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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전둘레산길잇기 원문보기 글쓴이: 마중물
대동천(大東川) 역사에 관하여... 대동천의 총연장은 8.56km다. 대전광역시의 동쪽 식장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흘러 판암동, 신흥동, 대동을 지나고 소제동에서 가양천을 합한 후,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흐르다 삼성동에서 보문고등학교를 왼쪽으로 끼고 대전천과 합류한다. 대동리라는 동리 이름에서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대전리(大田里, 한밭들)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불리웠다고 전해진다. 『1872년 지방지도』(회덕)에 외남면 대동이라는 명칭이 처음 확인된다. [네이버 지식백과]대동천[大東川 Daedongcheon](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 2010. 02. 국토지리정보원) 대동천은 대전천과 함께 대전의 근세사가 함축돼 있다. 1905년 경부선이 부설되고, 대전역이 생기면서 대전은 근대도시로서 그 면모를 나날이 달리했다. 대전천과 옛대동천이 합수되던 옛원동국민학교주변에 일본인들이 속속 들어와 정착하면서 도시화가 급진전됐다. 오늘 안내해설에 나선 마동님의 말씀을 참고해 「대동천의 원(原)물줄기」를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식장산에서 발원하는 판암천과 용운계곡에서 발원하는 용운천이 대동교 부근에서 합수돼, 지금의 원동네거리 국민은행 지점을 거쳐 옛원동국민학교부근에서 대전천과 합해졌다. 또 한줄기는 우성대학교 동캠퍼스쪽에서 발원하는 자양천으로, 대전역앞으로 흘러 지금의 중화요리식당 '태화관'앞을 지나 대전천과 합류됐다. 그리고 가양천(佳陽川)은 지금 대동천에 합수돼, 대전천과 만나는 물길과 거의 유사하다. 인공적인 수로변경이 없었다면 대동천과 만나지 않고 독자적으로 대전천으로 흘러갔을 하천이다. 대전의 대표적 명소(名所)였던 소제호(蘇堤湖)! 1929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솔랑산 아래 풍광이 으뜸가는 호수였다. 무려 50만㎡(약2만평)의 크기였다고 한다. 소제호는 연꽃으로 유명했다. 일제(日帝)는 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던 소제호를 매립해 없애버렸다. 수해방지 및 하천정비란 미명아래 인위적으로 대동천의 물길을 바꿔놓았다. 그 물길은 현재와 동일하다. 하천은 본래 곡류(曲流)한다. 뱀이 꾸불꾸불 기어가듯 사행(蛇行)하는 게 원래의 형태다. 대동교를 지나면 하천은 직강(直降)으로 변한다. 인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 게 소제호매립의 단적인 흔적이다. 소제호의 크기가 대동교까지 이르렀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일제의 소제호 매립은 검은 의도가 있었다는 얘기다. 소제호 방죽 가까이엔 송자(宋子, 우암 송시열)고택이 있었다. 또한 별당인 기국정(杞菊停)이 있었다. 기국정은 현재 우암사적공원내 남간정사옆으로 이전돼 있다. 송시열이 누구인가. 위정척사(爲正斥邪), 척양왜이(斥洋倭夷)사상의 정신주 지주(支柱)가 아니었던가. 일제에 저항하고, 반기를 들게 하는 사상의 밑바탕이요, 요람지(搖籃地)가 바로 소제호주변에 있었던 것이다. 일제가 이를 그냥 지나칠 리 만무했다. 대전역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면서, 주택용지 및 관공서용지확보차원에서 소제호를 매립했다는 것은 일제가 내세운 허울좋은 구실에 불과했다. 소제호는 역사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그러나 그 흔적은 여기저기 남아있다. 소제호 매립 전후의 모습 |
소제호 매립(1927년 ~1929년) 전후 모습
우측의 소제호 매립후의 지도를 보면 소제호가 매립된 뒤, 그 가운데를 대동천이 관통해 흐르고 있다.
1928년 일제강점기 당시 대전 중심부. 대전천과 대동천의 물길이 확연히 보인다.
1934년 도청 대전이전 2주년기념 최신지도. 대전천과 대동천의 물길과 합수지점이 눈에 띈다.
위아래 사진을 비교해 보세요. 제1치수교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
위의 사진은 1951년 사진이고요, 아래사진은 마중물이 오늘 비슷한 위치에서 한 번 찍어본 것입니다.
맨 뒤에 보이는 산은 테미고개에 있는 '수도산'으로 추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