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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rashevsky Circle
Петрашевц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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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린스키와 고골리의 왕복 서한(정확히는 고골리의 저서 『친구들과의 왕복 서한 발췌문』 출간 후 벨린스키가 보낸 공개서한)은 19세기 러시아 지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당시 러시아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건의 배경
니콜라이 고골리는 1847년 신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내용이 담긴 저서 **『친구들과의 왕복 서한 발췌문』**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에서 고골리는 이전에 자신이 신랄하게 비판했던 러시아 정교회와 전제 정치를 옹호하고, 농노제를 정당화하는 듯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이는 고골리의 이전 작품들, 특히 『검찰관』이나 『죽은 혼』 등을 통해 러시아 사회의 부패를 풍자하고 비판했던 진보적 지식인들의 기대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벨린스키의 '고골에게 보내는 편지'
당대 최고의 문학 비평가였던 비사리온 벨린스키는 이 책에 격분하여 고골에게 유명한 '고골에게 보내는 편지'(원래는 편지 형식의 비평문)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는 검열을 피해 해외에서 출판되었으며, 필사본 형태로 러시아 지식인 사회에 널리 퍼져 혁명적 사고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편지에서 벨린스키는 고골리를 다음과 같이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채찍의 설교자이자 반계몽주의와 사악한 탄압의 옹호자".
고골리가 종교와 채찍(억압)의 옹호를 통해 허위와 부도덕을 진리와 미덕으로 포장하려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러시아의 구원은 신비주의나 금욕주의가 아닌, 문명과 계몽, 인간성의 진보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고골의 이전 위대한 작품들을 부인하고 이 책을 쓴 것은 "진리와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결과 및 영향
고골은 벨린스키의 비판에 깊이 낙심했고, 이 사건은 그가 더욱 금욕적인 생활에 몰두하고 결국 『죽은 혼』 2부 원고를 불태우는 비극적인 말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편, 벨린스키의 이 편지는 훗날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공공연하게 낭독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이 서한이 당시 러시아 사회에 미친 영향력과 파급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서한은 러시아 자유주의자와 인텔리겐차의 **'선언문'**으로 여겨졌으며, 문학이 사회 개혁에 봉사해야 한다는 벨린스키의 신념을 확고히 하는 문서로 남았습니다.
Petrashevsky(페트라셰프스키) 사건은 1849년 러시아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집단인 페트라셰프스키(Petrashevsky) 회가 불온한 조직으로 지목되어 체포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유명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를 포함한 23명이 연루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총살 직전에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도스토옙스키의 인생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요 내용
사건의 배경: 1849년, 당시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1세의 통치하에 있던 제정 러시아에서, 서유럽의 신사상에 고취된 젊은 지식인들이 결성한 '페트라셰프스키(Petrashevsky) 회'가 불온한 사회주의 조직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주요 인물: 페트라셰프스키와 함께 도스토옙스키가 이 모임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체포되었습니다.
사건 전개:
1849년, 페트라셰프스키(Petrashevsky) 회와 연루된 23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은 반정부 활동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도스토옙스키를 포함한 피고인들은 총살형 직전에 사형이 집행되지 않고 감형되어 시베리아로 유형 보내지는 것을 면했습니다.
영향
도스토옙스키는 이 사건으로 인해 8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죽음의 집의 기록'과 '백치'의 주인공 므이시킨의 경험은 이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사상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페트라셰프스키, 도스토예프스키
글 : 몰입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사형 언도를 받은 페트라셰프스키는 푸리에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진술하면서 쓴 마지막 글
"나의 진실에 대한 확신은 조금의 동요도 없다. 나를 유죄로 할 수는 있어도 나를 죄인으로 만들 수는 없다.
악당들의 올가미는 교활하다. 그러나 신은 힘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진실 속에 있다.
냉정하게 나는 기다린다.
십자가에서 죽음에 임한 예수의 말이 내 귓전에 울려 퍼지고 있다.
죽음 앞의 평안이 내 마음에 찾아든다."
1821년 11월 1일은 페트라셰프스키(Petrashevsky)가 태어난 날이다.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이틀 늦게 태어났다.
도스토예프스키 아버지와 같이 의사였지만, 그의 아버진 러시아 의학계의 최고 권위자여서,
명문 중에 명문 자제만 들어갈 수 있는 학습원에 들어갔다.
훗날 잠에서 깬 상트페테르부르크 청년들이 그의 집으로 모여 현실 체제 비판 토론을 벌이는데 내부 밀고자(안토넬리)에 의해 1849년 4월 23일 이들이 체포되었다.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고, 대안을 모색한 죄?
이들의 죄를 묻는 자들은 사건의 진상에는 관심이 없다.
여하간 국가에 해를 끼칠 놈들이란 근거가 필요할 뿐!
자기의 생각, 자기의 사상을 이야기했을 뿐..
그 외엔 있지도 않은 무엇을 캐내려는 당국의 가혹한 고문 때문에 동공이 확대되고, 뇌출혈과 광란 상태에 이르기도 했다.
금요일 이모임에, 고문받고, 사형을 언도받은 이들 사이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있었다.
페트라셰프스키(Petrashevsky) 사건을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다.
스물 일곱 살에 쓴 글이라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이병주님의 책 "허망과 진실"에 나와있는 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나는 페트라세프스키(Petrashevsky)에 관해서, 또 그의 집에 금요일마다 드나든 사람들에 관해서 모든 것을 쓰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최초의 신문을 곁들여 생각한 결과 나는 다음의 사항에 관해 명확한 답을 하라는 것으로 결론짓는다.
1. 일반적 인간으로서 또는 정치적 인간으로서 페트라셰프스키가 어떤 인간이냐는 점.
2. 내가 고발한 그 집의 모임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가. 그 모임에 관한 나의 견해.
3. 페트라셰프스키(Petrashevsky) 모임엔 무슨 비밀 목적이 있었던가. 페트라셰프스키는 유해한 인간인가. 또 사회에 대해서 그는 어느 정도로 유해한가.
금요일마다 나는 그의 집을 찾았고 그도 종종 내 집을 찾는 일이 있곤 했지만,
나와 그는 극히 친한 사이라곤 할 수 없다. 내가 그의 집에 자주 드다든 것은
거기에 가면 서로 잘 알기는 하면서도 만날 기회가 없는 그런 친구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를 만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라나 나는 페트라셰프스키(Petrashevsky)를 항상 성실하고 곡심한 인간으로서 존경해왔다.
그가 특이한 사람이란것은 글ㄹ 알고 있는 모두가 말하고 있는 그대로다.
페트라셰프스키(Petrashevsky)는 분별보다 지성이 뛰어나다는 말을 나는 종종 들었다.
그런 그의 기벽을 설명하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항상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단한 독서가여서, 특히 푸리에의 이론 체계에 관해선 세부에 이르기까지 통달하고 있었다
이상이 그에 관해서 내가 아는 전부라고 할 수가 있다.
그의 성격을 안다고 하기엔 나는 너무나 부족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되풀이하거니와 나와 그는 친밀한 사이가 아니다.
정치적 인간으로 보았을 때 나는 그가 일정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할 수 없다.
내가 그에게 인정한 것은 하나의 이론 체계에 대한 일관성이다.
그것도 자기의 이론 체계가 아니고 푸리에의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푸리에의 이론 체계를 그대로 우리 나라의 사회 생활에 적용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진 않는다.
이 점만은 단언할 수가 있다.
그의 집에 금요일마다 모이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그의 친구였다.
가끔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긴 했지만 그건 드문 예에 속한다.
거기선 갖가지 의견이 나오기도 했는데 나는 한 번도 의견의 일치가 있었던 것을 본 적이 없다.
페트라셰프스키의 모임엔 어떠한 의견의 일치도, 하나의 경향도, 항차 공통 목적 같은 것도 없었다.
어느 문제를 두고 세 사람 이상이 같은 의견을 갖는 예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항상 토론이 치열했고 견해의 대립이 있었다.
나도 이러한 토론에 종종 참가했다.
그러나 무슨 까닭으로 그러한 토론이 생기고, 그 토론에 내가 참가했는가를 말하기 전에,
나의 죄상으로 되어 있는 사실에 대해서 몇 마디 하고자 한다.
나의 죄상은 페트라셰프스키의 집에서 토론에 참여하여 자유주의적인 발언을 하고
문한 논문 "벨린스키와 고골리의 왕복 서한"을 읽었다는 것으로 되어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자유주의, 또한 리버럴리스트란 말을 정의하는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 법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머리가 아프다"고 한 소리를 위법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못할 소리가 없게 지껄이는 사람들도 보았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는가. 내가 페트라셰프스키의 집에서 얘길 한 건 꼭 세번이었다.
두 번은 문학에 관한 얘기였고 한 번은 개인의 에고이즘에 관한 얘기였다.
내 말 가운데 정치적인 내용이 있었는지, 자유주읮거인 것이 있었는지는 지금 기억할 순 없다.
그러나 내게 대한 비난이 어쩌다 귀에 담은 조각조각의 말을 종이쪽지에 적어놓은 밀고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전후의 관계를 생각지도 않고, 어떠한 의도로 누구를 상대로 말한 것인지도 개의치도 않고,
남의 말을 훔쳐듣고 조각조각의 말을 임의대로 엮어 그것을 토대로 남을 비난하려는 노릇처럼 위험한 짓은 없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따위 비난 같은 것은 겁내지 않는다.
가령 보다 나은 것을 바라는 마음이 자유주의라고 한다면 그런 뜻으로서 나는 자유주의자다.
조국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아직 한 번도 조국에 대해 죄 지은 적이 없다는 자각을 마음속에서 발견한 까닭에,
내게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있고 조국에 대해 선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유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다는 똑같은 의미로 나는 자유주의자다.
내가 미움과 분노를 자아내어 폭력적, 혁명적 변화를 바라고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제시해 봐라.
그러나 나는 그런 죄중 따위를 겁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어떤 밀고도 내게서 무엇 하나 빼앗을 수 없고 보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밀고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다른 나로 바꿀 순 없다.
다른 사람이 침묵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런 화제에 관해 내가 말했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자유주의를 증명한단 말인가.
나는 이러한 사고방식이야말로 정부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분함을 금할 수가 없다.
왜 바르게 살고 바르게 행동하려는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겁내야 하며,
그 때문에 자기의 입장을 걱정해야 하는가. 법이 개인을 보호하지 않기 때문에,
한마디 오해를 받는 말로써 패가망신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있게 된 것이 아닌가
나는 모든 사람이 정부에 대해서 솔직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나는 슬픈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이지만 우리들은 왠지 본능적으로 무엇인가를 겁내고 있다.
공공 장소에 모이기만 하면 서로를 불신하는 눈초리로 보고 괜히 주변을 살피곤 한다.
어쩌다 정치 얘기를 꺼낼 때면 공화제 같은 건 그 인간의 사상으로선 프랑스보다도 먼 곳에 있는 화제인데도 불구하고
반드시 소리를 낮추어 비밀스럽게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필요 이상의 침묵과 공포는 우리들의 생활을 어둡게 칠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정부를 신경질적으로 만들고 거꾸로 민중을 불안하게 하는 작용으로 이어진다.
한자락의 바람에 흔들리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무의식의 신념보다는 의식적인 신념이 훌륭하고 튼튼하다는 것을 나는 믿어왔다.
그런데 침묵하고 있어선 의식이 형성될 까닭도 없고 생명을 가질 수도 업다.
부득이 사람과의 교류를 피해 소그룹으로 세분화되든지 고독 속에서 무감동한 존재로 굳어버리든지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태는 누구의 죄인가. 우리들 자신의 죄다.
나는 항상 이렇게 생각해왔다.
나 자신은 열변가가 아니다. 나는 극히 적은 수가 모인 자리에서도 오래 얘기하길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친구는 극히 적다.
내 시간의 반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 때문에 쓰인다.
나머지 반은 병든 지 3년이나 되는 우울증의 발작으로 채워진다.
독서할 시간, 세상 일을 알기 위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세상 일반의 관례라고 할 수 있는 침묵과 도회의 방식을 어기고 무엇인가를 썼든가, 말했은가 했아면
그것은 나 자신을 지킬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나의 신념을 토로할 목적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무슨 까닭으로 무엇에 대해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일까.
정치에 관해서 서구에 관해서 검열에 관해서 내가 한 말이 못마땅하다는 얘길까.
그런데 오늘날 그러한 문제를 두고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만일 내게 나 개인적인 의견을 말할 권리가 없고, 그 자체가 권위가 되어 있는 듯한 의견에 반대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하면,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배우고 학문에 의한 지식욕을 소중히 하고 있었단 말이낙.
나는 우리나라의 검열이 지금에 와서 무법할 정도로 가혹하다고 말하기도 했고 한탄도 했다.
그 까닭은 이러한 검열 때문에 엉뚱한 오해가 생겨 그것이 문학에 있어서 아주 곤란한 무질서의 원인이 되어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현대에 있어서 작가의 사명은 부당한 혐의로 인해 손상을 받고 있다.
검열자는 작가가 무엇으 ㄹ스기도 전에 당연한 정부의 적처럼 작가를 취급하고 노골적인 편견으로 원고를 분석하려고 든다.
이런 일이 나는 슬펐다.
내용에 아무런 나쁜 점도 없는데 작품의 결말이 비극적이란 바로 그 점만으로 어떤 작품의 발표를 금지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은
내게 있어선 너무나 슬펐다. 내가 이민 쓴 작품을 검토해 보라. 그것이 검열데 제출되기 전의 원고를 보라.
도덕과 질서에 반한 말이 단 한 단어라도 있었으면 그걸 지적해 주기 바란다.
그런데 나는 너무나 어두은 색채로 정경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작품 발표를 금지당한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
발표가 금지된 작품의 저자가 얼마나 암담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가는 아마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 작가는 실업보다더 더 나쁜 상태에 석 달 동안이나 놓이게 된다.
그러나 먹고살아야 하니까 궁핍과 슬픔과 절망 속에서 밝고 아름다운 장밋빛 빛깔로 새로운 문학 작품을 쓸 시간을 억지로 만들어내야만 한다.
이런 소릴 한다고 해서 내가 위험 사상의 소유자인가.
문학은 아무리 얕잡아도 국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긴장된 정황 속에서 문학이 존속하기란 어렵다.
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말살될 지경에 있다.
현재와 같은 검열 하에선 그리보예도프도, 본비진도, 푸슈킨 같은 작가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문학이 조소하는 건 악덕이다. 특히 선의 가면을 쓴 악이다.
그런데 현재 조소가 가능한가. 검열관은 기를 쓰고 작가가 특정한 인물, 또는 질서를 빈정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설펴 댄다.
그들은 무해한 문장 속에서까지 어떤 악의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리고는 있지도 않은 위험 사상을 상상으로 만들어내선 한 작가의 고심한 결과인 작품을 그의 환각과 더불어 매장해 버린다.
악덕과 인생의 어두운 면을 은폐함으로써 악덕과 인생의 어두운 면의 존재를
독자의 눈으로부터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작가란 어두운 면까지를 제시하고 자신이 독자에 대해 불성실하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
밝은 빛깔만으로는 그림이 되지 않는다.
어두운 면 없인 밝은 면이 나타날 까닭이 없다.
빛과 그늘이 혼재되어 있지 않는 그림이 있겠는가.
덕과 선만을 그리라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악덕이 없으면 선은 없다.
선악은 동거하고 있는 게 보통이다.
나는 악덕과 인생의 어두운 면만으로 묘사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의 가능성을 얘기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문학과 검열 사이에 오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오해는 하루바삐 해소되어야 한다는 얘길 친구들 사이헤서 했다.
이것이 위험한 소유자란 증거가 될 수 있는가.
나는 페트라혜프스키의 모임에서 "벨린스키와 고골리의 왕복서한"을 읽었다고 해서 비난를 받고 있다.
그 사실이 내가 저지른 죄상 가운데 끼어있다.
나는 그 편지를 읽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문학적 기념비로서 읽은 것이지 청중을 유혹할 목적으로 읽은 것은 아니다.
문학에 대한 깊은 조예로써 씌어진 논문으로 해서 많은 사람둘의 존경을 받고 있는,
그리고 이미 작고한 걸출한 인물에 대한 존경심으로 나는 일체의 평론을 섞지 않고,
그 왕복서한의 전문을 읽은 것이다.
그 모임에 무슨 비밀의 목적이 있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그 의론백출(議論百黜)의 상태, 갖가지의 개념,
개성이 혼돈스럽게 뒤섞인 상태를 설명함으로써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한다.
나는 그 혼돈 상태 속에 무슨 비밀 목적이 있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오해가 아니란 자신도 있다.
드디어 최후의 질문에 답할 차례가 되었다. 페트라셰프스키 자신이 유해한 인물인가. 유해했다면 어느 정도로 유해했는가의 질문이다.
첫째 페트라셰프스키를 유해한 인물이라고 할땐 그가 푸리에주의자이기 때문에 유해하다고 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나는 해석한다.
페트라셰프스키가 푸리에의 이론 체계를 존중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푸리에주의자로서 그가 사람들의 공명을 바라지 않았을 까닭은 없다.
그러나 그가 자기 사사을 보급하기 위해 추종자를 만드는 등 노력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나는 그런 일은 전연 모른다고 할밖엔 없다.
그는 학교의 교사를 모임에 끌어들여 그들을 통해서 푸리에주의를 보급하려고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이것 역시 모른다고 할밖엔 없다. 그의 지인 가운데 토오리라고 하는 교사가 있었다고 최근에 들었지만
토오리에 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또 야스트로 젬프스키란 교사가 있었지만 그가 교사라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정치 경제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때였다.
이밖엔 페트라셰프스키의 지인 가운데 교사가 있었다는 소린 듣지 못했다.
내가 판단하건대 야스트트젬프스키는 최신학파의 순수한 경제학자이며 엄격한 경제학 교수들이 인정하고 있는 정도록 사회주의를 인정하고
있지 않았나 한다. 사회주의는 나름대로의 비판적 연구와 통계 부문에 의해 많은 학문적 이익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야스트로젬프스키는 푸리에주의자가 아니었고, 따라서 페트라셰프스키에게 새삼스럽게 배울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추측으로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신문관으로부터 그때까지 그 존재조차 몰랐던 원고를 제시 받았다.
그 일절엔 푸리에주의의 승리를 열렬하게 희망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만일 원고 전체가 전부 그런 내용이고 그것을 페트라셰프스키가 쓴 것이라면 당연히 그가 실제적으로 무슨
수단을 강구하고 있었던가 하는 문제에 관해선 아연 나는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의 비밀을 모른다.
나와 페트라셰프시키가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내가 그를 금요일마다 방문한 지인의 하나로서였지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의 계획도 모르고 그 원고를 본 것도 처음이고 그 내용도 아까 들먹인 그 일절 이외엔 전연 아는 바가 없다.
그러니 가그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무슨 수단을 강구하고 있었는가에 관해선 전혀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나 자신의 판단을 말해보겠다.
이 판단은 내 확신에 바탕을 둔 것이며, 깊은 생각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이러한 판단 때문에 페트라셰프시키의 죄상에 과한 최초의 심문엔 확실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책이라든가 원고 또는 단편적으로 기록된 대화라든가 하는 증거물은 페트라셰프스키를 재판하는 사람의 눈엔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나는 안다. 그러나 나는 페트라셰프스키에 관해 질문을 ㅂ다은 이상 이 사건 전체에 대한 나의 견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와 벨린스키는 한때 아주 친한 사이였다. 그는 인간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그러나 그를 무덤으로 끌고 간 병이 그의 내부의 인간까지 왜곡해버렸다.
병은 그의 마음을 황폐화하가고 냉혹하게 하고 마음에 분노를 쏟아 넣었다.
긴장된 채 혼란을 일으킨 그의 상상력은 모든 것을 거대한 규모로 과장하고 그에게만 보이는 사물을 보이게 했다.
건강할 때 흔적조차 없었던 결점과 단점이 갑자기 나타났다.
극도로 신경질적이 되기도 하고 터무니엇는 자존심을 부리기도 했다.
그가 동인으로 되어 있던 잡지의 편집인들은 그에게 중요한 문제를 다룬 논문을 쓰지 못하도록 제동을 걸기조차 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는 고골리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나와 벨린스키와의 결렬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다.
불화의 원인은 문학의 방법에 대한 의견의 대립이었다.
나는 그가 문학의 본질과는 어긋난 사명을 주장하는 점을 공격했다.
그는 문학을 산문 기사적인 사실과 스캔들적인 사실의 묘사로 끌어내리려고 했다.
나는 분노만으로사람을 설득하지 못한다는 것과, 길 가는 사람을 붙들어 세워 아무리 설법을 해보았자
모멸만을 살 뿐, 보람이 없을 것이라고 논박했다.
벨린스키는 성을 냈다. 때문에 우리는 그가 죽기 1년 전엔 서로 얼굴을 대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고골리와의 왕복 서한은 내 눈으로 보면 기막힌 문학적 기념비였다.
페트라셰프스키는 푸리에를 믿고 있다.
푸리에주의는 평화적인 이론의 체계다.
그것은 그 우아함으로 사람의 마음을 매료하고 인류애로 사람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 인류애는 푸리에가 자기의 이론 체계를 엮어내어 그 정연한 조화로 사람들의 지성을 감탄시켰을 때
그의 마음에 정열의 불길로 화한 것이다.
그것은 노여움에 찬 공격에 의해서가 아니로, 인류에 대한 애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자는다.
이 이론 체계엔 증오란 없다. 푸리에주의는 정치적 개혁을 의도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경제적인 개혁이다. 그리고 그 개혁의 의도는 정부에 대해서도,
사유재산에 대해서도 위험한 건 어니다.
프랑스의회에서의 최근의 회의에서 푸리에주의자의 대표자인 빅토르 콘시데랑은 푸리에주의가
족벌, 문벌에 대해 추호도 위험스런 점이 없다는 것을 당당하게 주장했다.
결국 푸리에주의튼 탁상의 이론 체계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대중적인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저 2월혁명의 변혁기에 있어서도 푸리에주의자는 한 번도 가두에 나온 적이 없고
이미 20년 동안 팔랑지(공동생활촌)의 미래를 꿈꾸며 시간을 소비해 왔던 그들의 잡지 팔랑지의 편집부 내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이론체계는 모든 이론이 위험하다는 뜻으로선 위험하다.
그리고 이 이론 체계는 그것이 제아무리 세련되어 있건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 사상에 불과하다.
이 유토피아 사상에 무슨 해독이 있다면 그것은 공포의 대상이라기 보다 희극적인 것이다.
서구에 있어선 푸리에의 이론 체계처럼 놀림감이 되고 조소의 대상이 된 사회 사상은 달리 없다.
아득한 옛날 그 사상은 이미 생명을 잃고 있었는데
그 지도자들은 살아있는 시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 특히 프랑스에선 지금 이순간 모든 이론 체계가 위험한 것으로 되어 있다.
굶주린 프롤레타리아가 절망적으로 설치며 어떤 사상이라도 그것을 수단으로 해서 반란의 깃발을 만들려 하고 있는 정세이다.
그땅은 지금 극한의 순간에 있다.
굶주림이 사람들을 가두로 내모든 것이다.
그런데도 푸리에주의는 깨끗이 무시를 당하고 있는 형편이며,
우열하기 작이없는 카베의 유토피아 사상조차 푸리에주의 이상의 공감을 얻고 있는 정도이다.
우리 러시아,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정을 말하면 거리를 20보만 걸아도 푸리에주의가 우리들의 토양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책 속에나, 세상 모르는 몽상 속에나, 24편으로 된 서사시 같은 시 속에나 끼어 있을 정도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푸리에주의가 심각한 해독을 초래할 까닭이 없다.
첫째 그걳의 보급 자체가 유토피아에 속하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믿기 어려울 만큼 그 사상이 유장한 까닭이다.
푸리에주의는 완전한 하나의 학문이어서 그것을 이해하려면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고 그렇게 하변 열 권 이상의 책을 독파해야 한다.
이러한 이론 체계가 언제 일반적인 것으로 될 수 있을까. 교사들을 통해 교단에서 보급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푸리에의 학설 규모로 봐서 우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되풀이하거니와 내 생각으론 푸리에의 이론 체계가 무언가애 해독이 될 까닭도 없고, 설령 해독이 된다고 하면 그런 사상을 가진
자기 자신에 대해서뿐일 것으로 안다. 이건 또한 양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내가 그것을 최고의 희극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상이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푸리에주의를 비롯한 석의 이론 체계는 우리 나라의 토양에는 맞지 않고
우리 민족의 성격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서구의 사상이란 결국 그러한 정도의 것이며 프롤레타리아의 문제와 어느 정도의 대응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존재하지 않는 현재의 우리 나라로서는 푸리에주의의 필연성이나 그 영향력은 말할 나위조차 없이
미소한 것이며 희극적인 의미 이상의 것은 아니다.
그런데 페트라셰프스키는 내가 짐작하기로는 현명한 사람이다.
그런 현명한 사람이 이와 같은 사정을 모를 까닭이 없으니 나는 페트라셰프스키를 서재 안에서만 푸리에를 존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페트라셰프스키가 어느 정도 이상으로 푸리에주의자였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가 없다.
만일 그렇게 않았더라도 나는 그를 불행하긴 하지만 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에선 근 1년간 거의 모든 이론 체계가 차례로 붕괴했다.
간단한 실험적 사건에 부딪치자마자 제풀에 넘어져버린 것이다.
이것은 또한 무른 이론 체계라는 것이 지니고 있는 본연적인 취약성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사정을 종합해서 생각하면 페트라셰스프키가 어떠한 조소라도 감수하면서까지 설혹 그가 푸리에주의를 선전
보급하기에 애섰다고 해도(그럴 리는 만무하지만) 그가 유해한 인간이라거나 유해한 짓을 했다거나 하는 말을 나는 할 수가 없다.
첫째 푸리에주의를 선전한 페트라셰프스키가 어째서 나쁘단 말인가 그것이 어떻게 위험하단 말인가.
이런 판단은 나의 이해를 넘는다. 페트라셰프스키가 정녕 푸리에주의의 선전을 했다고 해도 비록 그것은
희극적인 일은 될망정 유해한 짓, 위험한 행동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그의 해독을 결단코 믿지 않는다. 믿을 수가 없다.
이상이 내게 주어진 질문에 대한 나의 양심적인 대답의 전부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내 마음에 하나의 판단이 생겨났기 때문에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오래 전부터 페트라셰프스키가 모종의 자존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 자존심 때문에 그는 금요일마다 자택에 사람을 모았고,
그 자존심 때문에 그 모임을 지속해 왔다.
그리고 그 자존심으로 해서 그는 많은 양의 장서를 갖고 있었고,
진귀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친구들이 알아주는 것을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나의 관찰과 추측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되풀이하거니와 페트라셰프스키에 관해서 내가 알고 있는 부는 충분한 것도, 완전한 것도 아니다.
내 견문에 바탕을 둔 추측일 뿐이다.
이상이 나의 답변이다. 나는 진실을 전했다.
페트라셰프스키와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슬아슬하게 사형을 피했다.
이후 페트라셰프스키는 노역과 유형지에서 고생을 한 1866년 12월 8일. 45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자신의 죽음보다 동료의 죽음을 걱정했던 특별히 도스토예프스키는 전도유망한 작가라고 안타까워했었는데,
과연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지지리도 가난하고, 아프고, 고생하면서.. 페트라셰프스키보다 15년을 더 살았지만, 그의 삶 역시 불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