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찾아야 하는 진리는 변화 속에 숨은 불변의 규칙이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대전제가 필요하다. 불변한다면 진리는 필요없다. 제멋대로 변화한다면 역시 진리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이용할 수 없는 진리라면 진리가 없는 것과 같다. 통제할 수 없는 변화는 의미가 없다.
세상은 변한다. 변화가 없다면 우리의 존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변화다. 시간은 변화를 설명하는데 쓰이는 말이다. 변화의 부정은 시간의 부정이다. 시간은 부정할 수 없다. 시간을 부정하려면 말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멈추면 말을 못한다.
변화와 불변은 섞일 수 없다. 흐르는 강물 속에서 흐르지 않고 버티는 물은 없다. 모두 변하거나 모두 멈추거나다. 지구가 도는데 혼자 멈추면 우주 공간에 낙오된다. 변화는 생겨나거나 사라질 수 없다. 그것은 열역학 1법칙을 어긴다. 문제는 인간의 관측에 의한 오염이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관측했다는 의미다. 존재는 관측된 존재다. 관측자와 나란한 변화는 관측되지 않는다. 변화의 단위가 문제가 된다. 어디서 어디까지를 관측할 것이냐다. 변화가 묶음 단위로 일어나므로 혼선이 빚어진다. 묶음 단위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자발적 변화다.
세상에는 변화와 불변이 있는게 아니라 나란한 변화와 어긋난 변화가 있다. 결맞음과 결어긋남이 있을 뿐이다. 규칙적 변화와 불규칙 변화가 있을 뿐이다. 내부적 변화와 외부적 변화가 있다. 결맞음이 인력이라면 결어긋남은 척력이다. 찾아야 하는 변화는 자발적 변화다.
외부 작용에 의한 변화는 관측되는데 닫힌계 내부의 자발적 변화는 은폐된다. 자발적 변화는 밸런스의 복원이 있을 뿐이다. 자발적 변화는 닫힌계 내부에 압력이 걸려 있으므로 미리 정해져 있는 한 방향으로 일어난다. 모래시계를 어떻게 흔들든 모래는 아래로 떨어진다.
당구공이 치는 대로 가는 것과 다르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외부에서 결정되는 당구공의 진로와 내부에서 결정되는 모래시계의 진로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구공의 진로는 방정식으로 풀어야 하고 모래시계의 진로는 함수로 풀어야 하는게 다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먼저 변화를 주장했고 파르메니데스가 뒤에 와서 불변을 주장했다. 플라톤이 둘을 변증법적으로 절충했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를 보다 위에 둔게 잘못이다. 이데아는 불변이니 세상을 불변 속의 변화로 본 것이다. 틀렸다. 변화 속의 불변을 찾아야 한다.
변하지 않는 것의 변화는 열역학 1법칙을 위반한다. 변화 속의 불변은 인간의 관측에 의해 오염된 상대적 불변이므로 상관없다. 상대적 변화는 진짜 변화가 아니다. 변화는 변화를 닫힌계 내부에 감춘다. 자동차 엔진이 돌고 사람의 심장이 뛰어도 겉보기로는 멈추어 있다.
무는 유를 낳을 수 없으나 유는 무를 연출할 수 있다. 무는 없으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유는 있으므로 차곡차곡 포개서 자신을 은폐할 수 있다. 존재는 유다. 유는 변화다. 불변은 반응하지 않으므로 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다. 반응하는게 존재다.
변화 속의 불변이 우리가 찾아야 하는 로고스요, 진리이며, 통제가능성이다. 사회의 권력이고, 보트의 키다. 생물의 심장, 자동차의 엔진, 금고의 열쇠다. 돈이라면 이자, 공기라면 기압, 물이라면 수압이다. 하나가 전체를 대표한다. 바퀴축 1이 바퀴 2를 통제하니 효율적이다.
변화는 움직여 충돌하므로 방향이 있다. 충돌하면 교착되어 멈추므로 변화가 지속된다면 충돌을 피하는 나란한 변화다. 그것이 결맞음이다. 밸런스를 복원하니 균형이다. 자연의 변화는 언제라도 균형을 따른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변화가 균형에서 멈추기 때문이다.
팽이가 멈춘다면 마찰력 때문이다. 마찰은 지면과의 충돌이다. 얼음 위의 팽이가 잘 도는 이유는 얼음이 녹아서 작은 수막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스케이트 선수가 빙판 위를 잘 달리는 이유는 스케이트가 순간적으로 얼음을 녹인 물에 떠서 마찰력을 최소화하기 때문이다.
우주에 결맞음과 결어긋남 뿐이다. 결맞음이 결어긋남을 이긴다. 인력이 척력을 이긴다. 결맞음은 불변처럼 보이고 결어긋남은 변화처럼 보이지만 둘 다 변화다. 인간은 닫힌계 안에서 밸런스가 균형을 회복하는 힘을 이용한다. 엔트로피 법칙이 어렵게 설명하지만 쉽다.
태초에 변화가 있었고, 변화는 충돌하며, 충돌하면 이기거나 지는 것이며 결맞음이 결어긋남을 이겨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진 것은 사라져서 공간에 숨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변화의 결맞음이다. 닫힌계 내부에 압력이 걸리면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는게 위치에너지다.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위치에너지다. 위치에너지를 이용하면 위치가 깨진다. 위치에너지는 둘이 공유한다. 바퀴는 축을 공유한다. 에너지의 이용은 그 공유를 해제한다. 우리는 에너지의 공유를 해체하여 이용하며 이용하면 공유가 깨지므로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다.
밸런스가 복원되어 자발적 균형을 찾아가는 이유는 공유 때문이다. 에너지는 공유에서 사유로의 일방향으로 간다. 공유하면 내부에 압력이 걸린다. 밀도는 서로 공유하는 정도다. 에너지는 고압에서 저압으로 간다. 나란하면 압력이 걸린다. 나란함에서 무질서로 간다.
공유지의 사유화에 이익이 있다. 태양은 공유되지만 햇볕이 포도당으로 바뀌어 몸에 쌓이면 사유된다. 공유가 없어도 죽고 사유를 못해도 죽는다. 우리는 공에서 사로 바뀌는 찰나에 매달려 산다. 진보는 공유를 강조하고 보수는 사유를 강조하지만 정답은 선공후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