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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강해 (2)
믿는 자의 본이 된 바울의 리더십
살전 2:1~16
I. 서론
“내게 필요한 것은 탈 것이 아니라 탄약이다.” 이 말은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Volodymyr Zelensky)가 한 말입니다. 미국이 러시아의 침공을 예상하고,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대피를 조언했을 때, 젤렌스키 대통령이 한 말이라고 합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한 이 말과 그에 따른 행동 때문에, 전세계의 우크라이나인이 하나로 뭉치게 되었고, 온 서방 나라들이 우크라이나를 돕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가 미국으로 도피를 갔다면, 우크라이나는 이미 러시아에 넘어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한 나라의 리더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한국 시각으로 이번 주 수요일 3월 9일이면, 대한민국 제 20대 대통령 선거가 열리게 됩니다. 이번 선거를 통하여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대한민국을 잘 이끌 수 있는 대통령이 선출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도 리더십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을 듣고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로 바울의 리더십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 발휘했던 리더십을 다루고, 다음 주일에는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발휘했던 리더십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경적 리더십으로 우리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II. 본론
1~2절,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바울은 먼저 데살로니가에서의 사역이 헛되지 않았다는 말합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그곳에 들어가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영혼이 구원받았고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중요한 말을 합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바울이 빌립보에서 당한 고난과 능욕은 사도행전 16장에 나와 있습니다. 행 16:22~24,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바울은 왜 이 말을 했을까요? 그리고, 바울은 왜 “이것은 너희가 아는 바”라고 이야기했을까요? 데살로니가 전서를 읽다 보면, “너희가 아는 바”라는 말이 계속 등장합니다. 1절, “너희가 친히 아나니” 2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5절, “너희도 알거니와” 9절,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10절,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절,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이 “우리의 사역을 너희가 잘 알고 있다”고 말한 이유는 바울을 비방했던 유대인들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봤듯이, 바울은 유대인들의 박해 때문에 불과 3주만에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는 바울을 박해했고,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났을 때에는 바울을 비방했습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존 스토트 목사님의 설명으로 들어 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의 짧았던 선교 활동은 굴욕적인 결말을 가져왔다. 대중의 폭동과 선교사들이 법정에 고소당하는 등 상황이 너무 심각해져서 그들은 굴욕스럽게도 그 도시로부터 야반도주를 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은 그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십분 이용했다. 그들은 이렇게 비웃었다. ‘그는 도망간 뒤부터 한 번도 나타나거나 소식을 전한 적이 없다. 분명 그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동기를 가지고 일한 불성실한 인간이다. 그는 에그나티아 길을 오르내리는 저 많은 엉터리 교사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는 단지 성, 돈, 명성, 권력 등 자기 직업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반대가 일어나고 위험에 부딪히게 되니까 줄행랑을 쳐버린 것이다! 그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자기 제자들인 당신들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는 당신들을 버렸다! 그는 당신들의 복지보다는 자기 목숨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 여기서 “에그나티아 길”은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서 그리스 북쪽 알바니아로 연결된 길인데, 이 길이 해상로로 로마로 연결되었던 길입니다. 바울을 대적하던 유대인들이 이러한 소문을 낸 이유는 바울의 인격을 모독함으로 그가 전한 메시지도 힘을 잃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당시에 돈을 벌기 위해서 순회하는 거짓 교사나 철학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은 진리를 전한다는 순수한 동기가 아니라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서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그런 사람들과 같은 부류라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 가운데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쓰면서, 우리가 어떻게 사역했는지를 “너희가 친히 알고 있다”고 반복해서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어떻게 사역했을까요?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 가지 비유를 들어 이것을 설명합니다. 청지기, 유모, 그리고 아버지입니다. 청지기 비유는 조금 길게 설명을 드리고, 유모와 아버지 비유는 짧게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청지기 비유입니다.
3~4절,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본문 3~4절의 말씀을 일평생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교회 직분자들은 이 말씀을 남은 인생의 모토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이 두 절의 말씀만 확실히 기억하시고 가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먼저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이나 속임수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권면은 좁은 의미로는 바울의 복음 전도를 말하고, 넓은 의미로는 바울의 모든 사역을 의미합니다.
1) 먼저, 바울은 간사함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간사함이란, 헬라어로 “미혹”을 의미합니다. (planes) 같은 단어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절에 사용되었습니다. 살후 2:11,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미혹이란 사실이 아닌 거짓을 사실인 것처럼 믿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미혹으로 (간사함으로) 하지 않았다는 말은 복음이 거짓인데, 그것이 진리인 것으로 전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전한 복음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여러 번 살펴본 말씀입니다. 고전 15:1~4,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한 마디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리라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바울은 부정에서 난 것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영어로, 부정은 Impurity입니다. (헬라어: akatharsias) 그러니까, 바울은 순수하지 못한 부정한 동기 (Motive)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비방했던 유대인들이 말한 것처럼, 돈을 벌기 위해서나 자신의 명예나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러 다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 그리고 바울은 속임수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영어로, 속임수는 Trickery입니다. (헬라어: dolo) 그러니까, 바울은 올바르지 않은 방법 (method)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이 말을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든 영혼만 구원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정직하지 않은 방법을 동원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가끔 설교자 중에 복음을 믿도록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실제로 있지 않은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꾸며서 설교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 이런 방법을 사용할까요? 그것은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사역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속임수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믿었고, 성령의 사역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고전 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진리로 믿고 전했습니다. 복음을 순수한 동기로 전했습니다. 복음을 정직한 방법으로 전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한 이유는 이와 같이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4절,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진리임을 믿을 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깨끗한 동기로 복음을 전할 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직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때,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선교사나 목회자만 가져야 할 마음 자세가 아니라 모든 사역자가 가져야 할 마음 자세입니다. 우리는 4절에서 두 가지를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역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바울에게 복음을 위탁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에게 사역을 위탁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교회 건물만 보더라도 목적이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앉아 계신 의자, 어둠을 밝혀 주는 전등, 소리를 키워주는 마이크, 햇볕과 비를 막아주는 지붕 등등. 하물며 이 모든 것보다 정교한 우리가 목적이 없이 이 땅에 태어났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복음을 위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무엇을 위탁하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위탁하셨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헛된 인생을 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선교 (Mission)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 드린 것은 보내시는 분의 목적이라는 말씀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선교란 “보내다”라는 뜻이고, “보내다”는 의미 안에는 “보내는 분”과 “보내는 분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봉사해도 보내는 자의 목적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선교가 아닌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온 이유도 궁극적으로 선교를 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내시는 분의 목적에 순종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행 16:6~10,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만약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하고 자신의 계획을 끝까지 고집해서 마게도냐로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열심이지 선교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교란 보내신 분의 목적에 맞도록 사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복음을 위탁하셨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보내신 분의 목적에 끝까지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무엇을 위탁하셨습니까? 이것을 찾아야지만, 보내신 분의 목적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 때부터 비로소 선교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사역했습니다. 결과가 아무리 좋게 나타나더라도, 우리의 사역이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면, 그 사역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결과가 아무리 허무하게 끝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그 사역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사역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본 바울의 사역이 그랬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아무리 크게 성장시켰다고 하더라도, 바울이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사역했다면, 깨끗하지 못한 방법으로 사역했다면, 그 사역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못한 사역이고,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사역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3주만에 끝난 사역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역을 했다면, 그 사역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이제 유모 비유와 아버지 비유를 간단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2. 둘째, 유모 비유입니다.
5~8절,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이 비유에서도 사도 바울이 하지 않은 것을 먼저 말합니다. 바울은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너희도 알고 있고 하나님께서도 증언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아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Warren Wiersbe, “A flatterer can use either truth or lies to achieve his unholy purpose, which is to control your decisions for his own profit.” 그러니까, 바울이 사역할 때,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지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7절에서도 이어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한 것은 권위를 주장하는 대신에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같이 유순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순한 자가 되었다는 것은 자녀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들의 필요를 공급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 주었고,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각오하면서 복음을 전하러 다녔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로서 권위를 주장하면서 마땅히 받을 수 있는 사례비도 받지 않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9절,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입니다. 바울이 밤낮으로 일하면서 사역했던 이유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고후 8:1~2,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그들은 극심한 가난 속에 있었기 때문에 사례비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사역을 할 때, 선교비를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빌 4: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 그러니까 3주 정도 사역할 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두 번이나 선교헌금을 보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에서는 사례비를 받을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에서 누가 선교비를 보냈을까요? 아마도 루디아였을 것입니다. 행 16:14~15,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바울은 빌립보에서 사역할 때, 루디아 집에 유하면서 선교 활동을 했고,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사역할 때도, 루디아가 보낸 선교비를 받고 선교 활동을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사역자가 물질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사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역하실 때, 물질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예가 누가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눅 8:1~3,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중요한 것은 사역자가 사역할 때, 폐를 끼치는 사역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 때문에 복음 전파가 방해를 받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가졌던 유모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거룩한 사역 (구별된 사역)이라고 말합니다. 10절,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그러니까, 바울을 비방했던 유대인들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각인시켜 준 것입니다.
3. 셋째, 아버지 비유입니다.
11~12절,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 사역을 한 이유는 자녀들이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데살로니가 바로 옆동네 빌립보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개척 시기도 비슷했고, 박해 속에 있던 그들의 상황이 비슷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빌 1:27~28,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같은 개념입니다. 네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한 마음으로 서는 것, 둘째, 한 뜻으로 협력하는 것, 셋째, 복음의 신앙을 위해 하는 것, 넷째, 대적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
1) “한 마음으로 선다”는 것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다는 것을 힘써 지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헬라어로 “프뉴마 (pneuma)”로 “성령”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한 “마음과 뜻”이라고 말하지 않고, “한 마음과 한 뜻”이라고 구분해서 말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한 성령 안에서 한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한 뜻으로 협력한다”는 것은 같은 마음을 가지고 협력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협력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사역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의 경우, “각 가정에서 한 주씩 간식을 준비해 오자” 이렇게 결정을 했으면, “협력한다”는 것은 우리 가정도 한 주를 맡아서 간식을 담당하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3)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복음을 믿도록 하는 사역에 나도 동참하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4) “대적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적자들 때문에 도망가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의미는 “놀란 말들이 통제할 수 없이 우르르 내달아 도망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 한 뜻으로 협력하는 것, 복음의 전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하나된 교회는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하나된 교회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이것이 바로 (12절) 너희를 부르사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유모의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고, 아버지의 심정으로 양육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1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13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사역했던 결과입니다. 만약 바울이 진리를 전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부정한 동기나 방법으로 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바울이 유모의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 아버지의 심정으로 양육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3주 밖에 되지 않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는 열매는 맺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책을 읽다가 눈물이 핑 돈 책은 몇 권 되지 않습니다. 그 중에 한 권이 앤디 스탠리 (Andy Stanley) 목사님의 책, “Deep & Wide”입니다. 이 책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차관리에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사람의 마음을 닫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무리 진리를 외쳐도 다른 이유 때문에 마음 문이 닫힌다면, 열매를 맺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설교만이 아니라 삶이 설교가 되어야 되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말과 행동도 일치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이 13절에서 끝났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14~16절,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우리가 지난 주일에도 읽은 말씀입니다. 두 가지만 말씀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1) 바울은 13절과 대조되는 말씀으로 본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전한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그 말씀을 대적한 유대인들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죽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바울과 그 일행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믿는 사람들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말하는 비방의 말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2) 유대인들은 그렇게 행동함으로 자기 죄를 항상 채우며 살고 있고,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박해를 받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큰 위로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박해를 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승승장구할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은 자신의 죄를 항상 채우고 있는 것이고, 때가 이르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심판이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그 심판이 예수님의 재림 때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어째든 이 말씀은 박해를 받던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큰 위로의 말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지금 침략을 당해 고통가운데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을 위탁 받아 그것을 끝까지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사역을 감당할 때, 부정한 동기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역을 유모의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면서 감당했고, 아버지의 심정으로 권면하면서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본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기 복종하셨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할 때, 부정한 동기나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유모의 사랑으로 끝까지 자신을 희생하면서 감당하셨고, 아버지의 심정으로 제자들을 권면하시면서 감당하셨습니다. 자신들을 부르신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도록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예수님과 바울의 삶을 그대로 본받아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본이 되었습니다. 살전 1:6~7,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고, 그 사역을 순수한 동기와 정직한 방법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이웃을 유모의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희생하면서 감당해야 하고, 아버지의 심정으로 권면하면서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