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善山,一善)김씨 고령군(高靈郡) 쌍림면(雙林面) 합가1리(合伽1里, 개실) 마을
고령읍내에서 합천으로 이어지는 33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88고속도로 아래를 지나면 쌍림면이다. 한참을 더 달리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해인사로 가는 오른쪽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3km 가량 들어가면 예사롭지 않은 한옥 기와집들이 즐비한 양반 마을이 큰 길 오른편에 들어앉아 있다. 고령군 쌍림면 합가1리, 일명 개실, 개애실(伽倻谷) 마을로 조선 유학(儒學)의 거봉(巨峰)이자 영남 사림파(士林派)의 종장(宗匠)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일선(一善) 김씨 집성촌이다.
500여 년 전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5대손에 이르러 1650년경에 이 마을로 들어와 은거하며 살 때, 꽃이 피고 골이 아름다워 아름다울 가(佳), 골짜기 곡(谷)을 써서 가곡이라 하고, 또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곳이라 하여 개화실(開花室)이라 하였는데, 음이 변하여 개애실이 되고 현재 개실이라 불리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김씨세거비’를 비롯하여 가문의 인물과 관련한 4기의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어 이곳이 일선 김씨 일족의 350 여 년 세거지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 문중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물론 영남사림파 종장으로서의 맥(脈)인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이다. 김숙자(1389.공양왕1-1456.세조2)는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산인(江湖山人). 길재(吉再)의 문인. 1414년(태종1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19년(세종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가 한 때 해임, 선산교수(善山敎授), 개령현감(開寧縣監),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등을 역임했다. 1455년 세조 즉위 후 벼슬을 그만두고 밀양(密陽)에 돌아가 후진교육에 힘썼으며, 조선 초기의 거유(巨儒)로서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아 정주학(程朱學)을 발전시켰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 선산 낙봉서원(洛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영남학파의 종조 점필재 김종직(1431.세종13~1492.성종23)은 조선초기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자는 계온(季溫), 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사예(司藝) 김숙자의 아등. 밀양(密陽) 출신. 1431년에 밀양의 서쪽 대동리에서 태어났다. 1453년(단종1) 진사(進士)가 되고, 1459년(세조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이듬해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자(正字), 교리(校理), 감찰(監察),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 등을 역임, 성종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함양군수(咸陽郡守), 참교(參校), 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도승지(都承旨), 이조참판(吏曹參判),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한성부윤(漢城府尹), 공주참판(工曹參判), 형조판서(刑曹判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며, 기성 세력인 훈구파(勳舊派)와 심한 반목과 대립을 일으켰다. 일찍이 1457년(세조3) 유명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은 바 있었는데,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이것을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았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며, 문인들이 모두 참화(慘禍)를 입었다. 길재 및 아버지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문 경향은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주안으로 하는 실제적 방면에 치중하는 것이었다. 총재관(總裁官)으로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55권을 증수(增修)했으며,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咸陽)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祭享)하며,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조의제문은 1457년 10월에 쓴 글이다.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楚)나라 의제(義帝)를 조문하는 내용으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이다. 후에 제자인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 이 글을 사초에 적어 넣었는데, 이것이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무오사화는 1498년(연산군4)7월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이다. 성종실록의 편찬 때 사초에 실린 '조의제문'이 계기가 되어 김일손 등 많은 사람이 화를 입었으며, 점필재 선생응 부관참시되
마을 입구에는 개실 일선김씨 사적을 적은 김씨세거비(김씨세거비)와 김씨오세효행사적비(김씨오세효행사적비), 병조참의가정김공유허비(병조참의가정김공유허비) 등 세거비들이 있고, 점필재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림(儒林)들이 건립한 도연재(道淵齋)가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도연재는 종택과는 약 100m 거리를 두고 있는데, 점필재 선생의 15세 주손인 김창현 대에 건립되었다 하며, 상량문(上樑文)에는 1886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을 안에는 민속자료 제62호인 점필재종택, 문화재자료 제111호인 도연재, 유형문화재 제209호인 점필재 문적유품 등의 문화재가 있다. 점필재 종택은 경북 민속자료 제62호로 지정되었는데, 이 건물은 선산(일선)김씨 문충공파의 종택으로서 안채는 1800년 경에, 사랑채는 1812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마을 뒷산을 등지고 완만한 경사를 이룬 터에 남동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으며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고방, 대문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선생의 불천위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종택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9호로 지정된 점필재 문적 유품 및 종가문서들이 있다. 고문서는 주로 김종직의 교지와 서찰, 분재문기, 전답매매명문 등으로 조선조 중기 사회·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그밖에도 관람자의 볼거리에 제공되는 대나무숲이 있고, 종택 뒷산에는 중간에 휴식을 위한 관망대가 있는 등산로도 개발되어 있다. 참고로 점필재 선생의 묘소는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