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19토 등산회 문경(聞慶) 진남교반(鎭南橋畔) 등행 안내
진남교반(鎭南橋畔)은 문경시 마성면(麻城面)의 영강(潁江)을 가로 지르는 진남교 부근의 풍광 좋은 곳을 일컫는다. 즉, ‘호반(湖畔)’이 호수 주변을 의미하듯 ‘교반(橋畔)’은 다리 주변을 뜻한다. ‘진남(鎭南)’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이곳을 쉽게 내줘 정유재란 때 성을 다시 쌓고서 남쪽(倭)을 경계하고 진압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다.진남교반 일대에서 영강은 오정산 자락을 ‘S’자로 크게 휘돌아나가는 물도리동의 태극형상을 띄고 있다. ‘포란형’지형, 일명 ‘삼태기’지형이라는 말을 실감나게 해주는 장소이다. 삼태기모양으로 에워싼 높게 솟은 산의 울창한 숲은 커다란 날개를 가진 닭이 큰 날개를 접으며 알을 품듯 마을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그 아래 강물이 굽이굽이 짙은 녹색의 산 그림자를 품고 유유히 흐르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문경선 철교를 비롯해 신구 교량 6개가 인공과 자연의 입체적 조화로 묘한 매력을 연출하며 영강을 건너고 있다. 이곳은 문경에서 새재를 넘기 전에 나타나는 경치인데 일찍이 과객들 사이에 입소문이 자자했던 명소였다.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33년에 ‘대구일보’가 독자 여론조사를 통해 경북의 경승지 여덟 곳을 선정하여 경북팔경이라 이름 붙였다. 그때 이 진남교반이 경북에서는 으뜸의 제1경으로 꼽혔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북팔경지일(慶北八景之一)’이라 새긴 돌비가 진남휴게소 폭포 왼쪽 암벽에 남아있다.진남교반은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활짝피어 꽃대궐을 이루고 계절 따라 변하는 여러모습으로 문경의 소금강이라 불린다. 오랜 시간 산과 강이 서로를 보듬으며 흘러가는 동안 산이 끝나고 물이 시작되는 곳에 기암절벽들이 만들어졌다.참고로 8경은 1.진남교반(문경) 2.문경새재(문경) 3.주왕산(청송) 4.금오산(구미) 5.청량산(봉화) 6.보경사 청하골12폭포(포항) 7.희방폭포(영주) 8.빙계계곡(의성)의 순인데 문경에 제1경과 제2경이 포진해 있어 그만큼 문경의 풍광이 빼어남을 실증하고 있다.문경은 산과 옛길 그리고 문화재가 산재한 곳으로 관광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특히 지난 2009년 문경새재 입구에 재개관한 ‘옛길박물관’은 길을 테마로 한 국내 최초의 박물관으로 우리 선조들의 옛길 문화가 고스란히 전시되어 문경이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이자 소통의 중심이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토끼비리’ 또한 진남교반을 이루는 풍경 가운데 하나인데, 진남교반을 충분히 맛보려면 ‘고모산성(姑母山城, 石峴城)’에 오르는 것이 순서다. 산성에 오르면 사방으로 탁 트인 풍경에 교반이 시원하게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특히 ‘토끼비리’ 길 병풍 바위에서 조망하는 풍경은 가히 일품이다.
◆ 군사적 격전지 고모산성과 석현성문경은 교통의 요충지인 만큼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일 수밖에 없다. 5세기 신라가 북진정책을 펼치면서 신라의 한강유역 전진기지이자 고구려 백제로부터의 방어용으로 쌓은 성이 고모산성(姑母山城)이다.고모산성을 ‘마고할매성’이라고도 하는데, 총 1,646m에 이르는 산성이다. 조선시대의 관성인 석현성(石峴城) 등의 성곽유적도 남아있다. 한 지역에 이렇게 시대별로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있는 곳은 이곳이 국내에서 유일한 곳이라 하겠다. 고모산성의 정문 노릇을 하는 게 진남문(鎭南門)이며, 그 양 옆으로 날개를 펼친 성곽이 익성(翼城) 역할을 하는 석현성이다. 한쪽은 고모산성, 다른 한쪽은 토끼비리와 잇닿아 있다. 또 산성 입구쪽에는 옛 신라의 고분(古墳)들이 산재하여 있다.석현성은 남쪽으로부터 적의 침공을 막고자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년(1596년)에 처음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길이가 401m로 문헌에 의하면 후삼국시대, 조선시대, 대한제국에 걸쳐 축조를 거듭한 것으로 전해진다.지금의 형태는 남벽 800m 구간에 걸쳐 석현성의 관문인 진남문과 함께 허물어진 것을 문경시가 고증을 거쳐 최대한 옛 돌을 살려 복원한 것이다. 성곽을 따라 오르면 고모산성의 남문에 오르게 되는데, 2004년 발굴조사를 한결과 옹벽시설과 싸움을 할 때 던지기 위한 주먹크기의 강돌을 쌓아놓은 몽돌무치가 발견되었다.고모산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접전지역에 속해 늘 격전을 치렀던 곳으로 고려시대는 견훤과 왕건의 전투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을 거쳐 의병들이 주둔지로 이용했다. 역사적으로 전투를 가장 빈번하게 치룬 산성이었다. 동문지로 이어지는 성벽은 허물어진 그대로 수천 년 전투와 방어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그러나 전해져오는 이야기 가운데는 안타깝고 아쉬운 대목도 없지 않다. 천연요새에 길이 약1.6km, 성벽높이 2~5m, 너비 4~7m규모의 성벽은 사방에서 침입하는 적들을 모두 방어할 수 있도록 높낮이를 맞추어 쌓았음에도,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을 지키는 군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깨춤을 추면서 지나갔다는 야사가 그것이다.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때 왜병이 몇 번의 정찰 후 뜻밖에 지키는 군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춤추고 노래하며 놀다 지나갔다는 대목이 나온다. 신립 장군이 ‘바다의 울돌목’ 같은 이곳을 스스로 버리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쳐 왜군을 맞았다가 전멸한 것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왜 그랬을까? 소설가 김성한이 쓴 ‘7년 전쟁’에는 당시 신립이 데리고 간 병사는 갑자기 모은 오합지졸이었다고 한다. 오랜 평화가 가져온 방심의 결과로 준비된 군사가 없었던 것이다. 새재에 포진을 시켜 두었더니 몰려오는왜군에 겁을 먹고 우거진 수풀을 틈타 모조리 도망가기 바빴다. 할 수 없이 병졸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사방이 훤히 보이는 강변에 진을 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아무튼 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왜군을 그냥 지나게함으로써 한양 함락을 재촉한 점은 두고두고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 후 조선통신사도 이길을 따라 일본을 오갔으며 1896년 의병전쟁시 이강년의 부대와 일본군이 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6.25전란 때도 중요한 방어거점이 되었다.
◆ 고려 개국의 일등 공신 ‘토끼비리’고모성 성곽 끝으로 영남대로 옛길 중 가장 험하다는 ‘토끼비리’가 나온다. 일명 토천(兎遷), 관갑천(串岬遷), 토끼벼루라 부른다. ‘토끼가 낸 길’이라 해서 토천(兎遷), 토끼비리는 토끼벼루의 이 고장 사투리이며 ‘벼루’는 강이나 바닷가의 위험한 낭떠러지를 뜻한다.토끼비리 옛길은 신라시대부터 경상도에서 충청 지방으로 넘어가는 가장 험한 깎아지른 절벽허리에 실낱같이 이어진 벼랑길이다. 그리고 이 험준한 토끼비리를 지나서야 문경새재로 이어진다. 문경새재 길은 사실상 토끼비리 길에서부터 시작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의하면 고려태조 왕건이 견훤과 전투를 벌이며 남하하다 이곳에 이르러 절벽과 강으로 길이 막혀 헤매고 있을 때, 용하게도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는 걸 보고 따라 쫒아 가다보니 벼랑 옆으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길이 있어 빠져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만약 이곳에서 왕건이 토끼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적의 공격에 왕건이 목숨을 잃기라도 했다면 고려가 역사에서처럼 온전하게 개국할 수 있었을까,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그 후 이 길은 ‘영남대로(嶺南大路)’로 이용되었는데 옛길 가운데 원래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부산 동래읍성에서 한양 숭례문을 잇는 조선의 등뼈길이다. 950여 리(380km) 길을 보통 걸어서 보름정도 걸렸다. ‘영남(嶺南)’은 ‘조령(鳥嶺)’ 남쪽지방을 지칭함으로 영남의 시작은 문경에서부터다. 이 토끼비리는 그 길이가 오리가 조금넘는 길지 않은 길이지만 감히 한국의 ‘차마고도’라 할만하다. 토끼비리를 지나간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시가 전한다. 하나같이 위험하고구불구불하고 지나다니기 버겁다는 내용이다.이렇게 힘든 길임에도 이곳을 지나가야만 했던 이유는 토끼비리 외에는 달리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다산 정약용도 “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라고 하였고, 서거정도 “꼬불꼬불 양창자 같은 길이여, 꾸불꾸불 오솔길 기이키도 하여라. 봉우리마다 그 경치도 빼어나서 내 가는 길을 막아 더디게 하네”라고 노래했다. 양촌 권근의 기문에는 “관갑은 가장 험하여 바위벼랑을 따라서 사닥다리 같은 길을 열어 사람과 말이 다니게 하였다. 위에는 깎은 듯한 절벽이고, 아래로는 깊은 골짜기여서 위험하기 짝이 없고 좁디좁은 길이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오싹하게 마음을 졸이어 몇 리를 지난 뒤에야 평탄한 길에 이르게 되고 내를 건너게 되는데 그곳이 개여울이다." 이곳을 통과하고서야 안도의 마음으로 시 한 수를 지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김시습 이황 이율곡 류성룡 김만중 등 수많은 선비들이 이 길을 아슬아슬 가슴 쓸어내리며 건넜다.
◆ 국가 명승 31호 ‘토끼비리’“길이 산을 만나면 고개요, 물을 만나면 나루이다. 산은 하나의 뿌리로부터 수없이 갈라져 나가는 것이요, 물은 본디 다른 근원으로부터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의 말이다. 길은 민족의 발자취이며 역사이고 DNA이다.숱한 세월동안 사람들 발길이 닿은 바닥은 개 콧잔등같이 반질반질하다. 닳고 닳은 돌바닥이 햇살에 빛난다. 발을 내딛기 쉽게 발자국 모양의 움푹 파낸 곳도 눈에 띈다. 폭은 0.3∼1m. 발 한번 삐끗하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진다.실제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죽었다. 과거길 선비들도 예외가 아니다. ‘가마꾼과 마차도 이 길을 오갔다’는 기록도 있지만 흙과 바위가 떨어져나간 탓에 조선후기로 갈수록 길은 좁아졌다. 길에 적분된 시간의 족적과 수많은 사연이 서린 토끼비리 옛길은 그런 역사적 사실과 국내 유일의 잔도라는 이유로 2007년 길 문화재로는 전국 최초로 국가명승에 지정되었다. 문경새재(명승 32호)에 앞선 ‘명승31호’로 말이다.토끼비리 길은 현재 2km 정도가 남아 있다.이 중 1km는 통행금지 구간이다. 개방된 길은 약 6백 미터에 불과하지만 미투리와 짚신이 길 위를 오가며 파놓은 선인들의 흔적들은 절벽길 곳곳에 고스란히 화석처럼 남아있음을 본다. 나머지 길은 사람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자연스레 숲으로 환원됐다.토끼비리는 풍경보다 기억이나 상상력과 만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토끼비리에 대해 문경시는 대대적인 길 보수와 주변정비를 예고하고 있지만 위험한 곳에 목제 데크를 설치하는 등 이외의 물성 개입은 최소화되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