 극락전의 조실 김경봉(金鏡峰)대선사의 입적 직전 법어가 생각난다. 경봉 대선사는 이렇게 말했다.“인생은 한바탕 연극이다. 나는 중(僧) 역활 잘하고 간다. 그대들은 사바세계(인간세상)를 무대로 멋지게 연기하기 바란다.”
필자는 경봉대선사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이모(李某), 처자있는 승려가 비구승인척 연기를 하고, 삼보정재를 훔쳐 수백억씩을 착복하여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서, “호주머니에는 먼지 뿐일세”의 구차한 노래로 여신도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연기이다. 무식한 자가 깨친 것처럼 헛소리 하는 연기도 재미있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 덕에 풍요롭게 행복하게 살면서, 빨갱이 노릇하는 연기는 통탄스러운 일이 아닌가?
고해대중은 어떤 수행자를 존경해야 할까? 자기 참마음이 부처(是心是佛)다는 것을 알면 된다. 그러나 굳이 마음속에 스님의 상을 존경하고져 한다면, 사명대사와 같은 분을 스승으로 모시기를 권한다. 그는 유생들의 핍박속에도 임난(壬亂)이 나자 불교가 존재하는 조국 조선과 민족을 구하고져 신명을 바쳤다. 선조 37년 6월, 사명대사는 일본에 건너가 전쟁이 없는 강화조약을 맺고 귀국길에 일본군에 강제 끌려간 포로 3천6백여명을 데리고 귀환했다. 불귀의 객이 될 줄 알았든 포로들은 얼마나 환희용약 했겠는가? 당시 조선은 사명대사의 능력에 경탄했다.
오늘날 불교의 호국론(護國論)은 불교가 존재하고 중흥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 보위다. 예나 지금이나 위국헌신(爲國獻身)하는 불제자들이 참된 불제자인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아야 할 것이다. 미사여구(美辭麗句), 언어문자(言語文字)를 내세워 세상을 현혹하고, 이중인생(二重人生)의 연기를 잘하는 자에 박장대호(拍掌大呼)하고, 울며 돈바치며, 추종할 것은 없다.
끝으로, 저승길에는 부처도 갔고, 조사도 갔다. 일세를 빼어난 글쓰기로 명망을 떨쳤든 법정스님도 갔다. 필자도 갈 것이다. 죽어 한줌 재로 화하여 사라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인정많은 고해대중의 찬사속에 법정스님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고해대중이 찬사속에 오열하며 석별의 정을 표하는 따뜻한 마음을 알고 있을까? 법정스님이 이땅에 다시 온다면, 자유대한을 사랑하고 보위하며, 불교중흥 속에 자비를 실천하는 문장가로 오기 바란다. ◇
李 法徹(bubch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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