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지 사 랑
적당한 거리.
눈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 옆집의 그녀한테서 전화가 왔다, 밤 외출은 거의 하지 않는
나로서 선뜻 나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값비싸고 질 좋은 양주를 골고루 진열해놓고도
그림에 떡인 양 그집 부부는 고급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다. 하고많은 술 중에서 오직
막걸리와 맥주만 마시는 그녀한테서 넘치는 술 냄새, 한밤에 술 취해서 나를 이야기 상대를
불러내야 하는 그녀에게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려운 일이나 무슨 기막힌 일이 생겼을 때,당장 의논 상대가 있다는 것도 복이다. 인간관계는
일정한 거리 유지가 철칙이다. 친하다고 해서 늘붙어 다닌다든지 싫다고 거리 이상으로 떨어
진다면 우주의 큰 질서에서부터 작은 공중도덕까지 대 혼란이 일어난다. 사소한 규범은 기본
생활을 윤택하게 한다. 정을 돈독하게 쌓느냐,작은 웃음을 잃지 않느냐가 달린것은 어쩌면
우주의 질서보다 더 중요하게 지켜나가야 할 우리 스스로가 정한 규칙이다.
아파트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집은 날이면 날마다 쓸고 닦고 털며 먼지하나 없이 해
놓고 산다. 깔끔하게 해놓고 사는 그 집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 집도 깨끗하게 정리정돈을 잘해
놓고 살아야겠다고 속다짐을 한다. 도를 넘지 않는 말끔한 생활은 건강의 기본수칙이다.
하지만 사람을 멀리하고 거부하는 청결함은 지저분함보다 못하다. 남편이 돈을 탕진하여 고민
이라 했다. 산꼭대기에서 탁한 세상을 내려다 보며 주고받는 이야기라도 산의 정상에서는 다
정화되는 법,한 번쯤은 용서해주라고 손을 잡았다. 월급으로 사는 생활인은 단 몇 푼이라도
해프게 쓰는 달에는 몇 달을 돈에 들볶이게 된다. 가끔 돈의 노예로 착각할 때도 있지만 이내
돈의 주인이 되면서 일상을 되찿는 것이 봉급자의 빠듯한 일상이다.
손님을 부른다든지 불쑥 찾아오는 이들이 있을까봐 정리를 하고 산다고 해도 날마다 먼지 털어
내는 대청소는 어렵다.투명하게 햇살 받아먹는 유리청소는 게을리 하지 않는다. 아이들 책상을
치워주어도 다음날은 원상 복귀다. 적당하게 어질러 놓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하니 서로를 편하게
해주는 것도 삶의 질서와 화합을 유지하는 작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에 갔다 온 날 저녁부터 부부인연을 끝내기라도 할듯이 격한 말씨름으로 벽 하나 사이에서
우리는 잠 못이루는 밤이 되고 말았다. 넓은 아량과 용서로 덮어주겠다든 화해가 옆길로 도망가
버렸던 모양이다.아파트의 구조가 아래위와 옆이 동시 울리는 바람에 큰 소리 한번 치려해도
오금이 저려 싸움도 마음놓고 못해본 난데 그녀의 싸움은 우리 집 안방 벽을 상에 두고 있으니
나 한 사람만 참아내면 이웃은 별 탈이 없다.자기가 이렇게 싸우지 않으면 왜 안 되는지 내가
이해하리라 믿고 잇기 때문일까,
한 쪽도 기울지 않으려는 말투와 몸싸움이 몇 일째 계속되고 있다. 낮이고 밤이고 분별없이
치르는 자신들의 이기심 때문에 수험생이 사용하는 귀막이까지 동원된 사실, 장난으로 던진
돌 맞은 개구리처럼 잠자리에 들때마다 오늘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보낼 수 있을까하고
가슴졸인다. 카랑카랑하던 그녀의 쉰 목소리가 울부짖는다. 싸움소리에 지치다가 또 애처롭다.
무조건 용서해주겠다던 아량은 어디로 갔을까, 도저히 용서 못할 일이라도 일어났는지
궁금증이 일어나 전화라도 해 볼까하고 망설였지만 부부간의 일이라 선뜻 나서기가 뭣했다.
가끔은 낮선 목소리가 들려 이제 싸움이 진정되려나 했지만 그것도 잠시 두 사람의 더 억세기
만 하다. 사랑하고, 애살많고 예질갑고, 열심히 잘 살려고 그녀는 애쓴다. 그런 것들을 먼발치
서 바라보며 이웃에 그런 삶이 있다는 것을 행운이라 생각한 적도있다. 남이 가진 것은 다
좋게 보이고 내가 가진 것은 하잘것없다는 그런식이었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지지고 볶는
가족관계야말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들만의 맛을 내며 사는 것이 가정이 아니겠는가,
산에서 헤어지고 얼굴 보는 것이 그의 한달 만이다, 어둠속에서도 완연히 들어 나는 기미와
헬쓱한 행색에 깊은 이유를 모르지만 나도 눈물이 핑돈다. 눈비도 아량곳하지 않고 나를 사랑
한다고 끌어안고 펑펑운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우리는 서로를 확인할 새도 없이 엉켜버린다.
막힌 가슴을 두드려도 밀려나오지 못하는 배신ㄷ덩어리 때문인지 가슴을 퍽퍽친다.
남편을 용서할 수 없다는 이유에 당사자가 아닌 나로서는 어떤 위로로도 그녀를 달랠 수
없었다.다만 너무나 깊숙하게 파고 들어간 삶의 방정식을 약간은 고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그것이 당장에 무슨 위로거리가 되겠느냐만 아직도 풀리지 않은 남편과 굳게 엮어진 매듭을
조금은 부드럽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자랑도 아닌 일을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술기운이지만 내뱉으면 받아 씹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에 다소 안정을 찾는 듯 혈색이 돌았다. 그들 부부가 근 한 달 동안을 싸움에 시달렷다면
어떤 상황인지 불을 보듯 뻔하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 식구도 짜증보다 이웃이 빨리
화해를 했으면 좋겠다. 싸움에도 한계가 잇고 지칠 정도는 되었건만 팽팽한 동아줄이 되어
언제 끊어질지 도무지 모를 일이지만 확신하는 한 가지, 그들은 찹쌀 궁합이기 때문에 틀림
없이 화해하여 언제 그랬냐는 듯 찰싹 붙어 다닐 날이 올 것이다. 울고 악다구니를 해도 누군
가 양보하지 않으면 집착의 끈은 풀어지지 않음을 그들이 더 잘 알고 있다. 너무 사랑하고
잘 살려고 아둥거리고 분에 넘치는 애착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이번 일로 그녀는
깨달았단다. 하지만 깨달았을 뿐 실행은 깨달음보다 더욱 어렵다는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날도 여전히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우리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틈을 타서 나는 일설을 사자후했다. "안주인인 내가 인물도
출중하지 못하고, 부지런하지도 않고, 남편에게 여우 노릇도 못하고, 자식들에게는 알강달강
하지도 못하고, 부모에게도 무던한 여식과 며느리고, 재산장만에도 닥달못하고,성격도 물에
물 타고 급한 것도 바쁜 것도 없는 이런 인간 하나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방석 하나면
넉넉하니 이 좁은 공간에서도 별 탈 없이 잘 사는 것이 순전히 다 나 때문임을 우리 식구들은
알기 바라오,"
"제발, 어머니"
"으하하!"
"아이고, 맙소사!"
"사람 죽이네, 이 마누라가,"
"예언자를 너무 깊이 탐독한 휴유증이 이렇게 어머니를 망가뜨릴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며칠간은 당나귀 귀를 해도 벽 저쪽이 조용하다. 폭풍전야도 조용하지만 휩슬고 지나간 흔적
도 입다물게 한다. 휘감긴 흠집과 덴가슴의 깊은 상처는 아무는 기간도 길게 마련이다.
덧정이 생겨나길 비는 이웃의 마음이 이러한데 본인들이야 오죽하리,
크다고 큰 싸움, 작다고 작은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죽을죄를 지었어도 오히려 용서
의 폭이 넓을 수도 있고 사소한 일이 죽네 사네 헛웃음거리 만들 때도 있다. 작은 것이 사람의
심성을 움직이는 바로미터처럼 인간관계는 거리유지를 잘하는 이가 현명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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