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양란의 여행 인문학] (9)
저승의 왕 하데스,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다
신양란
로마를 여행하며 빠뜨리면 참 아까운 곳인데, 방문하기는 또 만만치 않은 곳이 보르게세 미술관이다. 그곳에 소장된 주옥같은 예술 작품들을 생각한다면 만사 제쳐놓고 찾아가는 게 맞는데, 예약하지 않고는 입장 자체가 불가하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미술관을 예약제로 운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순하다. 너무나 귀중한 보물 창고라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지만, 미술관의 규모가 작아 도저히 그들을 다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년 재위)를 배출한 보르게세 가문의 카파렐리 보르게세 추기경은 문화 예술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고 한다. 그가 생전에 수집했던 방대한 컬렉션을 그의 저택에 전시한 것이 바로 보르게세 미술관이다. 개인의 저택이었으니 다른 박물관들에 비해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르게세 미술관은 유명세로 보나, 소장된 작품들의 가치로 보나, 로마를 대표하는 미술관이 분명하다. 다만 규모가 작다 보니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이곳의 1층에는 조각 작품이, 2층에는 회화 작품이 주로 전시되고 있는데, 오늘은 그 가운데 조각 작품 한 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바로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하데스>이다.
바로크 미술의 거장인 잔 로렌초 베르니니는 로마를 여행하며 여러 군데서 그 이름을 들을 수 있는 유명한 미술가이자 건축가이다.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하데스>는 그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걸작이다. 밀가루 반죽으로 빚은 듯한 매끄러운 살결 표현을 보라.
저승의 왕 하데스가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장면은 미술가들이 좋아한 주제여서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 조각 작품은 보르게세 미술관에 있는 이 작품이 최고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저승의 왕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장면은 여러 예술가들이 사랑한 주제였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조각 작품과 비교하며 감상해 보자.
자, 그러면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한 까닭은 무엇이며, 그 일이 인간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자.
매우 사랑스러운 소녀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와 데메테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우스와 데메테르가 친남매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어찌 그런 망측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흥분할 일은 아니다. 이건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니까.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 넘어가자. 안 그러면 하데스가 조카딸인 페르세포네한테 반한 이야기에도 탄식이 터질 테니까. 제우스와 데메테르, 하데스는 친남매간이니, 인간 세상의 잣대로는 도무지 이해해 주기 어려운 일이긴 하다.
하여간 어느 날 풀밭에서 꽃을 꺾으며 노는 페르세포네를 본 하데스는 한눈에 반하고 만다.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은 하데스는 친누이인 데메테르에게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데메테르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저승이 어떤 곳인가. 죽은 영혼만이 갈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니 아무리 신이라 해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인데, 딸이 그곳으로 시집간다는 것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의미이다. 데메테르로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외동딸을 저승의 왕에게 시집보낼 수 없었다.
그러면 거절당한 하데스가 ‘아, 데메테르가 허락하지 않으니 할 수 없구나. 포기해야지.’ 했을까. 아니다. 그냥 납치해서 저승으로 데려가 버리고 만다. 그 순간을 포착한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작품이 보르게세 미술관에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딸을 잃어버린 데메테르는 온 세상을 헤매며 딸을 찾는다. 그녀는 세상 모든 만물에게 “내 딸의 행방을 혹시 아느냐?”고 묻지만,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 하데스가 “입을 여는 자는 곧 내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저승의 왕의 백성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겠는가. 죽는다는 뜻이지. 그래서 다들 입을 꾹 다물어버리자, 분노한 데메테르는 악에 바쳐 선언한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열심히 그대들을 돌보았는가. 그런데도 그대들은 내 딸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면서도 내게 말해주지 않으니, 이제부터 나도 그대들을 버리겠다.”
그러자 세상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외면한 세상의 초목은 다 말라 죽었고, 당연히 풀을 먹고 사는 동물들도 생명을 지킬 수 없었다.
그 꼴을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샘의 요정 아레투사가 데메테르에게 자신이 본 것을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하데스가 납치해서 저승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비로소 하데스의 짓임을 알게 되었지만, 데메테르는 당장 저승으로 쳐들어가서 딸을 데려오고 싶은 마음을 눌려야만 했다. 저승은 여신인 데메테르조차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데메테르는 제우스를 찾아가 난리를 친다. “페르세포네가 내 딸이기만 하냐. 당신 딸이기도 하지 않느냐? 당장 데려오라.”
딸이 저승으로 납치되어 간 것을 알게 된 데메테르는 제우스를 찾아가 딸을 되찾을 수 있게 하라고 압박한다. 그녀의 손에 들린 횃불은 딸을 찾아 헤맬 때 썼던 물건으로, 그녀의 상징물이다.
딸을 잃은 어미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던 제우스는 할 수 없이 전령신 헤르메스(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저승을 드나들 수 있는 제우스의 심부름꾼)를 하데스에게 보낸다.
비록 막냇동생이긴 하지만, 신 중의 으뜸 신인 제우스의 명을 하데스는 거부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페르세포네를 돌려보내기로 하면서, 약간의 꼼수를 쓴다. 이승까지의 머나먼 길을 가는데 어찌 빈속으로 갈 수 있겠냐며, 이런저런 음식을 페르세포네에게 권한 것이다. 한시바삐 어머니 품으로 돌아갈 생각에 마음이 급했던 페르세포네는 다른 음식은 다 사양하면서 오직 석류알 세 개를 먹었다고 한다.
하데스가 권한 석류를 들고 있는 페르세포네. 그녀는 그중에서 세 알을 먹었다고 하는데, 그게 문제가 될 줄은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페르세포네는 모르고 먹었겠지만, 저승의 음식을 먹은 자는 저승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저승의 원칙이었다. 다만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의 명으로 돌아가야 했으니 아주 붙잡아 둘 수는 없는 일이라, 그녀가 먹은 석류알 하나당 한 달씩, 도합 석 달은 저승에서 지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저승을 벗어나 이승으로 돌아온 딸 페르세포네를 맞는 데메테르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죽이나 기쁜지 그림에서도 그녀의 심정이 생생히 느껴진다.
제우스의 전령신 헤르메스의 안내를 받아 이승으로 돌아오는 페르세포네를 어머니 데메테르가 두 팔 벌려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남았다. 하데스의 권유로 먹은 저승의 석류알 세 개. 그것 때문에 페르세포네는 일 년 중 석 달은 저승에서 지내야만 했다.
데메테르는 딸이 곁에 있는 아홉 달은 너무 기쁘고 신나서 대지의 모든 것들을 성심성의껏 돌본다. 그러니 세상엔 풍요로움이 넘치게 된다. 이때를 인간들은 봄, 여름, 가을이라고 한다.
딸이 곁에 있는 아홉 달 동안, 데메테르는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일해 대지를 풍요롭게 만든다. 그녀가 들고 있는 풍요의 뿔은 풍요로움의 상징이다.
그러나 페르세포네는 석 달간 어머니 데메테르의 곁을 떠나 저승에서 하데스와 함께 지내야 한다. 이때 데메테르는 슬픔에 잠긴 채 모든 의욕을 잃고, 일손을 놓아버린다. 데메테르가 일하지 않는 이 기간 동안, 대지는 아무것도 살 수 없는 황폐한 땅으로 변한다. 겨울이 되는 것이다.
딸이 저승에 가 있는 석 달 동안, 슬픔에 잠긴 데메테르는 딸을 그리워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은 황량한 황무지로 변하는데, 이때가 겨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네 계절이 생긴 연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한 일로부터 계절이 생겨났다고.
보르게세 미술관의 기막히게 멋진 조각 작품은 그 대단한 사건의 단초를 보여주니, 알면서 보면 더 재미있지 않은가.
신양란 시인
신양란 시인 여행작가
인생 전반전을 대한민국의 국어 교사로 살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교단을 떠났다. 인생 후반전에는 하고 싶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만 하면서 살 계획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우주를 통째로 선물로 받는다고 생각한다. 너무 크고 넓어서 내가 받은 선물을 가늠도 못 하면서 살지만, 지구별만이라도 속속들이 다 살펴본 다음에 반납하고 싶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아다니다가 알게 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독자들과 나누며 사는 것이 여행 작가로서의 꿈이다.
[출처] [신양란의 여행 인문학] (9) <저승의 왕 하데스,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다> ♣ 웹진 《문예마루》 제6호(2026. 4)|작성자 문예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