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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문제작)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풍경을 보다
이경철
최첨단 시를 향한 원로들의 믿음직한 행보
또 한 해가 가고 왔다. “매양 다사다난한 해이고 올해는 특히 더 그럴 것”이란 상투(常套)로 오고 가는 해지만 올 한 해만큼은 이 관용구가 딱 들어맞을 것 같다. 새해 초장부터 정치판이 요동치고 있다. 나라가 어디로 떠내려갈지 종잡을 수 없다. 혼돈의 와중일수록 민족시인 시조가 정형의 법과 항심(恒心)의 준엄함을 잡아주었으면 한다.
하늘색 빨래 줄에 하늘색 옷 펄럭이던
실비 젖은 하늘색 비닐 물방울이 어여쁘다
우리네 삶의 색깔이 노릇노릇 익었다
하늘색 꼬인 줄에 꼬인 무늬 꼬인 하늘
서민의 마음 색에 매달린 생계의 무게
그래도 끼니 안 거르는 그 빛깔이 아름답다
―이상범 〈하늘색 빨래 줄―하늘색 비닐 빨래 줄 이슬〉 전문(《열린시학》 2011 겨울)
이상범 시인이 새해 캘린더를 보내줬다. 한 장 한 장 달마다에 자신의 디카시(詩) 작품이 실린 달력이다. 디카시란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컴퓨터로 포토샵 해서 완성한 이미지에 걸맞은 시를 붙인 작품을 말한다. 사진작가의 순간적인 감식안의 렌즈에 잡힌 대상을 다시 포토샵이라는 화가적, 조각가적 심미안으로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시를 붙인 디카시는 시와 영상이 융합된 작품.
해서 다른 유명 화가의 그림이나 사진작가의 사진과 만난 시화(詩畵)나 영상시와는 그 차원이 다른, 시서화(詩書畵)가 어우러진 디지털 시대 최첨단 문인화(文人畵)라고나 할까. 예전부터 부채 등에 직접 그림도 그리고 시도 짓고 써서 전시회까지 열곤 하던 이 시인이 이 디지털 문명시대의 새로운 문인화를 선보이며 벌써 두 권의 디카시집을 펴냈다.
범람하는 디지털 이미지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이제 달리는 차 안에서도 스마트폰 이미지가 바쁜 우리 시간까지 지배하고 있다. 활자 매체의 대명사인 신문마저도 큐알코드(QR code)를 넣어 이미지 자체가 돼가고 있다. 일 분 일 초 안에 수용자의 마음을 움직여 돈이 되게 해야 한다. 즉물적이고 순간적이고 환상적으로 빨려들게 해야 하기에 성찰의 여지를 줄 틈이 없다. 해서 이렇게 가볍고 일회적인 디지털 이미지가 쓰레기 문화(Trash Culture)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렇게 이미지가 욕구를 불러일으키며 상품화되고 실재보다도 더 실재가 되어 지배하는 시대, 이미지는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대상과 시인과 독자를 한마음으로 소통케 하는 표상(表象)의 총화로서 시의 이미지를. 서구의 합리적 이성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콤플렉스에서 이미지를 해방시킨 바슐라르가 말한 “순간화된 형이상학으로서의 포에지”가 곧 시의 이미지일 것이다.
우주적 비전과 하나의 혼의 비밀, 그리고 여러 대상의 비밀이 내밀하게 동시에 익어 터지는 순간, 시의 이미지는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 우리도 좋은 풍경이나 영상물에 동하면 “아 시적이다!”하고 감탄하며 홀연, 순간의 포에지를 떠올리지 않던가. 그런 이미지들을 어찌 형이하학적인 쓰레기문화로 도매금으로 치부해버려 이 이미지 시대를 정말 쓰레기처럼 흘려버리고 말 것인가.
이상범 시인의 디지털 이미지와 시 작품에서는 그런 포에지가 아주 자연스레 떠오른다. 동그랗게 위태롭게 점, 점, 점 매달린 이슬 혹은 물방울 이미지에서 너와 나와 전 우주의 비전이 뚝뚝 듣는 것을 본다. 시에서 이미지가 나왔는지, 이미지에서 시가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시와 이미지가 교접하며 포에지를 낳고 있다.
위 작품 〈하늘색 빨래 줄……〉에서 눈길은 일단 선명한 디지털 이미지에 간다. 가닥가닥 꼬인 하늘색 빨랫줄 위에 얹힌 작은 방울들이 도르르 흘러 모여 금시라도 떨어질 듯한 큰 물방울들. 그 위태로운 물방울 안에 둥그렇게 담긴 또 다른 해맑은 이미지가 아스라이 눈에 들어온다.
두 수로 이뤄진 시에서 앞 수에서는 “하늘색”이 세 번 반복되며 색깔의 이미지가 시를 이끈다. 실비에 젖어 하늘은 먹먹하고 우울할 텐데도 빨랫줄은 하늘색이다. 이 하늘색 빨랫줄이 펄럭이던 하늘색 옷의 회상을 부른다. 회상 속 하늘색이기에 “펄럭이던”의 시제는 과거이다. 과거 하늘색이 오늘의 하늘색 비닐 물방울과 겹쳐지기에 종장에서는 “우리네 삶의 색깔이 노릇노릇 익었다”고 했을 것.
뒤 수에서는 초장부터 “꼬인”이 세 번 반복되며 꼬인 형태의 이미지가 시를 이끈다. 하늘도 꼬이고 빨랫줄도 꼬이고 물방울도 꼬였다. 중장에서는 그 꼬인 세상의 이미지에서 “서민의 마음 색”을 보고 또 꼬여 위태롭게 매달린 물방울에서 “생계의 무게”를 읽고 있다. 종장에 이르러서는 비비 꼬인 서민의 마음 색, “그 빛깔이 아름답다”하고 있다. 왜? 끼니를 안 거르는 하늘색 빛깔이요 생계의 무게에 매달린 서민의 마음색이니까.
이처럼 시를 읽고 다시 디지털 이미지를 보시라. 실비에 젖은 하늘이기에 빨랫줄 위의 작은 물방울들은 거르지 않고 생겨나 큰 물방울로 듣지 않겠는가. 아래서 입 벌리면 금방이라도 한 모금 하늘의 양식이 될 저 물 방울방울로. 빨랫줄에 매달린 물방울에서 시인은 우리네 하늘처럼 청청한 마음자리 본디와 아등바등한 생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사물들 속에서 그런 이미지를 순간적으로 예감해 셔터를 누르고 다시 그 이미지를 속 깊은 포토샵을 통해 포에지로 승화시키는 과정이 한 편의 시 창작 과정과 뭐 다를 게 있겠는가. 새해에도 이런 인상적이며 의미 있는 디카시로 디지털 이미지 시대 포에지로서의 이미지의 깊이와 품위를 다잡아 나가시길 바란다. 나아가 사이버 신유목시대 정처 없이 부랑하는 인간의 정처와 위의를 지켜주시길 빈다.
「어영부영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버나드 쇼의 말이지만 그 다음은 내 차롄가
아 그 때
몸 째로 그냥 들이받아야 했을 걸
―김원각 〈불나방〉 전문(《시조세계》 2011 겨울)
이상범 시인의 디카시와는 정반대로 이미지가 전혀 잡히지 않는 시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지를 생성시키는 묘사는 하나도 없이 진술로만 나가고 있으니. 쭉 읽어버리면 평범한 말 하듯 자연스레 던지고 있는 진술인데도 왜 이토록 가슴 먹먹하게 울리는지. “그래 맞아요, 맞아”라며 가슴 치는 회한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지.
시조 단수로 이뤄진 위 시는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구어체로 흘리면서도 시조의 정형은 곧이곧대로 지키고 있다. 남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기승전결의 전개와 초, 중, 종장의 미학을 빼어나게 보여주고 있다. “어영부영” “그냥” 쓴 시 같아도 이 허사(虛辭)가 시를 이끌며 허허로운 삶을 대오각성하게 하고 있다.
초장은 통째로 버나드 쇼의 말을 인용해 놓았다. 이리저리 번역해도 맞을 말 중에 특히 “어영부영”이란 부사의 뜻 없는 뜻과 어감이 시를 시적으로 자연스레 일으키며 초장의 역할과 무게에 값하고 있다. 중장에서는 초장에 인용된 말을 시인의 지금 상황으로 끌어들이며 전개하고 있다.
그러다 종장의 전반구에 와 그야말로 급전되며 시의 그윽하고 강렬한 눈깔, 시안(詩眼)을 그리고 있다. 종장의 첫 음보 “아 그 때”를 보라. 한 행 한 연으로 독립시킨 것도 모자라 음절마다 띄어 한 음절씩과 그 사이들의 여백을 독립시켜 놓고 있다. 그러면서 “아!” 하는 감탄이 터지며 시의 시공을 아연 확장시키고 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초장과 “몸 째로 그냥 들이받아야 했을 걸”이라는 종장 결말 부분을 감탄으로 받는 “그 때”는 어느 때인가. 예전의 회한의 때이면서 지금 그것을 깨닫는 찰나의 때 아니겠는가. “아 그 때”라고 길게 벌어진 그 긴 순간의 찰나는 또 앞으로 그 같은 상황이 올 때의 예감도 품고 있을 것이고. 그러기에 “했을 걸”이라는 원망형 종결어미로 시를 끝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 그 때”는 과거, 현재, 미래가 겹쳐진 순간이다. 무량의 겁이 겹쳐진 찰나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찰나가 함께 익어 터지며 대오각성에 이른 순간이다. 그 순간 깨친 게 삶이란 “몸째로 그냥 들이받는 것”이란 겐가. 그러면서도 “어영부영” “그냥”이라는 허사가 이끌다 “걸”이라는 원망으로 끝을 맺은 게 참으로 인간적이다. 알면서도 그리하지 못하는 것 또한 신이고 신인 척하지 않는 인간의 진경 아니겠는가.
애써 꾸미지 않아도 이법에 척척 들어맞는 경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수사(修辭)를 어찌 감히 넘볼 수 있겠는가. 필경 그만한 적공(積功)에 더해 쓰다 북북 찢어버리고 다시 쓰다 다시 고치고 한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할 때라야 문득 이를 수 있는 지경일 것을. 새해에도 이런 강건하고도 어긋남이 없는 깨우침의 시 많이 보여주시길 빈다.
새것처럼 빛나는 자연스런 운율, 긴장된 이미지
싸릿재 고갯마루 화절령 하늘길을
바람으로 노래로 떠도는 마음 말고
닳도록
흐르는 것에
물
삶
신발
―김일연 〈신발〉 전문(《문학의오늘》 2011 겨울)
시력(詩歷) 30년을 막 넘어서는 지난해, 김일연 시인은 전아(典雅)한 멋과 기품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미지와 운율이 최첨단으로 세련된 시세계로 각광을 받았다. 지난해 여름 시조부문 유심작품상을 수상한 김 시인은 지난 연말 여섯 번째 시집 《엎드려 별을 보다》를 펴내며 시조단은 물론 자유시단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신경림 시인은 “깊은 산속에서 마시는 맑고 찬 샘물 같다”며 “시조가 이렇게 신선하게 읽힐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라고 경탄했다. 정희성 시인도 이 시집을 읽고 “법고창신의 경지가 바로 이런 것”이라며 “이쯤 되면 시와 시조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위 시 〈신발〉을 보며 시단 최고 시인들의 이러한 찬사가 결코 주례사처럼 미화되고 과장된 평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자유시와 함께 실린 지면에서 위 시는 운율과 압축된 이미지, 그리고 완결감과 함께 짧고 긴장된 형태 등 정형시로서의 시조의 특장이 유감없이 눈에 띄었다.
위 시는 단시조를 4연 7행으로 나눠 형태상 정련된 자유시로 보이게 했다. 고시조같이 한 장을 한 행으로 잡지 않고 자유시처럼 연과 행 나눔 하는 것은 현대시조에서 이제 관행처럼 돼버렸다. 문제는 그처럼 나눔 할 충분한 내적 이유가 있느냐인데 많은 시들이 이유 없이 자유시처럼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해서 자유시 콤플렉스만 드러내며 시조를 스스로 비하하지 않았나 하는 혐의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저 피상적 개념으로 흘려버리고 마는 그 ‘내적 이유’란 도대체 무엇이며 행이나 연 나눔 같은 형식이 어떻게 내용을 강화하고 있는가를 위 시를 통해 들여다보자. 위 시에서 초장, 중장은 각 한 행 한 연으로 처리했다. 초장에서는 지명(地名)이 나열되고 있다. “싸릿재 고갯마루 화절령 하늘길을”이란 실제로 있는 고개가 어떤 수식이나 연관도 없이 시조 정형의 음보율을 타고 나열된다. 정선 백두대간 높디높은 고갯마루 길들이 “하늘길”로 수렴되면서 이 지명은 내면화된다. 실제이면서도 바람 혹은 원과 한의 길로 길게 한 행 한 연으로 쭉 이어지게 하고 있다.
중장에서는 그 하늘길들을 떠도는 마음이 나열된다. “바람으로 노래로”라고 반복되며. 초장, 중장을 각각 한 행 한 연으로 처리함으로써 시조의 운율이 물처럼 바람처럼 흐르고 있다. 우리네 떠도는 마음이며 흐르는 세상이 그러하듯이.
그러다 종장에 와 전반구 두 음보를 각 한 행으로 독립시켜 한 연으로 잡고 후반구를 한 단어 한 단어를 독립시켜 세 행 한 연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 전반구에서 시의 급격한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초장, 중장에서 정처 없이 바람으로 떠돌고 흐르는 세상이 노래처럼 운율로 나열되다 “닳도록/ 흐르는 것에”라며 그 흐르는 것들에 “닳도록”이라는 생의 무게를 올려놓게 된다.
그리고 종장의 후반구 “물/ 삶/ 신발”에 와서는 각 단어마다 시안의 방점이 뚝뚝 찍히고 있다. 두 음보에 7음절가량 돼야 할 시조의 한 구를 3음보 4음절로 보이게 해 정형상 논란이 일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시조의 정형율은 음보율에서 나오고 음보율에 글자 수뿐 아니라 휴지(休止)의 장단까지 허용된다면 이 종장 후반구는 자유시단에서 그토록 부러워하는 시조의 운율과 정련된 이미지의 압권이 될 것이다.
이 부분을 자수율에 근거한 음보율에 맞춘다면 ‘물과 삶/ 그리고 신발’ 정도 될 것이다. 그러나 각 단어를 잇는 연결조사를 날려버리고 또 어떤 수식도 거부함으로써 ‘물’과 ‘삶’과 ‘신발’은 각각 독립된 이미지로 긴장을 충전시키고 또 행 나눔으로 자수율에 따른 음보의 음량에 값하게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저 하늘길 아래 흐르기만 하는 물인 줄 알았는데, 그저 하늘길 위에 뜬구름 같은 삶이요 마음인 줄 알았는데 신발같이 온몸과 마음으로 닳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요, 그리움이요, 사랑 아니겠는가. 여기에 방점을 찍기 위해 초장 중장에서는 한 장 길게 한 행의 운율로 나가다 종장에 와 형태에 급격한 변주를 주었을 것. 한 음절, 한 단어로 툭 불거진 운율에서 독립되고 긴장된, 삶과 그리움의 이미지가 익어 터져 나올 수 있도록.
문득 미운 걸 보면 아직 널 사랑하나 봐
잊었다 해놓고선 또 문득 미운 걸 보면
잊었다, 다 잊었다는 내 거짓말을
나만
몰랐네
―홍성란 〈나만〉 전문(《열린시학》 2011 겨울)
노래처럼 술술 읊조려지는 시이다. 아니 지금도 항간에 많이 불리고 있는 가요에서 차용한 시 같다. 시조 정형의 운율에 반복에 의한 자연스러운 운율이 더해져 실제의 가요보다 더 노래답게 들린다. 굽이굽이 숨겨 놓은 마음 눙치듯 풀어놓는 자연스러운 솜씨 가위 ‘현대판 황진이’답다.
홍 시인의 시를 쭉 봐오며 낭창낭창 맨살, 맨 마음에 휘감기는 타고난 운율에 황진이와 으뜸버금 가는 시인으로 찬탄해왔다. 타고난 운율이라 했지만 그저 얻어진 게 아니었다. 우리 민족의, 아니 인류의 핏줄에 흐르고 있는 생명과 풍류(風流)로서의 운율이 내장된 시조 본디의 운율을 얻기 위한 학술 연구에도 앞장서고 있다.
현대시조를 홍 시인은 “양식화된 정형율에 따르되 행의 배열과 연의 구성은 내적 충동에 의한 자율성을 허용하는” “자율적 정형시”로 보았다. 특히 음보율을 글자 수로만 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장단음까지 합친 음량율로 보아 2―5음절까지를 한 음보로 잡고 있다.
위 시 한 연 한 행으로 잡은 초장에서는 ‘문득| 미운 걸 보면| 아직| 널 사랑하나 봐’라고 음보를 끊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아직’ 2음절이 한 음보가 돼 있기에 그만큼 긴 음량이 들어가 강조될 것이요, 그 두 음절을 받는 “미운 걸 보면” “널 사랑하나 봐”는 각 5, 6음절로 가니 빨리 읊조려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또 앞뒤 구가 균형을 이루며 대구가 되게 하는 자연스러운 효과를 얻고 있다.
중장은 ‘잊었다| 해놓고선| 또 문득| 미운 걸 보면’으로 끊어 읽어야 할 것. 후반구에 ‘또’만 덧붙이며 초장 전반구가 아주 자연스레 반복되며 반복의 운율을 얻어 노래가 되게 하고 있다.
종장에서는 3음보를 한 행으로 마지막 한 음보를 두 행으로 나누고 있다. 반복된 운율의 효과를 내면서도 “나만”과 “몰랐네”를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 시의 키워드는 “내 거짓말”일 것인데 이 부분을 행을 달리했다면 시조의 핵심인 종장 전반구의 급격한 전환을 못 이루었을 것. 하여 반복된 운율도 얻고 전환 효과도 주기 위한 내적 충동으로 행 나눔을 했을 것이다.
홍 시인의 운율에 대한 집착은 “내 거짓말을”이란 이 한 음보에서도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다. 내 거짓말이란 키워드를 한층 더 살려내려면 ‘을’이라는 조사를 떼버리고 툭 부러지게 명사 홀로 세우는 게 날 텐데도 굳이 붙여 부러뜨리지 않은 유려한 운율을 얻고 있다. 이러한 운율에 대한 배려가 홍 시인의 시를 낭창낭창하면서도 전아한 오늘의 노래로 읽히게 하는 것이다.
새해에도 전아한 새로움의 시 풍격(風格) 보여주시길
촛불을 밝혀놓고 이슥토록 앉았습니다
서로 품고 놓아주는 그늘과 빛 보았지요
그림자 손으로 내밀어 마주 잡고 있었습니다
전등불 환한 뒤로 명(明)과 암(暗) 나눴습니다
한 켠을 죄다 물리는 이분법만 따르며
그윽히 바라보는 법 촛불 끄곤 잊었습니다
창 밖에 국화꽃도 밤이슬 받고 있어
심지에 불 올리듯 시름 태운 몇 줄 시(詩)
그렁한 속을 어쩝니까 마음 한 촉 켜듭니다
―김동호 〈촛불〉 전문(《유심》 2011 11/12)
가는 가을 아쉬워 창 밖 국화꽃과 주고받으며 밤새워 시 쓰는 풍경이 잡힐 듯한 시이다. 아니 가는 한 해를 보내는 정갈한 제야(除夜)의 촛불과 시심(詩心)이 창호에 새나오는 듯하다. 세 수로 된 위 시조는 우선 한 장 한 행으로 나가며 형태상 안정감을 줬다. 자수율도 꼬박꼬박 정형에 따르고 경어체까지 사용해 정결하고 경건한 자세를 더하고 있다.
첫 수는 촛불의 빛과 그늘을 묘사하고 있다. 초장에서는 촛불을 이슥토록 밝혀놓은 시인의 상황이 제시되고 중장에서는 촛불의 빛과 그늘의 이미지가 나온다. 촛불의 밝고 그늘짐의 농담(濃淡)이 “서로 품고 놓아주는” 역동적 이미지로 제시된다. 그러다 종장에 와서는 서로 “손으로 내밀어 마주 잡고 있는” 것으로 촛불 이미지는 더 적극성을 띠고 있다.
둘째 수는 환한 전등불의 이미지가 촛불과 대비되어 나타나며 명암이 그윽히 서로를 껴안은 앞 수의 촛불 이미지를 강화시켜주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빛과 어둠을 확연히 가르는 전등불에 비해 촛불은 밝음의 가장자리는 어둠을 붙잡고 어둠의 가장자리 또한 밝음을 붙잡으며 서로 나뉘지 않는 한몸이 되려 하지 않는가. 해서 첫 수와 둘째 수에서는 촛불과 전등불의 대비를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된 2분법을 반성하면서도 또 경어체로 내면으로 심화시키며 만물과 그윽히 소통하는 법을 보여준다.
마지막 수에서는 시를 쓰는 자세를 정갈하게, 그대로 드러나게 하고 있다. “밤 깊어지면 꽃이 그만 자버릴까 저어하여/ 긴 촛불 손에 들고 발간 얼굴 비춰보네”. 무릇 백성은 법으로 다스리기보다 덕으로 보살펴야 한다고 시세(時勢)에 역행하는 주장을 끝내 굽히지 않다 귀양 간 송나라 최고 시인 소동파. 그 덕으로 꽃과 삼라만상과 감응하며 시를 쓴 소동파의 〈해당화〉 한 대목을 떠오르게 하는 시이다.
김 시인도 이 마지막 수 초장에서 밤이슬 받고 있는 국화꽃에 저어하여 밤새워 시를 쓰고 있다. 중장에서는 그런 국화꽃과 촛불과 시의 이미지가 혼연일체가 돼 심지에 불 올리듯 드러나고 있다. 종장에서는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경어체로 그 이미지를 더욱 역동적이면서도 경건하게 제시한다. 그렁그렁 일렁이는 촛불과 국화꽃, 그리고 시심을 어쩔 것인가. 나와 세계와 시가 나뉨 없이 서로서로 껴안을 수 있도록 마음 한 촉 켜둘 수밖에.
새해에도 원로에서 신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조시인들이 이렇게 시조의 정형을 잘 소화해내는 시들로 시대의 첨단을 걸으면서 전아한 멋과 맛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서로 흩어져 더욱 어지러울 세태에 지킬 것은 지키며 보듬는 민족 정형의 위엄을 보이며 우리 시와 시대에 구심임을 시조단이 보여주었으면 한다.
-발췌: 격월간《유심》2012년 1,2월호
이경철 | 문학평론가·시인. 동국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 문화전문기자, 《문예중앙》 주간으로 일하며 다수의 현장비평적인 평론과 산문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와 공저 《대 중문학과 대중문화》 《천상병을 말하다》 편저 《한국 현대시 100년 기념 명시》와 명화 100선 시화집 《꽃필 차례가 그대 앞에 있다》 《시가 있는 아침》 등이 있다. 현재 동국대 문창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