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양 우리의 문(뒤라)은 몸 된 성전과 같은 좁은 문이다.
2) 양의 우리는 골방과 같은 누스(마음 너머) 안에 있는 나오스 성전이다.
3) 얍바사(메마른 땅)가 드러난 갈대 바다(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가야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된다.
4) 몸 밖의 건물 성전을 지어 놓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자들이 도적이요 강도다.
나. 본론
1) 양 우리의 문(뒤라)은 몸 된 성전과 같은 좁은 문이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요 10:2)”
(호-데 에이세르코메노스 디아 테스 뒤라스 포이멘 에스틴 톤 프로바톤 : 그 문(뒤라)을 통하여 들어가는 자가 그 양들의 목자다)다.
양 우리의 문(뒤라)은 몸 된 성전의 문과 같은 좁은 문이다. 예수께서는 “골방(타이메온)으로 들어가 문(뒤라)을 닫으라” 하였고(마 6:6), “좁은(스테네스) 문(퓔레스)으로 들어가라” 하였다(마 7:13, 눅 13:24)). 좁은 문(퓔라)과 양의 문(뒤라)은 내면의 몸 된 성전 안에 있다. 좁은 문과 양의 문 그리고 양의 우리(아울레)는 예수 자신을 지칭하고 있으며, 이 예수가 각자 안에 있다.
2) 양의 우리는 골방과 같은 누스(마음 너머) 안에 있는 나오스 성전이다.
양의 우리(아울레)는 골방(타메이온)과 같다. 골방은 누스(마음 너머) 안에 있는 나오스 성전의 성소 안에 있다. 골방 안으로 들어가서도 나오지 못하도록 문(뒤라)을 닫고 있어야 한다. 뱀에 미혹되어 골방 문을 열고 나오면 선악 지식나무로부터 먹게 되어 카르디아(마음)로 끌려가 뱀의 종이 되어 살게 되면 하나님과는 단절되는 것이다. 뱀이 도적이요 강도의 우두머리다. 뱀이 성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골방 안으로 들어갔어도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이 여전히 남아 솟아 나오면 문을 열고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구약이 없으면 골방 안으로 들어가기도 어렵고 혹 골방 안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다시 문을 열고 나오게 된다. 구약은 구약 성경(39권) 전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골방 안으로 들어가려면 애굽에서의 핍박이 있어야 말씀을 받은 모세가 나타나 이끌어가게 되며, 열 가지 재앙과 양고기와 무교병을 배 안에 넣고 모세를 따라 갈대 바다를 향해서 갈 수 있다.
3) 얍바사(메마른 땅)가 드러난 갈대 바다(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가야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된다.
얍바사(메마른 땅)가 드러난 그 갈대 바다를 건너 광야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여호수아(생명의 빛)의 인도로 가나안 땅 안에 들어가서 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처럼 골방 안으로 들어가기가 단계를 거치는 만큼 참으로 어렵다. 전쟁을 치르는 일은 디아코니아(몸 된 성전)가 할 일이다.
실례로 요한복음 8장에서 바리새인들이 현재 간음 당하고 있는 여인(여성)의 뜰을 넘어서 들어갈 수 없으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자(귀네)를 예수가 있는 곳까지 끌고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 등장하는 여자(귀네)는 여성이 아니다. 뱀은 성소의 골방 앞까지 들어가서 골방 안에 있는 제사장을 꾀어 불러낼 수 있다는 내용이다. 골방 안으로 들어가서 반드시 문을 닫고 있어야 하는 그 이유다. 골방 안에서는 오직 사띠, 사마타, 위빠사나가 이루어짐을 노아의 방주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띠, 사마타, 위빠사나는 불교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지만 해석된 내용으로 보아 생명의 빛으로 사띠는 기억, 알아차림의 의미로서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알아차림의 상태를 말하며, 사마타는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내용이고, 위빠사나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끊임없이 관찰하며 지혜를 얻는 데 있다. 위빠사나의 ‘위’는 다르다 또는 분리하다, 의 뜻이고, 빠사나는 지속하여 주시하다, 의 의미다. 깨달음의 내용이다)
4) 몸 밖의 건물 성전을 지어 놓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자들이 도적이요 강도다.
몸 된 성전이 아닌 몸 밖의 건물 성전을 지어 놓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자들은 도적이요 강도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현상은 이천 년 전 예수가 오셨던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내면에 있는 몸 된 성전의 지성소로부터 오신다. 마음(카르디아)의 벽, 에고의 벽을 뚫고 그 문을 통하여 들어오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양들은 앞을 잘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을 인도할 참 목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 문으로 예수께서 들어오실 수 있도록 먼저 훈련과 고뇌가 있음을 각 서신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동안 마음은 에고를 견고하게 하는데 길들어져 왔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가의 다락방 안으로 오셨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이를 알려 주신다. 닫혀 있는 다락방은 각자 안에 있다. 훈련된 제자들에게 그 에고(생각)의 벽을 뚫고 예수께서 들어오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몸 밖으로 오시는 것도 아니며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도 아니다. 내면의 세계는 구름(믿음의 선진)을 비유한 말이며, 내면의 하늘에 떠 있는 별은 생명의 빛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내면에 있는 양 우리의 문을 통하여 들어오지 않는 자들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이루고자 하는 자들이며, 이들이 도적이요 강도며 양들을 훔치고 늑탈하는 자들이다. 그 도둑과 강도는 목자의 옷을 입은 이리다. 이들은 겉 사람의 문 또는 에고의 문을 통하여 온다. 거짓 목자들은 양들을 겉 사람의 세계로 이끌어가고, 좋은 목자는 내면에 있는 속사람 곧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 인도하신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