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의 시학
―폴 발레리의 『테스트 씨』
송승환
자신의 감각이 현실로부터, 존재로부터 자신을 떼어놓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내부에 자리 잡은 감각이 그들의 다른 감각을 더럽힌다. 내가 보는 것이 나를 눈멀게 한다. 내가 듣는 것이 나를 귀먹게 한다. 내가 아는 것이 나를 무지하게 만든다. 나는 아는 만큼,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토록 무지하다. 내 앞의 이 빛은 일종의 눈가리개로, 어둠이나 빛을 뒤덮는 더욱… 더욱 무엇을? 여기 이 원은 낯선 전복으로 닫힌다. 존재 위의 구름 같은 앎, 각막을 뒤덮은 백반처럼 빛나는 세계는, 명료하지 않다. 여기 내가 보는 모든 것을 거두어 가소서.
―폴 발레리의 『테스트 씨』 부분
Paul Valéry, Monsieur teste, Gallimard, 1946, pp.60-61. 번역은 필자
프랑스 남서쪽 지중해 연안 항구 셰트(Sète)는 폴 발레리의 출생지이며 그의 고향이다. 그 셰트에는 발레리 박물관이 있는데, 박물관의 2층 벽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다. “하나의 예술 작품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이전에 우리가 보지 않았다고 항상 우리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 때 발레리 박물관에 오르는 언덕길도 가팔랐지만 발레리의 묘지에 오르는 길은 더욱 가팔랐다. 그 박물관과 묘지에서 바라본 팔월의 지중해는 정오의 태양이 부서지면서 반짝이는 흰빛을 푸른빛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정오의 태양은 지상의 그림자를 모두 증발시키고 모든 사물을 명징한 흰빛 속에서 재정립시키려는 지성의 열기처럼 느껴졌다. 그림자 한 점 없는 사물들의 본성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의 정지 화면처럼 보였다. 그 태양 아래 한없이 투명한 푸른 파도는 끝없이 일어나서 해안까지 흰 거품 소리를 몰고 와서 부서졌다. 그리하여 발레리의 시는 지리적 의미의 ‘해변의 묘지’가 아니라 세계의 생성과 소멸 운동이 영원히 멈추지 않는 의미의 「바다의 묘지」로 읽어야 함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하나의 거대한 물방울인 바다가 숱한 파도를 일으키고 그 숱한 파도의 삶은 해안에서 부서져서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우주의 무한 운동과 개별 생명들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메타포. 무한 운동과 죽음을 지중해의 수평선과 마주하며 바라본 시인. 그 무한 운동에 즉각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유한한 생명을 잠시 얻은 인간의 우연성과 ‘나’의 무지 앞에서 겪는 비애. 그리고 “바람이 일어난다!…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폴 발레리.
그는 스무 살을 전후하여 말라르메를 스승으로 삼아 에드가 앨런 포를 읽었다. 특히, 포의 「시의 원리The poetic principle」(1846)와 「작시의 철학The Philosophy of Composition」(1846)은 발레리가 언어 표현의 문제에서 기하학적 원리와 수학적 탐구 정신을 습득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포가 「작시의 철학」에서 “진정한 시적 효과의 정도와 수학적 관계를 가지도록 만들어야 한다”거나 “아름다움이라고 할 때는 그 성질이 아니라 그 효과를 뜻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시의 원리」에서 “언어로 된 시를 미의 운율적 창조”라고 정의한 문장은, 말라르메뿐만 아니라 발레리에게도 평생의 과업이자 시론이 된다. 시를 우연과 감정에 의지하지 않고 기하학적 엄밀성에 의한 효과로서 구현하는 음악의 아름다움으로 규정한 포와 말라르메처럼 발레리는 수학과 지성에 의한 정신의 탐구를 시의 목표로 삼은 것이다.
그의 시론이 담긴 『테스트 씨』(1946)는 스물다섯 살에 발표한 「테스트 씨와의 저녁」(1896)을 근간으로 삼아 그가 죽기 직전까지 집필한 ‘테스트 씨’에 관한 여러 글들을 모은 반리얼리즘 소설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법입문』(1895)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레오나르도의 정신과 그 운동의 방법을 탐구했다면 발레리는 『테스트 씨』에서 ‘인간은 무엇이 가능한가’를 질문한다. 그 질문은 몽테뉴의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물음과 데카르트가 “내 이성을 개발하는데 내 전 생애를 바치며, 진리 인식에 있어서 내가 스스로 과한 방법을 따라 될 수 있는 데까지 전진하기를 계속” 뒤따르는 ‘모랄’의 전통에 서 있다. 몽테뉴의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물음은 내가 아는 것과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의 경계를 확정짓고 ‘나’의 한계를 인식하고 회의하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아는 것’에서 ‘모르는 것’, 그 미지로의 방향을 제시한다. 데카르트의 ‘이성 개발과 진리 인식의 방법’을 끝까지 추구하는 모랄은 발레리가 평생 견지하는 시적 태도로서 그가 창조한 인물 ‘테스트 씨’의 초석이 된다.
내가 「방법서설」에서 읽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들의 마음을 오랫동안 붙들어 둘 수 있는 것은 결코 원리 자체는 아니다. 자기 생애와 자기 탐구의 시초의 사정을 묘사한 매력 있는 서술에서부터 특히 내 눈을 끄는 것은, 그 철학의 전주곡에 드러나는 그 자신의 현전 그것이다. 그것은 이와 같은 종류의 저작에서 감히 ‘나는Je’와 ‘나Moi’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사용했다는 점이라고 해도 좋다. 아마 그것이 가장 뚜렷이 스콜라 철학적인 구조와 대립되는 점이리라. 전적인 일반성의 사고방식에 우리를 도입하게끔 우리 앞에 현저히 환기된 Je와 Moi 이것이 나의 데카르트다…중략…진정한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모름지기 ‘자아중심주의’라고 불리어야 하며 인식의 목적을 위한 인식의 전개라 칭하여 마땅하다.
「방법서설」의 본질은 이와 같은 ‘자아Moi’를 해방시켜 주는 한 사건의 조사와 결과를 묘사한데 불과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중략…그 모든 문제와 장애물에 대항하여 ‘자아’가 있고, 그 자아를 보좌하여 그가 누린 모든 능력이 있다. 그중 하나는 충분한 증거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수학이다. 여기서 행동이 개시될 수 있다.…중략…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그리고 그 목적은 무엇인가?
문제는 한 자아Moi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혹은 증명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자아는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그것은 자기 한계를 느끼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려고 한다. 혹은 모든 것을 다시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그 전에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한다.
―폴 발레리, 「데카르트 관견」 부분
폴 발레리, 「데카르트 관견」,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김붕구 옮김, 박영사, 1974, pp.186-190.
발레리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서 사고의 명증성에 대한 탐구와 “운명이 나에게 몰아오는 사건들 속에서 나 자신을 시험해 보는” 태도를 배우는 한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는 데카르트의 명제가 자아중심주의이며 한계를 느끼지 않는 자아임을 비판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한 자아Moi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혹은 증명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임을 인식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에 대한 증명을 사유하면서 ‘테스트 씨’를 창조한 것임을 추론할 수 있다.
실제로 발레리는 『테스트 씨』의 「서문」에서 실증주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의 집(셰트 근교의 몽펠리에)에 실제로 우연히 살면서 실증주의적인 명증성에 입각하여 쓴 책임을 고백한다. 테스트 씨는 발레리의 한 특성을 닮은 존재로서 지성의 정확성과 앎의 명증성을 위해 문학과 시를 희생하면서 탄생한 인물임을 밝힌다. 테스트 씨는 관습적인 것과 자발적인 것, 우연적인 것과 쉬운 것을 경멸한다. 그의 지성은 데카르트와 달리 자신의 한계에 대한 자각 속에서 언어의 공통 능력 바깥에 있는 완벽함과 순수를 추구한다. “테스트 씨는 왜 불가능한가?”라는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그 물음의 당사자를 테스트 씨로 바꾼다. 그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경계를 확정지음으로써 ‘진실한 자신의 것’으로 돌아가려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의 뒤섞임,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혼재는 온전한 나의 영역과 미지의 영역을 구분할 수 없음으로 인해 나는 ‘나’를 완전히 명증할 수 없다. 진실한 ‘나’를 명증할 수 없는 나의 사유는 ‘나’만의 고유한 시쓰기를 담보할 수 없다. 지금까지 내가 성취한 시의 영역과 익숙한 시쓰기 방식, 고유한 시의 성과와 답보한 시의 구체적 사례에 대한 엄밀한 분석과 수학적 계산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써온 시가 발생시킨 효과와 그것에 대한 명확한 정산이 필요하다. 시쓰기의 정산에 근거하여 지금까지 써온 나의 모든 시를 무시하고 경멸하면서 그 시편들의 바깥으로, 미지로, 불가능으로 나아갈 방향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무엇보다 ‘나’에 대한 목격자이자 내가 알고 있는 것과 가능한 것을 끊임없이 구획짓고 시험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즉, “테스트 씨는 목격자M. Teste est le témoin”이며 그 ‘목격자témion’는 ‘증인․ 목격자․ 참관인’을 뜻하는 라틴어 ‘testis’에서 유래한다. ‘테스트(Teste)’는 ‘머리(tête)’와 두뇌라는 뜻과 함께 ‘시험하다tester’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나에게 가능한 것의 전체를 항상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동시에 나에게 불가능한 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 가능한 전체에 대한 완전한 이해 속에서 전체의 바깥으로 나아갈 때, 그 전체의 바깥은 나에게 불가능의 시학이 전개되는 미지의 세계이다.
발레리는 『테스트 씨』에서 단지 “테스트 씨는 왜 불가능한가?”라는 물음만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문체를 발명한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서 ‘나je'와 ‘나Moi’를 분리해내고 그 일인칭 대명사의 용법 차이를 발견해낸 것처럼 발레리는 타동사 대신 재귀대명동사를 빈번하게 활용하고 그 의미를 확장시킨다. 가령, “나는 자동차를 세차한다(Je lave la voiture)”와 “나는 나를 씻는다(Je me lave)”의 차이, “나는 텔레비전을 바라본다(Je regrard la tele)”와 “나는 나를 바라본다(Je me regarde)”의 차이처럼 그 언어가 빚어내는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재귀대명동사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나는, 나를 관찰하고 증명하는 목격자이자 시험하는 테스트 씨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두에 인용한 테스트 씨의 문장들은 지금까지 논의한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내가 본 것이 내 눈을 멀게 하고 내가 들은 것이 내 귀를 귀먹게 하고 내가 아는 것이 나를 무지하게 만든다는 것. 그것은 모두 내가 가능한 것의 영역에만 머물기 때문에 발생한다. 나에게 가능한 것들의 내부에서만 머물 때 나는 그 내부의 원에 갇힌다. 가능한 것들의 빛이 오히려 어둠의 휘장이 되어 새로운 미지의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제 묻고 싶다. 가능한 것에서 시작할 것인가. 불가능한 것에서 시작할 것인가. 우연과 감상적인 고백에서 시작할 것인가. 수학적 엄밀성과 지성적 사유에서 시작할 것인가. 석류는 기하학적 엄밀성을 간직한 지성의 구조가 터져 나온 붉은 시의 낱말일 것이다.
너희들 알맹이의 과잉에 져서
살짝 열린 딱딱한 석류여,
스스로의 발견에 번쩍이는
고귀한 이마를 나는 보는 듯하다!
너희들이 참아온 세월이,
오 살짝 입 벌린 석류여,
애써 이룩된 너희들 루비의 장벽을
거만스럽게 흔들어 비걱거려도,
그리고 또, 껍질의 메마른 황금이
어느 힘의 요구에 따라
찢어져 빨간 보석의 과즙이 되어도,
그래도, 그 빛나는 균열은
비밀의 구조를 갖고 있는
내 혼을 생각게 한다.
― 「석류」 전문
폴 발레리, 『발레리 시집』 박이문 옮김, 교양문화사, 1959, pp.168-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