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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주 테마여행 / 13차 /경북 경주 금오봉 산행후기
1. 일 시 : 2011. 02. 13(일) / 7시10 출발 - 6시50분 도착 /11시간40분
2. 장 소 : 금오봉(경주)
3. 참여인원 : 38명
4. 이동코스 : 상주-남상주ic-중부내륙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경주- 용장1리-할매부처-괘릉-청기와식당-경부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남상부ic- 상주무양청사
5. 테마여행 일정
◇등산소요시간 : 서남산주차장 - 삼릉-석조여래상-마애관음보살입상-선각마애불-석조여래좌상-마애여래상-상선암-마애석가여래좌상-냉골암봉-상사바위-금오산정상-순환도로-용장사지삼층석탑-마애여래좌상-삼륜대좌불-용장사지-용장계곡-용장1리마을 /6km / 3시간30분
◇문화탐방 : 할매부처(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 (보물 제198호) / 괘릉
◇별미탐방 : 청기와식당 /054-745-8089
경주의 별미는 쌈밥과 콩으로 만든 음식과 황남빵이 가장 인기있는 별미로 알려져 있습니다. 쌈밥을 여러번 먹었지만 경주의 쌈밥은 어떨지 기대를 하면서 수소문 한결과 청기와 식당이 고풍스러운 식당으로 맛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전화를 하여 주문을 해 놓고 걱정이 좀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껏 인터넷에 올라온 별미집은 성공할 확률이 반반이였습니다. 하지만 여주인의고향이 상주라 하여 내심 마음속으로 안심을 하면서 불고기 쌈밥을 예약을 하였습니다
모든 일정이 좀빨리 끝난 관계로 3시30분에 식당에 들어가니 정갈하게 음식을 세팅하여 주인여사장님의 정성과 함께 정갈한 경주의 쌈밥을 맛있게 음미하면서 이른 저녁겸 하산주로 정담을 나누면서 경주의 별미를 맛볼수 있었습니다
6. 테마여행 후기
벌써 한해를 시작한지 2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동해안에 큰눈이 왔다는 뉴스는 접했지만 경주에 그리 많은 눈이 내렸을줄은 생각도 못하고 경주에 도착하니 온산이 눈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산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큰산의 모습을 간직한 경주의 남산을 보면서 천년 세월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천년 노천 박물관으로 알려진 남산을 겸허한 마음을 간직한채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등산로 곳곳에는 산객들로 인산인해 였습니다.우리나라 전체문화재 3000점중 200점을 보유한 경주, 이산은 우리에게 어떤 추억을 줄까를 생각하면서 산과 동행을 시작했습니다 .
용장1리 마을에서 시작하는 등산로 초입입니다. 우리팀외에도 다른 산악회에서도 산행의 들머리로 잡은곳입니다
용장사
김시습
용장골 깊어 오가는 사람 없네 / 보슬비에 신우대는 여울가에 움돋고
비낀 바람은 들매화 희롱하는데 / 작은 창가에 사슴 함께 잠들었네
의자에 먼지가 재처럼 깔렸는데 / 깰 줄 모르네 억새 처마 밑에서
들꽃은 떨어지고 또 피는데 ....
매월당 김시습과 금오신화
김시습(1435~1493)은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문인이다. 본관은 강릉, 호는 매월당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다섯 살 때 신동이라는 소문이 날 만큼 타고난 재주가 뛰어났다.
21세에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태워버린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전국을 유랑하였다. 31세부터 37세까지 경주 금오산에 칩거하였는데, 그가 머물렀던 곳이 용장사이다. 이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충청도 만수산 무량사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의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 현존 자료로는 시문집인 <매월당집>과 단편소설집 <금오신화>가 있다. <금오신화>는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인정되고 있는데 그 중 다섯 편이 전할 뿐 완본은 알 수가 없다.
다섯 권 중 '만복사저포기'는 노총각 양생이 죽은 처녀의 혼백과 연애하는 이야기이며, '이생규장전' 역시 이런 사랑을 다루었다. '남연부주지','용궁부연록','위유부벽정기'도 모두 현실을 벗어난 또 다른 세계를 무대로 하였다. 이들 작품의 공통적인 특징은 귀신이나 염라왕, 용왕 같은 비현실적인 소재를 끌어들였으며, 중국이 아닌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우리나라 사람의 감정과 풍속을 묘사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결말에서 주인공들이 모두 세상을 등지는 것으로 그릇된 세계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보이고 있으며, 시를 많이 삽입하여 인물의 심리와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는 점도 공통적 특징이다.
이 작품이 창작된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금오산에 머물렀던 30대의 작품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작가의식과 내용과 기교에 있어서 훌륭한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한국소설의 출발점이라는 의미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다.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쓸 때만 하더라도 금오산(남산) 일대에는 보살들의 목탁소리, 염불소리, 경 읽는 소리와 자연이 한데 어울렸을 터이다.
<동경잡기>에는 "...매월당의 사당은 금오산의 남쪽 동구에 있다. 즉 그곳은 용장사의 옛터로서 김시습이 노닐던 곳이다..... 김시습은 국내의 명산을 두루 편력하여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만년에는 금오산에서 불우한 생을 마쳤다. 그의 매월당이라는 호 역시 금오산의 매월(梅月)이라는 뜻을 딴 것이라고 한다. 금오신화의 시에서 매화의 달 그림자가 창에 가득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남산만큼 자연과 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룬 곳은 드물다. 신라 화랑들의 훈련장이기도 했다. 신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혼이 깃들었다고 이곳에 불국토를 세우려 했다. 이를 증명하듯 골짜기마다 석불과 석탑이, 봉우리마다 절터가 있다.
절터 150곳과 석불·마애불 129기, 탑 99기, 석등 22기, 왕릉 13기, 고분 37기 등 모두 694개에 이른다. 산 그 자체가 거대한 문화재다. 2005년 바위절벽 불상이 발견되는 등 지금도 계속 문화유적이 나타나고 있다. 얼마나 더 많은 흔적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남산을 일컬어 ‘산속의 노천박물관’이라 한다. 이 때문에 196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뒤 1985년에는 산 전체가 사적 311호로 지정됐다.
2000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경주시가 2052년까지 54년 계획으로 1200억원을 들여 남산을 살리는 계획을 추진하는 것도 이 산이 품은 자연적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커서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자연암반을 파내어 광배로 삼았는데 깍아내다가 그만둔 듯 거칠다. 높이 7m로 냉골에서는 가장 큰 불상이고 남산의 북봉인 금오봉을 향하여 앉아 있다. 이불상의 머리는 거의 입체불에 가깝고 그 아래는 선으로만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명 냉곡이라고도 하는 삼릉계곡의 왼쪽 능선위에 있는 이 석불좌상은 화강암을 조각하여 만들었다. 보물 제666호로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법의를 표현했으나 몸전체는 매우 풍만하게 느끼도록 제작되었다. 석불이 앉아 있는 연화대석에 새겨진 연꽃무늬와 안상을 비롯하여 전체적인 불상의 모습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작품으로 보인다
상사바위의 전설
경주시 남산동에는 아이들에게 저 바위가 무슨 바위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상사바위라고 하는 거대한 두 개의 바위가 국사곡 산정에 서 있다. 그 바위에는 애닯은 이야기가 어려 있기에 상사바위라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옛날 국사곡 어귀에 외로운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집안 식구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 버리고, 할아버지는 혼자 살았다. 할아버지는 외로움을 참기 어려워 가끔 식구들 무덤으로 찾아가서 울었다. 그래도 허전하긴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을 보면 손자를 보는 듯 귀여워하였다. 동리 아이들도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따랐다.
그 중에서도 이웃집에 사는 피리라는 소녀를 퍽 귀여워하였고, 피리도 할아버지를 극진히 따랐다. 할아버지가 80세를 넘었을 때 피리도 자라서 어느덧 꽃다운 처녀가 되었다. 피리는 철이 들면서 외로운 할아버지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맛있는 음식 등을 할아버지께 갖다 드리며 기쁘게 해 드렸다.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사람이 피리였다.
어느 해 봄 피리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늘 시중을 들어 주던 피리가 없으니 못 견디게 쓸쓸하였다. 다시는 못 올 줄 알면서도 피리를 기다렸다. 어느날도 방안에 앉아 피리를 생각하고 있는데 살그머니 문이 열리면서 그토록 그리던 피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너무나 반가워 '피리!' 하고 외치며 일어섰으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할아버지의 눈에는 피리의 환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뜨면 천장에 있고, 이불을 쓰면 이불 속에 있고, 눈을 감아도 눈 속에 나타나서 피리가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이었다. '피리!'하고 할아버지는 크게 외쳐 보고는 머리를 설레 설레 흔들었다. 그저 자식처럼 귀여워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 처녀 피리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안되지? 안돼' 할아버지는 머리를 저었다. '이제 며칠 안가서 낙엽처럼 질 몸이 꽃봉우리같이 피어나는 피리를 사랑하다니 안될 일이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다짐해 봐도 헛일이었다.
피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느새 뱀처럼 기어나와서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피리를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양심과 피리를 아내로 삼겠다는 욕심이 머리 속에서 쉴새없이 싸우고 있건만 끝내 무서운 욕망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다 차지하고 마는 것이었다. 어느날 할아버지는 국사곡 산정에 올라가서 피리가 이사간 마을을 멀리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나무에 목을 메어 죽어 버렸다.
할아버지의 혼은 그곳에 큰 바위가 되어 피리가 살고 있는 마을을 늘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후 피리는 무서운 꿈을 꾸게 되었다. 눈만 감으면 큰 뱀이 몸을 칭칭 감고,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덤벼드는 것이었다. 몸부림을 치며 깨어나면 그것은 꿈이었으나 너무나 소름끼치는 무서운 꿈이었다. 그 무서운 꿈은 한번만 꾸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으면 또 다시 되풀이되고 하니 피리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몸은 점점 쇠약해져서 볼품없이 되어 가는데 동리 사람들 사이에는 수군수군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피리를 생각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그리워하던 생각이 상사뱀이 되어 피리를 찾아오는 거라는 이야기였다. 오랫동안 밤잠을 자지 못하여 괴로움에 지쳐 있던 피리가 어느날 몽롱하게 잠이 들었는데 몸을 감고 있던 뱀이 할아버지로 변하면서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아 죽어 버렸는데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아 피리 아가씨를 괴롭히고 있으니 용서해 주시오. 살았을 땐 죽을 길이라도 있더니 이제 죽었으니 죽을 길도 없구료."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힘없이 국사곡으로 들어가 바위가 되어 자기를 바라보고 서 있는 꿈을 꾸었다.
피리는 자기를 생각하다가 죽은 할아버지가 죽어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피리는 조용히 일어나서 할아버지가 힘없이 가던 길을 따라 국사곡으로 들어가서 정상에 서 있는 그 바위에 올라섰다. "할아버지, 인간세상에서는 나이 때문에 소원을 못 이루었으니 나이를 아니먹는 바위가 되어 원한 맺힌 소원을 풀어 드리겠습니다."하고 바위에서 뛰어 내렸다. 피리의 영혼은 또 하나의 바위가 되어 큰 바위 옆에 나란히 섰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 바위를 가리켜 상사바위라 한다. 지금 큰 바위부분에 붉게 보이는 반점이 있으니 그것을 피리의 핏자국이라 한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
앞뒤로 솟은 이들 바위는 높이가 4m정도인데, 폭이 앞의 것은4m 가량 되고, 뒤의 것은7m 가량으로 더 넓다. 불상은 정으로 쪼아 만들어낸 조각이라기보다는 먹을 듬뿍 찍은 붓으로화선지에쓱쓱 그려낸 그림에 더 가까워 보일 정도로선적인 미감을 불러 일으킨다.
앞쪽 바위에 그려진 삼존불의 본존은 서 있고좌우 협시보살은 앉아 있다. 본존의 높이는 2.65m, 협시보살의 높이는 1.8m 정도이다. 석가모니불로 보이는 본존은 오른손을 올려 들고 왼손을 배에 대고 있으며, 협시하는 보살은 무릎을 꿇고 본존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협시보살이 두 손에 모아 쥐고 있는 것이 꽃인지 다기(茶器)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삼릉
신라 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 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아달아왕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에 58m, 높이 5.4m, 리름 18m이다
효공왕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의 사위인 신덕왕을 추대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결과 매장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돌방으로 밝혀 졌다
경명왕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왕건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 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과 외교를 밎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할매 부처 / 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 (보물 제198호)
경주 남산 동쪽 기슭 부처 골짜기의 한 바위에 깊이가 90cm나 되는 석굴을 파고 만든 여래좌상이다.
불상의 머리는 두건을 덮어쓴 것 같은데 이것은 귀 부분까지 덮고 있다. 얼굴은 둥그렇고 약간 숙여져 있으며, 부은 듯한 눈과 깊게 파인 입가에서는 내면의 미소가 번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인왕리석불좌상과 유사하지만 전체적으로 자세가 아름답고 여성적이다.
양 어깨에 걸쳐입은 옷은 아래로 길게 흘러내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까지 덮고 있는데, 옷자락이 물결무늬처럼 부드럽게 조각되어 전체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석불은 경주 남산에 남아있는 신라 석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국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 불상으로 인하여 계곡 이름을 부처 골짜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민족의 종교가 들어와 토착민과 융합해 나가는 과정을 추론할수있는데, 인자하고 다소곳한, 남에게 상처줄 말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저 모습에서 우리는 거부감보다는 친근감을 이질감보다는 친숙감을 느꼈다
윤경렬 선생님은 신라 사람들은 바위를 쪼아서 불상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바위속에 숨어 있는 불상의 모습을 드러낸것이라고 하였다.
천년의 세월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할매부처를 보면서 간절히 기도했을까. 저 할매부처는 우리를 만나기위해 천년의 세월을 기다렸다는 생각에 왠지 할머니를 만난것같은 친근감이 가슴에 와 닿았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할매님께 비나이다. 올한해 국운이 융성하고 이사진을 보는 모든 분들의 가정에 행운과 행복이 넘쳐나길 기원하나이다.
괘릉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재위 785~798)의 무덤인 괘릉은 한 마디로 경주에 있는 1백55개 고분 중 능묘정원이 가장 아름답고, 그 능묘조각은 통일신라 리얼리즘 조각의 진수라고 할 만하다. 사실 석굴암과 경주 남산의 조각들은 모두 불교 조각이기 때문에 리얼리즘 조각이라는 말이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괘릉에 있는 각기 한쌍의 문신석과 무신석, 그리고 두쌍의 돌사자는 정확한 묘사를 요구하는 인체조각.동물조각이기 때문에 사실성의 관점에서 감상하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8세기 리얼리즘 조각의 꽃이라 할 만한 것이다.
서역인의 얼굴로 유명한 무신석은 부릅뜬 눈과 굳게 다문 입의 표현도 박진감있지만 팔뚝까지 걷어붙인 소매의 표현과 몸을 15도 정도 비튼 자세의 설정이 압권이다. 그로 인해 무신상에는 강한 동감(動感)이 일어나고 금방 앞으로 다가올 것 같은 생동감이 살아나 있다.
이에 반해 문신석은 정면 정관의 정지감에 충만해 있다. 그러나 지그시 내려다보는 눈과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읍하는 긴장된 자세, 그리고 살짝 올라온 발끝의 표현으로 거기에 내재된 충만감과 양괴감이 마치 내공의 힘이 가득한 것처럼 느껴진다.
네 마리 돌사자 중 두 마리는 앞발을 곧추 세우고서 정면을 응시하고, 두 마리는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을 포착했다. 그것은 돌사자들이 바라보는 방향이 동서남북 사방의 방위를 상징케 하는 기발한 구상에서 나온 것이다. 입을 다물고 앞을 응시하는 정면 향의 사자는 몸을 한껏 움츠리고 앞발을 굳게 딛고 있어 문신석 같은 정지감이 강조돼 있고, 포효하며 몸을 젖힌 사자는 앞발을 슬쩍 들어 다음 동작으로 이어질 동세를 강하게 암시한다.
괘릉의 조각들은 이처럼 낱낱 조각에서 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정지감과 동감의 교차로 능묘 전체에 말할 수 없는 생동감과 활기를 느끼게 한다.
경주의 별미 불고기 보쌈시식 시간입니다..
천년의 미소가 남아있는 경주 , 오늘도 무탈하고 즐겁게 하루를 마무리 할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보지 못한 경주의 역사는 다음번에 한번더 오기로 약속을 하면서 상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동참하신 회원여러분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다음달은 거제도로 떠납니다. 아름다운 거제의 망산을 올라 남해의 아름다운 바다와 싱싱한 바다회로 별미를 맛볼까 합니다. 다음달에도 많이 동행하시어 즐거운 하루가 되었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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