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는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며, 인간의 믿음이나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어린 아이들이 믿음의 고백과 세례를 받지 못했더라도 저주받은 것으로 말할 수 없고, 선택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받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하나님의 선택 교리에 있어서 츠빙글리의 주된 관심은 어떤 사람은 선택되고 유기되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인간의 믿음과 사랑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상을 공격하는 것에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선행을 중요시한 것에 비하여 츠빙글리는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고 본 것이다. 믿음과 사랑은 선택 받은 자의 표지가 되지만 겉모양으로 판단하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알려진 교회에 속한 자들은 자신의 선택 여부를 믿음으로 알 수 있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W. P. 스티븐스는 우리에게 츠빙글리의 예정 교리를 객관적으로 알기 쉽게 전달해주고 있다.
3. 예정
츠빙글리에게 예정이 중요한 것이 되기는 하였지만, 1526년이 되기까지는 독자적인 교리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 이전에는 예정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에 포함되어 있었고, 실제로 그는 섭리를 "말하자면 예정의 어머니" 라고 말하였다.(Z III 842.9-11; Works iii. 271) 이후에 예정과 관련된 (자유의지나 공덕과 같은) 대부분의 주제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라는 맥락에서 다루어졌다.
그러나 1526년 츠빙글리는 세례, 특별히 유아세례에 대한 논쟁에서 선택의 교리를 사용하였다. 『'원죄』(Original Sin)에서 츠빙글리는 구원을 세례와 연결하는 사람들을 공격하였다. 왜냐하면 구원은 "이것이나 저것을 행하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그들은 태어나기 전에 선택되기 때문이다.(Z V 378.2-5; Works ⅱ. 11) 그는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지 않은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방인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자녀 중에서 세례 받지 못한 아이들을 저주받은 사람들로 간주하는 자들을 비판하였다.(마가복음 16:16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우르바누스 레기우스(Urbanus Rhegius)는 츠빙글리가 마가복음 16장의 이 본문을 사용한 데 대해 도전하면서, 히브리서 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에서처럼 구원과 믿음을 연결시키고자 했으며, 츠빙글리 자신도 『신앙조항에 대한 해설』에서 이러한 연결을 했었다.(Z II 426.19-25) 츠빙글리는 이런 본문들은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성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아이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성인들의 경우에 믿음은 선택의 표지이지만, 아이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저주받을 표지는 아니다.(Z VIII 737.7-738.27)
선택의 교리는 츠빙글리가 재세례파를 공격하는 주된 논거가 되었다. 재세례파들이 로마서 9:11-13의 말씀으로 선택의 교리를 츠빙글리와의 논쟁에 먼저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츠빙글리는 믿음의 부재가 반드시 어떤 사람이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1527년 『논박』(Refutation)에서 이 본문을 사용하였다. 야곱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선택된 자들은 자신들이 믿기 전에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츠빙글리는 선택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구원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약화시키거나 제거시킬 수 있다는 위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선택된 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Z VI i. 181.19-22)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예정이나 선택에 대해 가장 끈질기게 다루었으며, 그의 강조점은 유기보다는 선택에 있었다. 비록 선택이 유기를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는 예정이라는 말보다는 선택이라는 말을 선호했다. 더욱이 그는 선택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포괄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말했다. 선택은 하나님의 자비에서 나오고 유기는 하나님의 공의에서 나오는 그런 식이 아니다.(Z VI iii, 150.3-152.12)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고 우리의 행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주장하는 데서, 츠빙글리는 비록 하나님의 속성들을 분리시킬 수는 없지만 선택이 하나님의 지혜에서보다는 하나님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이후의 칼뱅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어떻게 될지를 그 지혜로 미리 아시고 선택하신다는 견해에 반대한 것이다. (Z VI iii, 155.22-165.4) 그런 견해는 선택과 구원을 하나님보다는 인간에게 달린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츠빙글리는 누가 선택을 받았는지 우리가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였다. 이는 이후 개혁교회와 청교도들에게 중요한 주제가 된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츠빙글리에게 있어 우리가 혹은 다른 사람들이 선택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오히려 구원이 우리의 믿음이나 사랑에 달려 있는 것이라는 사상을 공격하는 데 있었다. 그는 믿음과 사랑이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을 우리의 믿음에 근거해서 그리고 우리의 행함과 사랑에 근거해서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어떤 면에서 그는 믿음과 선한 행위의 유무를 사람들이 선택받았는지 아닌지를 분명히 알 수 있게 해주는 증거로 간주하지만, 다른 면에서 그는 겉모습만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여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신앙에 대한 설명』에서 선택을 흠이나 구김살이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알려진 교회라는 상황 안에서 논의하면서, "믿음으로 이 교회의 구성원이 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택되었고 교회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만, 자신들 외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썼다.(Z VI ii, 800.19-35; Jackson 463; Works ⅱ. 43-4) 이런 신중함은 다윗과 십자가 상의 강도의 경우에서처럼 믿는 자도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고백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신앙에 대한 해설』에서는 츠빙글리의 접근이 훨씬 덜 신중하다. 프랑스 왕에게 바치는 헌사에서 그는 천국의 환상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 몇몇 교부들, 선지자들, 사도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왕의 선임자들('루이, 필리프, 페팽')이나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와 같은 비그리스도교인의 이름을 포함시켰다.(S IV 65.26-41; LCC xxiv. 275; Works ⅱ. 272) 비록 츠빙글리가 믿음과 선함에 대해 중요한 언급들을 새로 도입하기는 했지만, 불과 몇 페이지 앞에서 그는 "주의 영이 우리의 믿음과 선택에 대한 확신을 우리에게 주시지만, 다른 사람들의 선택과 믿음은 우리에게 언제나 감추어져 있다."는 자기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였다.(S IV 61.3-6; LCC xxiv. 269; Works ⅱ. 264)
천국에 비그리스도교인도 있다는 언급은 루터를 격분시켰다. 루터에게 그것은 구원과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츠빙글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필연성과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의 죽음의 필연성을 확신하였다. 하지만 그의 신학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만큼) 선택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루터에게서 발견하는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와 말씀과 성례에 대한 색다른 강조 혹은 이해로 이끈다.
하나님의 주권은 츠빙글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지만, 우리가 이제 살펴볼 것처럼,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역할과 말씀과 성례의 역할에 대해서 많은 문제들을 제기하기도 한다.
W. P. 스티븐스 지음, 박경수 옮김,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pp. 90-94.
첫댓글 구원이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면 재세파의 말처럼 어린이나 정신병자는 구원을 못 받겠지요. 그러나 구원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츠빙글리의 내용에 매우 공감이 갑니디다.
맞아요.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츠빙글리가 개혁주의 비조의 한 명인 것을 잘 알려주는 좋은 포스팅입니다.
타락 전 선택설(supralapsarianism, 전택설):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논리적 순서' 라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을 허용하시기 이전에 일부 사람은 선택(election) 하고 나머지는 유기하기로 작정했다는 견해를 고수하는 예정(predestination)에 대한 칼뱅주의적 견해의 하나. 따라서 선택의 작정(decree)은 '타락보다 앞서는 것'이다. 타락 전 선택설에 있어서 강조되는 것은, 이미 창조되어 타락한 인간이 아니라(타락 후 선택설), 창조되지 않고 타락하지도 않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다.
출처: 스탠리 그렌츠 등, 『신학용어사전』(알맹e).
이 내용이 설득력이 있네요.
타락 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 후택설)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복잡한 내용에 대한 칼뱅주의자들 간의 논쟁과 연관된 것으로, 이 입장은, 하나님의 선택(election)에 대한 작정은 논리적으로 인류가 죄로 타락(fall)하는 것을 허용하는 하나님의 작정에 뒤따른다. 즉, 선택의 작정은, 타락을 허용하는 작정 앞에 선택을 두는, 즉 '타락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라 '타락에 뒤따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타락 후 선택받은 자들은, 선택을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서의 예정으로 본다.
출처: 스탠리 그렌츠 등, 『신학용어사전』(알맹e).
같이 참고하면 좋을 만한 칼빈의 예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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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칼빈이 이중예정을 말했어요
칼빈의 기독교강요 3권 21장 제목이
영원한 선택: 하나님은 이로써 어떤 이들은 구원에 이르도록, 또 어떤 이들은 멸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음
https://cafe.daum.net/1107/Y4cZ/29
네, 잘 읽어 보았습니다.
자세히 보지 않고 크게 보면 츠빙글리의 예정론과 비슷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