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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공(文純公) 후조당(後彫堂) 연시(延諡) 연관 시비(是非)
본래 시호(諡號)는 정이품(正二品) 이상의 관직을 지낸 사람의 생시(生時)의 학문이나 사행(事行)의 공과(功過)를 헤아려 사후(死後)에 국가가 내리는 것이 법이었다. 나라의 법전(法典)에서는 비록 정이품을 아니 지낸 유현(儒賢)이라도 학문 조예(造詣)와 지절(志節)이 탁이(卓異)하였던 선비에게는 내릴 수 있는 바였지만, 실상 초야(草野)에 은둔(隱遁)하여 살았던 학자가 그 시호를 받는 일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을 따듯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무릇 선조(先祖)에게 국가로부터 시명(諡名)이 내리는 바 은전(恩典)을 역명(易名)이라고까지 일컬으며, 한 집안이나 문중은 물론 그 지역 사회까지 대단한 영예로 여겨 사시(賜諡)가 이루어지면 후속하는 많은 의례(儀禮)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 행사 중의 하나가 분황(焚黃)이었다. 나라가 사후인 어느 개인에게 시호를 내릴 때에는 함께 정경(正卿)의 증직(贈職)이 이루어지므로 그 추증(追贈)의 교지(敎旨)와 함께 황색(黃色)의 종이로 된 부본(副本)을 내리게 되는데, 그 자손이 추증된 이의 무덤 앞에 제수(祭需)를 마련해 나아가 제사를 올려 황색 종이의 부본을 불태우는 의례(儀禮)를 분황이라 일컬었다. 그밖에도 시호를 받들고 나온 선시관(宣諡官)을 그 본가에서 시호를 받는 이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나와 의식을 행하고 배명(拜命)하는 연시(延諡)의 행례(行禮)가 또한 있었다.
본래 시호는 나라가 결정하여 그 본가에 연시 행례 여부를 물어 받겠다 하면 선시관을 보내 선시를 하게 되는데 혹시 가세(家勢)가 곤궁하여 연시할 경비를 담당할 수 없는 경우에 부득이 거절하게 되며 그리할 경우 신주(神主)에다 그 시호를 첨서(添書)할 수 없는 것이 법도였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는 근신(近臣)이 왕에게 ‘아무가 가난하여 연시하는 데 곤란이 있을 것’이라 아뢰면 어명(御命)으로 전곡(錢穀)을 내린다든지 수령(守令)으로 제수(除授)케 하여 그 관아(官衙)에서 연시토록 하는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연시를 본가가 응하여 죽은 이의 신주를 받들고 나아가 선시(宣諡)하러 나온 선시관을 맞아 의식을 행한 다음 사자(使者)에게는 예폐(禮幣)를, 그 수종자(隨從者)에게는 행하(行下)를 베푸는 잔치를 가리켜 연시연(延諡宴)이라 하였다.
문순공 후조당의 경우 그 분황과 연시가 예답게 이루어졌으므로 각각 고유문이 지금껏 기록으로 넘아 전하는데, 사시(賜諡)의 은전이 그야말로 개인의 집안, 종중, 지역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대사(大事)였으며, 아울러 그 글을 통하여 초야의 선비였던 후조당의 학문 조예나 지절(志節)이 태산처럼 우뚝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처럼 시호가 내리면 당연히 사우(祠宇)에 두는 신주(神主)에 대한 개제(改題)가 따르기 마련인지라 후조당의 경우도 서거 후 200여 년 낙천사(洛川社)에 모셔 징사(徵士)로 기록된 위판(位版)에 시호 기타 추증된 관직 등을 첨서(添書)하는 행례가 있었음으로 그 고유문이 지금껏 전하는데, 그 글 속에서도 후조당의 대단한 인품과 사행을 남김없이 감득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후조당을 위한 연시(延諡)를 두고 사단(事端)이 생기게 되었다. 곧 1825년(純祖 25, 乙酉)에 나라가 후조당(後彫堂)의 시호(諡號)를 퇴계(退溪) 선생과 같은 문순(文純)으로 내린 데 대하여 곧 사문동시(師門同諡)임을 앙앙불락(佒怏不樂)하여 이씨(李氏) 일족 중 일부가 불만을 표하며 변고(變故)를 일으킨 것이다. 그들이 진성이씨 중 일부인 것은 연시(延諡)를 위한 분황고유문(焚黃告由文)을 지은 분이 진성이씨 광뢰(廣瀨) 휘(諱) 야순(野淳) 공임에서 보듯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씨들이 후조당 명시(命諡)와 관련하여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가 사제(師弟) 동시(同諡)임에 마음이 편치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여론(輿論)은 부자(父子)나 사제지간(師弟之間)에 시호(諡號)가 같았던 예가 없지 아니하였던 왕적(往蹟)을 가고(可考)할 수 있는 터였고, 문순(文純)의 아래 다시 문순(文純)이 남으로써 그 문순(文純)이 더욱 영예로울 수 있다는 논의 등이 잇달아 거기에만 집착할 수 없는 처지였다.
후조당의 시장(諡狀)을 지은 이가 당시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중심에 서 있던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이었으므로 감히 집적거릴 터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차선(次善)으로 택하여 공격(攻擊)할 바가 시장(諡狀) 작성의 토대(土臺)가 될 자료로 자손들이 지어 올린 가장(家狀)이었다. 이씨들은 그 가장을 분석하여 여러 처(處)를 지적하면서 두찬(杜撰)이요 무당(無當)하며 소거(所據)가 부족하다는 등으로 비판을 하였다. 이후 여러 달 동안 갖가지 언설로 파시(破諡)에 이르기를 획책하였으나 결국은 성공하지 못하여 미구에 잠잠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씨 일족은 연시(延諡)에 앞서 후세에 ‘延諡時李氏門中與烏川單子’로 이름붙인 문서에서 우선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이제 계고(啓告)의 일에 이르러, 급하게 봉행하는 지경을 기약하기만 하는데, 이는 물론(勿論) 진실로 단지 사문(師門)이 동시(同諡)인 경우가 오향(吾鄕) 가까운 지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 여러 사람이 편안치 못해 하는 일일 뿐 아니라, 본손(本孫)으로 일을 주관(主管)하는 사람이 형편을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같은 글자의 시호(諡號)를 취하고자 서둘러 행하기를 힘쓰는가 보인다. 깊이 생각하여 일을 처결해야 하는 도리를 고려하면, 이미 이 일은 어그러지고 허물어진 것이며. 사문(師門)의 분수(分數)에서도 침탈(侵奪)하고 능가(凌駕)하고자 하는 혐의(嫌疑)를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는 곧 장차 서하인(西夏人)이 공자(孔子)의 논의(論議)를 의심하는 짓을 다시금 저지르는 일이라 하리라(今及啓告,至有亟期奉行之境,他固無論,只以與師門同諡,刱始於吾鄕切近之地,是爲大家未安之節,而本孫之主事者,不顧事體,期於圖取同諡者,而汲汲焉擧行之,是務其在爲體念之道,已有乖戾而於師門分上未免有侵,及凌駕之嫌,則將見西夏人疑夫子之論,復行於今日矣)”
또 소위 이씨 변파록(卞破錄)의 글로 ‘연시후이씨여오천서(延諡後李氏與烏川書)’에서는 “우리들이 부득이 한두 가지 신변(申卞)할 것이 있는데, 후조공(後彫公)이 사관(祠官)으로 제수(除授)받을 적에 퇴계선생이 편지로 출사하기를 권면(勸勉)하여 지은 시(詩)로 이른바 산운시(山雲詩)의 우풍(寓諷)을 들었는데 그것이 정말 노선생과 화답한 시라는 증거가 있는가, 후조당이 퇴계 선생께 급문(笈門)하기 전 일찍이 붕우(朋友)였다고 하였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가? 노선생이 15세 연장(年長)이면 고례(古禮)로도 견수(肩隨)를 넘고, 향의(鄕誼)로도 마땅히 존경의 대상이 아닌가? 등등 허다히 물을 것 가운데 의리(義理)와 가장 관련 깊은 것과 문적(文籍)의 가장 의심나는 것만 골라 물으니 대답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오천(烏川) 제인은 1826년(純祖 26, 丙戌) 12월 근시재가 후조당의 후사(後嗣)임을 다시 확인받고자 예조(禮曹)에 소지(所志)를 올리는 가운데, 또한 당시 이씨의 거조(擧措)를 다음과 같이 거론하였다.
저희들 팔대조(八代祖)4) 문순공(文純公) 휘(諱) 부필(富弼)께 시호의 은전(恩典)이 이미 내렸으므로 길일(吉日)을 택하여 공경히 받들고자 하는 즈음에 이씨들이 저희들과는 무관(無關)한 묵은 유감(遺憾)을 드러내어 지극히 참람(僭濫)하고 간교(奸巧)한 심산(心算)으로 그릇된 언설(言說)을 퍼뜨리면서 나라가 내린 시명(諡命)을 힘써 다음처럼 비난하였습니다.
가로되 스승과 제자가 같은 시호를 받는 일은 불가(不可)하다 하고, 시장(諡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였으며, 개우풍(盖寓諷)이라 한 세 글자는 사실을 굽혀 협박하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라 하고, 붕우(朋友)로 사귀다가 이윽고 또 장유(長幼)로 지내다가라 한 데 대하여는 은연 중 서로를 견주려 한 것이라 하고, 선생이 강론(講論)할 적에 이따금 자신의 의견을 강력히 주장했다는 말은 스승의 훈도(訓導)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 하였고, 위세(威勢)를 돋보이고자 세 글자를 모방하여 넣었다 하고, 퇴계 선생의 시(詩)가 후조당의 절조(節操)에 대하여 읊은 것이 아니라 하였고, 율곡의 편지에 대한 이야기는 지나친 과장(誇張)이라 하였고, 산운(山雲)의 시(詩)는 후조당의 지음이 아니라 습계집(拾溪集)에 실린 것이라 하는 등등이었습니다.(曰師弟之不可同諡也,曰太常之狀,未克稱情也,盖寓諷三字,顯有誣逼之意也,曰朋友之少長之說,隱然計較也,曰講論時侃侃守己,見爲不有師訓也,曰爲勢所長,至以三文字擬入也,曰退溪詩之非謂先生節也,曰栗谷書之壯撰也,曰山雲詩也戴於拾溪集也).
이른바 세상 사람들이 문순시비(文純是非)라 한 바가 있은 후 38년 만에 이씨들이 제기(提起)한 소위 변파록(卞破錄)에 맞서서 다시 정리한 “후조선생연시후변무록(後彫先生延諡後卞誣錄”에서도 그 때 이씨들이 한 일을 가리켜 다음처럼 말하였다. “시명(諡命)이 처음 내림에 풍랑(風浪)이 대작(大作)하듯, 나라가 명(命)한 바를 준행(遵行)할 수 없을 것이라 하고, 왜 선조(先朝)에 청시(請諡)하지 아니하고 꼭 당저(當宁)에 하였는가, 혹은 성(姓)은 잘라버리고 후조당의 휘(諱)를 직호(直號)하면서 유소(儒疏)와 당소(堂疏) 중에 기록한 실적(實蹟)까지도 뒤엎어 절절(節節)이 두찬(杜撰)이라 일컬고, 도내(道內)에 비문(蜚文)을 돌리고, 태학(太學)에 투통(投通)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치장(治章) 상경(上京)하여 승정원(承政院)에다 의항(擬抗)하며 임금을 속이고, 관련 소장(疏狀)을 도산서원(陶山書院) 광명실(光明室)에 보관하여 백견지계(百年之計)를 삼는다는 등 운운(云云)이라 하였다.
이씨의 위와 같은 언설에 대하여 오천(烏川)의 제인(諸人)들은 조목조목 세세히 변무(卞誣)를 거듭하면서 여러 곳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대응하기도 했다.
우리 후조공(後彫公) 학문 절의(節義)의 실제는 이미 변록(卞錄) 가운데 적은 것처럼 대현(大賢)의 문하 고제제자(高第弟子)이로다. 그 청풍(淸風) 탁절(卓節)이 백세(百世)를 흘러도 가릴 수 없음이라 곧 그 실리(實理)가 자현(自顯)하며, 공의(公議)가 끊어지지 아니하므로, 그것이 당초 저희들이 궁문(宮門)에서 부르짖어 일혜(壹惠)를 입기 바랐던 것이오이다. 하물며 그 발론(發論)을 시작한 사람이 이씨였습니다. 유소(儒疏)의 소두(疏頭)가 이씨요, 당소(堂疏)를 홀로 올린 사람이 이씨입니다. 이는 곧 타고난 천성을 지킴(秉彝)에서도 쉽지 아니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我後彫公學問節義之實,已載於卞錄中,而大賢門下高第弟子也,淸風卓節,百世不可掩者,則實理自顯,公議不泯,此當初吾黨所以齊籲九閽,冀蒙壹惠者也,而且况發論而始者李氏也,儒疏而疏頭者李氏也,堂疏而獨上者李氏也,此秉彛之不容易者也).
예안파 종택 소유이다가 국학연구원(國學硏究員)이 영구 수장(收藏)하게 되는 고문서들 가운데, 후조당의 시명(諡命) 연관 문서가 많은데, 1826년 소위 연시(延諡) 이후 이루어진 문건(文件)은 보는 바 그대로 대부분이 이씨와 오천(烏川) 일가들 사이에서 점철(點綴)된 시비(是非)와 연관되는 글이었다. 다음 문서 중 중요한 몇 가지는 다른 글을 통하여 재론하게 될 것이다.
連番 |
時期 |
文書名 |
出典 |
1 |
1812,壬申,11 |
近始齋請爵諡請願所志 |
烏川古文書 |
2 |
1813,癸酉,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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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
1813,癸酉,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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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1816,丙子 |
後彫堂金先生請諡䟽經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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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1816,丙子,1 |
請爵諡疏-儒疏 |
烏川世稿,後彫堂集 |
6 |
1817,丁丑,9以前 |
禮曹回啓 記錄 |
〃 |
7 |
1817,丁丑,9 |
吏曹回啓 記錄 |
〃 |
8 |
1822,壬午, |
申請爵諡疏-堂疏 |
〃 |
9 |
〃 |
領議政 金載瓚 獻議 |
〃 |
10 |
〃 |
領議政 獻議 國朝寶鑑 記錄 |
〃 |
11 |
1822,壬午,閏3 |
領議政 金載瓚 次對記錄 |
朝鮮王朝實錄 |
12 |
1824,甲申,10 |
文純諡望 下批期錄 |
〃 |
13 |
1825,以前 |
後彫堂 家狀 |
烏川世稿,後彫堂集 |
14 |
1825, |
後彫堂 諡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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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1826,丙戌,7以前 |
焚黃告由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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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 |
延諡告由文 |
〃 |
17 |
1826,丙戌,7 |
烏川答李氏單子 |
先祖延諡後辨誣錄 |
18 |
1826,丙戌,8 |
烏川牌旨 |
〃 |
19 |
1826,丙戌,9 |
烏川與鄕員單子 |
〃 |
20 |
1826,丙戌,10 |
鄕員答烏川單子 |
〃 |
21 |
1826,丙戌,10 |
烏川呈陶山單子 |
〃 |
22 |
1826,丙戌,11 |
烏川答鄕員單子 |
〃 |
23 |
1826,丙戌,11後 |
鄕員與鄕中單子 |
〃 |
24 |
〃 |
李氏通洛川文 |
〃 |
25 |
〃 |
烏川呈陶山單子 |
〃 |
26 |
1826,丙戌,12 |
洛川呈英陽兼官初狀 |
〃(烏川古文書再錄) |
27 |
1826,丙戌,12 |
再呈兼官狀 |
〃 |
28 |
1826,丙戌,12 |
三呈兼官狀 |
〃 |
29 |
1826,丙戌,12 |
禮曹에 올린 所志 |
烏川古文書 |
30 |
1827,丁亥, |
禮安縣에 올린 소지 |
〃 |
31 |
1827,丁亥 |
禮安縣丁亥年立志 |
禮安宗中古文書 |
32 |
1830,庚寅,8 |
後彫堂金先生宗系卞誣明證 |
烏川古文書 |
33 |
1862,壬戌,3 |
洛川景賢社位版改題時告由文 |
〃 |
34 |
1862,壬戌,夏 |
延諡時李氏門中與烏川單子 1826,丙戌,7以前 |
先祖延諡後卞破錄 |
35 |
〃 |
延諡後李氏與烏川書 1826,丙戌,7以後 |
〃 |
36 |
〃 |
陶山書院通道內文初本 1826,丙戌,7以後 |
〃 |
37 |
〃 |
烏川卞明單子 1826,丙戌,7以後 |
〃 |
38 |
〃 |
烏川通道內文 1826,丙戌,7以後 |
〃 |
39 |
〃 |
溪上答單 1826,丙戌,7以後 |
〃 |
40 |
〃 |
烏川再答單子 1826,丙戌,7以後 |
〃 |
41 |
1862,壬戌,夏後 |
卞正錄叙說 |
後彫堂先生延諡後卞誣錄後篇 |
42 |
1862,壬戌,3 |
卞正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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