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군 부안읍 선운리에 있는 미당문학관을 가기 전 날. 전국적인 눈 소식이 있었다. 문학기행 날짜가 연기될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흐릿한 아침을 맞았다. 그대로 출발하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고 문학회 회원들과 함께 출발했다. 다들 오랜만의 문학기행이라 들뜬 기분으로 수다를 떨며 간식을 먹으며 바깥 경치를 구경하였다. 먼 산의 능선과 골짜기에 눈이 남아 있는 곳과 없는 곳을 보며 어느덧 경상도를 지나 전라도로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를 이끄시는 황선생님께서 미당시문학관에 도착하기 전에 예비적인 지식으로 서정주 시인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먼저 대표시인 「국화 옆에서」가, '앞에서'였다면 명시가 되지 못했을 거라 설명하신다. 시는 글자 한자 한 자를 고민해야하는 것을 느꼈다. 또 서정주 시인께서는 자화상을 23세에 쓰셨다. 가난한 집에서 외할머니 품에서 자라셨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동학 난이 일어나던 해에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의 성품은 호걸스러웠다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의 팔 할이 바람인 것은 세상의 모든 자기를 바라보는 어려운 과정들이 자기를 시인으로 만들었다고 하셨다.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는 외할아버지의 자손이기 때문에 죄인처럼 항변도 못하는 모습을 느꼈다. '애비는 종이었다.' 아버지는 소작농이었고 경멸스런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항변도 못했다. 이승만이나 박정희 전두환을 찬양한 시를 쓰신 일에 대하여 제자인 소설가 조정래가 과거 행적에 대해 사과를 요구 했지만 거절하셨던 일도 있다. 문정희 시인은 말하고 있다. 독재자조차 훔쳐가고 싶었던 그의 시라고. 시인께서는 부인과 사이는 좋은 편이셨지만 주변에 여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묘령의 여인을 찾아 충주까지 직접 찾아오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문학관을 둘러보던 중 '우리시의 모태 미당의 예술성' 코너에 꽃으로 유명하신 김춘수 시인의 어록에도 미당의 시로 그의 처신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 미당의 처신으로 그의 시를 폄하 할 수도 없다. 처신은 처신이고 시는 시다를 눈여겨보게 된다. 너무나도 유명한 <국화 옆에서>를 읽어 보았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운 마음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위대한 대시인은 아무렇게나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대시인을 키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우는 것이다. ‘시는 어느 색도 물들일 수 있고 어느 색도 지울 수 있는 백색의 염료다. 그리고 아름다운 시가 녹이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분노도 어떤 원한도 시는 용액처럼 녹인다. 김성우 전 한국일보 주필께서 하신 말씀이다. 미당시문학관으로 들어서니 긴치마 정장의 단아해 보이는 중년의 여성해설사 분이 맞이해 주신다. 우리는 그분과 서정주 시인께서 친필로 쓰신 「선운사 동구」시 액자 앞에 섰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동백은 필 때 보다 떨어질 때가 더 아름답다고 하더니 이 시의 사연을 들어보니 애잔함이 가슴에 남는다. 서정주 시인께서 서울로 올라가실 때가 되어 나룻배를 타고 선운사 입구까지 나온 다음 십리를 걸어서 버스를 타려고 하니 목이 컬컬해서 주막을 찾았다. 뜻밖에도 주모가 절색이었다. 더군다나 권주가를 부르는 육자배기 가락이 보통의 소리가 아니었다. 서정주 시인께서는 주모의 미모에 취하고 노랫가락에 취하고 막걸리에 취했다. 꿈같은 시간을 보낸 후, 그 주모는 내년에 동백이 필 무렵에 다시 한 번 들러 주십사하고 작별하였다. 그러나 그 약속은 20년이 지난 다음에 지키게 되었으나 그 주모는 애석하게도 육이오 때 학살당하고 집은 빨치산들이 불태워버렸으니 주막도 주모도 온데간데없었다. 그 사연을 들은 서정주 시인은 서글픈 마음에 이 시를 쓰셨다. 서정주 시인의 어린 시절에 외가도 가까이 있어서 외할머니의 영향도 많이 받으셨다. 입담이 좋으셔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와 옛날이야기를 늘 실감나게 해주셨다. 서정주 시인께서는 외할머니의 이야기 속에 상상을 품고 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더 넓은 세상을 꿈꾸셨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스물네 살 무렵에 청상이 되셨다. 바다로 나갔던 외할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바닷가에서 바람 쐬기를 좋아하셨다. 바닷가 해안에 집이 있는 관계로 크고 작은 파도가 수시로 덮쳤다, 외할머니는 얼굴에 튀어온 바닷물을 반기며 파도가 지나간 자리를 쓸고 닦으시며 볼이 발그레 지도록 좋아하셨다. 그것은 외할아버지가 찾아 온 것으로 느끼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시적 감수성도 이런 외할머니의 영향이 컷다고 할 수 있다. 전시관 안을 둘러보니 1층에는 서정주 시인의 연대기를 비롯하여 대표시집, 육필원고, 단란했던 가족사진, 지인들과의 사진, 금관 문화훈장, 후배 문인들의 찬사로 가득 찬 글귀들, 위층으로 올라가니 생전에 아끼던 책이며 모자, 파이프, 나비넥타이, 성경책 그밖에 펜들의 편지도 있었다. 5층에 있는 전망대로 갔다. 앞으로는 바다와 곰소만이 오른편에는 서정주 시인이 잠들어 계셨다. 왼편에는 생가가 보였고 뒤로는 소요산의 소요봉과 문필봉이 미당 시문학관을 감싸고 있었다. 시인께서 찍으신 사진 중에 달 항아리를 귀에 대고 있는 장면이 있다. 그 속에서 우주의 소리를 들으려 하심일 게다. 이어령 문학평론가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미당 선생의 죽음을 죽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언어는 이제 바다의 것, 하늘의 것, 우주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대시인의 한 편의 고운시를 또 적어 본다.
동천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문학관 관람을 끝내고 마이산으로 이동하기 위해 차에 올랐다. 비인지 눈인지 모를 것들이 차 유리 앞면에 와서 붙는다. 눈송이가 점점 커져만 간다. 잿빛 하늘에서 점선을 그으며 내려오다 바람과 함께 노닌다. 소리를 내어 읊어야 비로소 그 깊은 맛이 난다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청각적 이미지의 동적 아름다움을 음미 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