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평택 생태시 문학상 대상작품
신문지의 노래 / 허민
나를 스쳐간 독자여
지나온 생을 되돌아보는 밤이다
구멍 난 가슴 한쪽 스스로를 위한
작은 부고 기사 하나 실어보지 못하고
결국 이렇게 끝을 맺는 밤이다
낡은 집 바닥에 젖은 채 누워
한껏 페인트나 풀을 뒤집어쓰거나
먹다 남은 짜장면 그릇 따위 덮고 있을 줄
몰랐던 쓸쓸한 밤이다
노숙인의 유품이 되어 그의 마지막 겨울을
나의 마지막으로 덮게 될 줄 몰랐지만
마지막까지 나를 필요로 했고
나는 그의 외로움을 가려주었으니
조금은 괜찮았던 밤이다
생이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으니
내가 한 그루 푸르고 싱싱한 나무였을 적
한 여인이 내게 등을 기댄 채
텅 빈 하늘만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 말을 걸기도 했지만
괜찮다, 나쁘지만은 않았지 생각한 밤이다
그녀를 위한 한 권의 인생이 되기 위해
방울의 손톱들을 삼키고
여러 날의 미치도록 거센 바람과
눈송이의 쌓여가던 무게를 견뎠던 밤이다
스쳐간 이름들, 흔들리는 이파리로 살다가
결국 흰 눈 가득한 백지가 되어
그대들을 위한 간절한 소식 적었고
한 줄의 슬픈 사건이 되기도 했던 캄캄한 밤,
한 사람을 사랑한 여인이 부러 깨뜨린
유리잔 조각 하나하나 쓸어 담는
구멍 난 종이 뭉치, 나 기꺼이 되었던 밤이다
그러니 독자여, 바닥을 뒹구는 내 마지막 보거든
지난한 밤을 기억 말고 대신
끝내 되고자 했던, 살고자 했던
내 푸른 문장들을 상상해 주길
잠시라도 그대 가슴 안에서
솨솨솨_ 내 전생의 숲이 불어오는
길고도 짧은, 오늘의 깊은 밤이다
허 민 (許旻)
강원 양구 출생
2015년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
2022년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제11회 평택 생태시 문학상 우수상 작품
탄소발자국 / 이은영
지구의 체온이 오르면
허물어진 빙상이 실꾸리처럼 풀린다
해빙이 사라지고
물살 머문 자리마다
제자리 찾지 못한 퍼즐 조각처럼
소용돌이치는 얼음의 파편들
여름이면 폭염으로
녹색풍경이 제 뼈를 깎고 피를 말리면
젖지 않는 잎맥이 붉은 울음소리 뱉는다
허공을 태우는 뜨거운 바람이 배회하고
달아오른 햇살이 뼈 없는 행적을 남기면
꿈에서도 눈이 아닌 비가 내린다
지구의 들숨과 사람의 날숨이」
균형을 맞춘 동안
세상의 체온이 내려가고
잎이 무성해진다는 것은
새소리가 모여드는
나무의 우듬지가 풍성해진다는 문장이다
스마트폰과 전자기기에 절전모드를 씌우고
낯선 언어가 아닌 익숙한 모음을 읽으면
탄소 발자국이 작아진다
탄소 발자국의 개수와 크기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기후변화에 관대하다
돌계단의 각을 켜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숨을 고른다
오래된 이메일을 지우고 스펨 메일은 차단한다
높낮이가 다른 골목 그림자가 지평선을 지울 때
궤도를 벗어났던
뭇별들이 떼를 지어 서늘한 밤하늘에 자리를 잡는다
그린슈머*가 땅을 디딜 때마다
탄소발자국의 치수가 줄어든다
*그린슈머: 친환경, 유기농 제품을 이용하고 환경보호를 추구하는 사람
이은영
2023년 제6회 최충 전국 공모전 문학상 대상
2021년 제4회 안정복 문학상 은상
2020년 이은방 문학상 장원
2020년 여천천 문예대전 울산광역시의의장상
제11회 평택〔생태시 문학상〕심사평
심사평: 진춘석(심사위원장, 시인, 본협회 평론분과장)
저희 평택문협에서 제정한 <평택 생태시 문학상>이 이제 11년을 맞이하였습니다. 감개무량합니다. 전국에서 역량을 가지신 많은 시인들께서 응모해 주셔서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 <평택 생태시 문학상>은 생태시를 지향하시는 시인들이 계시고, 또한 이 작품을 통하여 우리 인간 사회의 생태환경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같이 하는 독자들이 계셔서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생태시는 단순한 시문학이란 테두리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건전한 생태 환경 사회로의 거듭남을 위한 비전을 제시한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시의 한 장르인 생태시의 존재적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자연과의 공존의 틀을 공유해야 합니다. 생태시는 자연과의 공존을 거부한 인간문명을 고발합니다. 생태시 작품들은 자연을 인간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바라보는 가운데, 생태계가 파괴되어가는 현상을 현실적 사회문제로 부각시켜 고발합니다. 생태계 파괴를 주도하고 있는 사회적 원인들을 인식함으로써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됩니다. 생태시는 생태계가 병들어가는 원인을 사회적 부조리에서 찾을 수 있도록 하여 참여문학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생태시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테마로는 사회적 모순, 정치적 부조리, 물신주의, 과학기술만능주의, 성장제일주의 등에 대한 시인들의 사실적 인식과 구체적 비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연(自然)이라는 거울을 통하여 현실을 비추어보고, 언어의 청진기(聽診器)로 사회적 병리현상들을 진단하며, 정치 및 사회의 부조리로부터 환경 파괴의 원인들을 추적해 나가는 시인들의 다양한 현실인식이 ‘생태시’의 토대를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수백 편의 응모작품 중에서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허민 시인의 <신문지의 노래>를 선정했습니다. 대상 작품인 허민 시인의 <신문지의 노래>는 환유(換喩)로 우리에게 ‘존재의 근원은 존엄(尊嚴)하였다’라는 커다란 울림을 줍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는 가요? 관계를 통하여 존재합니다. 상호 존재하는 관계존재가 ‘나’ 혹은 ‘우리’를 규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즉 나의 존재는 나와 관계하는 존재들과의 상호작용으로 규명되고 있습니다. <신문지>는 <독자>가 존재하므로 존재합니다. 신문지의 운명은 생의 여정 속에 톱니바퀴처럼 연결이 되어 마침내 그 바퀴가 멎을 때 생의 종말이 확인됩니다. 이 과정을 독자는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지극히 사소한 존재들끼리 상호작용하는 존재의 원리, ‘평범 속에 진리’가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신문지(존재)는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원시림의 길디긴 숲의 나무로 존재하였던 신문지(나)의 원형인 archetype(아키타입)은 ‘길고도 짧은 밤’이라 하여, 인생은 길지만 그러나 죽음은 한 순간이라는 짧은 밤의 생의 종착역을 환유(換喩)적으로 잘 드러낸 작품입니다.
어둠은 무질서한 혼돈이 아니라 생명을 잉태한 카오스입니다. 그 길고 깊은 밤은 성스러운 태초의 밤이기도 합니다. 생명의 원형, 존재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생명들은 물질문명 상황에서 도구와 수단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인간 문명의 생태계 파괴는 이렇게 고귀한 생명의 원형을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허민 시인은 이러한 시대 흐름에 대한 거시적인 안목과 미시적인 관점을 동원하여 시대고(時代苦)를 관통하는 혜안(慧眼)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사유적 통찰력이라 할까요? 그리하여 시인은 문제를 파악하고 근원적인 존재론적 관점으로 대안을 제시합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개인사적인 감정표출 차원을 넘어선 우리 시대의 시대고에 따른 우리 사회에 만연한 생명의 ‘작고 평범한 존재’에 대한 생명 경시(輕視)라는 병리(病理)적 현상을 환유(換喩)적 시어를 통하여 고발한 것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한 편의 시가 개인적 감성의 카타르시스를 넘어선 우리 사회를 위하여 던져진 당위적인 문제 제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우수상으로 이은영 시인의 <탄소발자국>은 지구생태계의 위험한 한계치에 도달한 자연 생태계의 은밀히 진행되는 파괴 현상을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는 대안을 제시한 문제해결의 관점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린슈머(친환경, 유기농 제품을 이용하고 환경보호를 추구하는 사람)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당선권에 들지 못했던 안타까운 시작품도 여러 편 있었음을 밝힙니다. 제11회 평택 생태시 공모전 대상을 수상하신 허민 시인과 우수상의 이은영 시인께 축하를 드리며 생태시에 대한 관심과 뜨거운 열정으로 작품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대상으로 당선된 「신문지의 노래」를 포함해 우수상의 「탄소발자국」은 인간에 의한 자연환경 파괴, 인간에 의한 사회 환경 유린, 인간에 의한 인간 존엄성 상실 상황에서 제생태계 질서 회복을 제시한 탁월한 작품들이었다고 평가하며 제11회 『평택생태시 문학상』 심사평을 가름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심사위원: 김복순, 김영자, 배두순, 진춘석, 성백원, 우대식.
평택〔생태시 문학상〕대상 당선 소감
허민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 진정한 삶은 무엇일까. 지금보다 더 젊었을 적엔 그 고민의 답을 나로부터 찾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성공하는 것, 돈을 버는 것,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러다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한 발 나아갔습니다. 한두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빗방울 하나가 조금씩 번져가듯 우리의 원(圓)은 점점 더 넓어져 갔습니다. 일, 사랑, 여가를 넘어 연대가 필요했습니다. 가치관을 함께 하는 사람과의 관계 맺기뿐 아니라, 주변을 감싸고 있는 많은 존재들까지 고민은 이어졌습니다. ‘생태’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므로.
작년부터 ‘생태’를 모티프로 한두 편의 시를 써보았습니다. 어떤 주제나 소재를 정해두고 시를 쓰는 편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난감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생태’라는 울타리를 두고 창작의 동기를 이어나가니, 우리가 살아가는 주변 환경과 관계에 아무래도 더 관심을 갖게 되더군요. 유리벽에 부딪혀 죽은 작은 새 한 마리가 보이고, 버려진 신문지 조각이 보이고, 가혹하게 베어진 헐벗은 가로수들의 환상통이 보였습니다. 결국은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진정을 살게 되고, 그것이 삶을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드는 걸까요. 그 누군가가 단 한 사람을 넘어서 이웃과 세상, 자연과 생태, 훗날의 미래로까지 번져간다면 참 좋겠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꿀벌을 키우고, 농작물을 심고 기르며, 버려진 폐기물로 예술 작품을 만들면서 생태교육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선생님들이 제 주변에 계십니다. 그런 분들이 계신데 제가 '생태'란 타이틀로 이런 상을 받아도 되는 것인지, 적잖이죄송하고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상처를 공감한다는 건 그 아픔을 오랫동안 생각해 본다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결국 어떤 존재들의 아픔으로 먹고 입고 잠자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감사하고 아끼고 겸손하게 살아야겠습니다. 부족한 문장에 상을 주신 것도 어쩌면 그런 책임감을 주신 것이겠지요.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