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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중복음의 신유에 대한 해석학적 평가
- 심프슨, 김상준, 이명직, 김관수를 중심으로 -
조갑진 교수 (신약신학)
들어가는 말
서울신학대학교 설립 90주년을 맞은 올해는 동양선교회(OMS) 설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창립 94년이 되는 해다. 신유의 중요성을 전도의 한 표제로 강조하여 온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헌법 제1조에 보면, 성결교회의 목적은 성결교회 초대 창립자들의 정신과 전통을 계승한다고 전제하면서 그 중요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1. 국내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며 모든 영혼들을 구원하며 일반 신자에게 성결의 은혜 즉 성령세례를 전하여 교회로 하여금 거룩되게 하기를 힘쓴다. 2. 교회를 설립하여 영혼을 구원함과 윤리의 실천을 힘쓰며 십자가의 복음 옹호와 성서의 권위를 보수하며 재림 주를 대망하도록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특이한 사실은 초대 성결교회의 정신과 전통을 계승한다고 하면서도 사중복음 가운데서 신유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피하고 그 대신 영혼의 구원과 윤리의 실천에 힘쓴다는 내용을 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 성결교회가 사회 속에서 윤리적인 삶을 강조함으로 성결교회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려했다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논리적으로 명백히 신유에 대한 중요성이 교단 안에서 약화되었다는 증거로 해석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해답을 찾아 본 후, 결론에 가서는 내일의 신유 복음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방안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1907년을 전후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신유를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1907년 이전의 인물로는 컬리스(Charles Cullis)와 심프슨(A. B. Simpson), 카우만(C. E. Cowman)을, 1907년 이후의 인물로는 김상준과 이명직을, 1960년대 이후의 인물로는 김관수 목사를 주목하면서 초기 신유에 대한 해석을 고찰할 것이다. 연구범위는 심프슨의 사중복음에서 {신유} (the Gospel of Healing)를, 김상준의 {사대교리(사중복음)}, 이명직의 {기독교의 사대복음}, 그리고 김관수 목사의 박사학위논문으로 한정한다.
I. 서론적 고찰
1. 성경주석과 해석
주석은 성경 본문(Text)이 그 때에 무엇을 의미했느냐(what it meant)라고 하면, 이에 반하여 해석은 그 본문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what it means)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1세기의 언어와 문화, 정치 종교적인 배경 속에서 쓰여진 성경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해석 작업을 요구한다. 이러한 언어적인 간격과 시간적인 간격과 사회, 문화, 정치적인 간격을 메워주는 과정에서는 기술이 필요한데, 이 기술을 우리는 해석학이라고 한다.
이러한 면에서 주석이란 텍스트가 저자 자신과 원래의 독자들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한 탐구를 뜻한 반면, 해석은 텍스트의 오늘을 위한 현재적 의미에 관심을 갖는다. 따라서 해석학이란 "주해에서 해석으로 넘어가기 위한 제 규칙 및 방법"을 형성한다고 한 악터마이어(P. J. Achtermeier)의 견해는 정당하다. 오늘의 독자들은 "두 개의 지평(The Two horizons)의 만남, 다시 말하면 고대의 텍스트와 현대의 독자 또는 청중들의 지평의 융합(fusion)이 이루어지는 것"을 통하여 성경을 오늘의 삶 속에서 정당하게 적용하게 된다.
2. 신약에 나타난 신유
신약에서 신유는 협소하게 인간의 육체적인 질병만을 치유한다는 개념이 아니고 인간과 인간의 삶의 환경까지를 포함하는 통전적인 치유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온전함(wholeness)은 치유하다(heal)로 번역되는 신약의 5가지의 헬라어 동사들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치유기사에서 소조( )는 16회 나오고 강조형인 디아소조( )는 2회 사용되는데 그것이 마태복음 14장 36절과 누가복음 7장 3절에 나온다. 아람어를 어원으로 하는 이 단어는 흥미롭게도 '살아나게 하다'(to make alive)와 '건강하게 하다'(to make healthy)라는 이중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예수의 치유 사역 기사에서 소조는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8:42; 8:48; 17:19)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결코 몸의 한 부분만을 언급하지 않고 항상 전인간(the whole man)을 언급한다.
윌킨슨(J. Wilkinson)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소조라는 단어가 복음서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치유에 관한 그리스도교적인 개념과 구원에 관한 그리스도교적인 개념은 상황에 따라 그 중복의 정도가 다르기는 하나 결코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개념들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육체의 치유가 순수하게 육체적인 것일 수도 또한 영적인 구원이 순수하게 영적인 것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둘은 서로 결합하여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 예수께서 행하신 치유의 기적들과 같은 전인적이고도 통전적인 구원을 이루게 된다."
또한 이아오마이( )- 신약에서 26회 사용되는데 누가복음에서 11회, 마태복음에서 4회,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3회, 사도행전에서 4회, 마가복음, 히브리서, 베드로전서, 야고보서에서 각각 1회씩 나타난다. 윔버는 이 단어가 육체적 치유를 나타내는 말로 22회(마15:28 참조), 그리고 영적인 치유를 상징하는 말로 5회(마13:15 참조), 그리고 야고보서 5장 16절에서는 육체적 영적 치유 모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윔버는 테라퓨오는 '더이상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즉각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회복하는 것'임을 뜻하고, 아포카스테미는 '이전의 건강한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신유는 영혼과 육체를 포함하고 죄로 아담이 잃어버린 에덴의 환경까지를 포함하는 최후의 온전한 구원의 그림자이다. 신약에서는 그 구원이 시작되었으며 완성을 향하여 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곧 영혼과 육체 그리고 범사(요3 1:2 참조)를 포함하는 차원에서의 치유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컬리스, 심프슨과 카우만의 관계
동양 선교회의 창설자 카우만 부부가 선교사로서 결단하는데는 기독교선교연합회(C&MA)의 창설자인 심프슨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밀접한 상관관계로 인하여 성결교회의 신학적인 뿌리가 만국 성결교회와 심프슨 박사의 영향 하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심프슨과 컬리스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보스톤 출신 의사이자 당시의 미국 신유 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컬리스가 인도하는 야외 집회에서 절망적인 병중에 있던 심프슨은 신유의 은혜를 받게 된다. 그 후 심프슨은 컬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매주에 한 차례씩 신유 집회를 그의 집에서 가졌는데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컬리스와 그의 집회에서 신유의 은혜를 체험한 심프슨, 그리고 심프슨의 집회에서 선교사로 결단한 카우만이 서로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심프슨의 신유 이해는 치유의 역사를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에 대하여서도 구원하신다는 주님의 온전한 구원에 대한 의도라고 여겼다는 점이다.
II. 심프슨의 신유 해석에 대한 평가
심프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두 본성을 지녔다. 인간은 육체와 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본성이 모두 타락의 결과로 영향을 받았다. 죄로 말미암아 육체는 질병에, 영혼은 부패케 되었다. 그러므로 온전한 구원이란 이 두 본성을 포함한 것이어야 한다. 구원은 영적 생명의 변화와 함께 육체의 회복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의 진술은 인간 질병의 원인을 육체와 영의 전적인 타락에서 그 근원을 찾는다는 것이다. 병의 원인이 인간의 죄에 있다는 그의 해석은 병의 치유는 육적이면서도 영적인 것을 포함하는 소위 전인적인 치유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심프슨은 치유를 구원론의 선상에서 다룬다. 심프슨은 "예수께서는 불행과 궁핍 가운데 있는 자들을 향하여 구원과 신유를 제공했다고 한다. 즉 그 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최대의 구원자로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심프슨의 신유 이해의 성서적인 근거를 살피려고 한다. 그의 신유에 대한 이해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취하여 해석하고 있는가를 보려는 것이다.
심프슨은 15개의 사례를 구약과 신약에서 취하여 신유를 해석하고 있다. 그 중에서 구약의 본문은 6가지인데 출애굽기 15장, 시편 105편, 욥기 1-2장, 시편 103편 2절에서 3절과, 역대하 16장 12절에서 13절, 이사야 53장이 그 본문이다. 신약의 본문으로는 마태복음 8장, 요한복음 14장, 마가복음 16장 15절에서 18절, 고린도전서 12장 9절에서 30절, 야고보서 5장 14절에서 15절, 요한삼서 1장 2절, 에베소서 5장 30절, 로마서 8장 11절, 고린도후서 4장10절에서 11절, 그리고 히브리서 13장 8절이다.
심프슨은 구약에서 위와 같은 본문을 뽑아내서 그의 신유 이해에 대한 성서적인 근거를 제시하는데, 본문을 주석하는 작업을 한 것이 아니고 단지 관련 본문을 인용함으로 레퍼런스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석적인 평가를 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가 신유문제를 조직신학적으로 소개하면서 그러한 논리를 전개하는 근거로 어떤 성경 주석을 참고했는지를 거의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이 그의 주석적 작업에 근거한 것이라고 본다면 선별된 구절을 가지고 본문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약속과 성취라는 이해의 빛에서 구약을 해석하고 있다.
1. 모형론적 해석과 구속사적 해석
모형론적 해석은 신약과 구약이 근본적인 신학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구약에 있는 그림과 전조 또는 예시를 신약에 있는 요소로 대치해서 구약을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모형 해석의 원리를 보면 역사 문화적 상황분석과 어휘 구문론적 분석 그리고 신학적 분석, 문학적 분석의 순서를 고려해야 할 때에, 심프슨의 해석이 거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대단히 초보적인 해석이라고 평가할 지라도 그의 구약 본문 해석에서 모형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발견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즉 그가 제시하는 출애굽기의 본문(출15:25-26)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약속으로서 그것이 야고보서에서 연결점을 찾고 있다는 면에서 그러하다. 심프슨은 약속과 성취라는 구속사적 구도에서 구약의 사건이 예수를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해석을 한다. 심프슨은 출애굽을 통해서 실현된 약속(시105:37)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역시 그 약속이 반드시 성취됨을 그리스도 안에서 보게될 것으로 해석한다. 더 나아가 그는 이사야 53장4-5절을 장차 오실 구세주를 나타내는 예표로서 해석한다. 그는 신약에서 첫 번째 언급(마8:16-17)으로 주님의 신유 사역을 언급하면서, 예수의 신유를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신 약속의 성취로 설명한다.
2. 문자적인 해석과 영적 해석
심프슨은 욥을 예로 들어 질병의 원인을 마귀로부터 온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그 질병에 대한 해결은 자기 의와 자기 변명의 자리 대신에 자기 포기와 겸손으로 그 자리를 대신했을 때에 고침을 받는다"라고 한다. 욥기 안에 나타난 신유 모티브에 대한 그의 해석이다. 또한 그는 다윗의 고백(시103:2-3)을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질병을 고치는 완전한 신유의 역사로 해석했다. 그리고 욥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다윗에게서도 죄와 병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함께 반드시 치료되어야 할 것으로 파악했다. 더 나아가 아사의 죽음이 불신앙이었다고 보면서 그것이 '구스 사람(the Ethiopians) 보다 더 무서운 적'이라고 해석한다. 심프슨은 이사야 53장에 대한 마태복음의 인용을 말하면서 이 본문을 "진실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질병을 몰수하시고(borne away), 우리의 고통을 던져버리셨다(carried away)"라고 직역하고 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 대한 그의 해석에서도 예수께서 하신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니"를 복음 전파와 표적을 교회가 감당할 것뿐 만 아니라 더 큰일도 감당할 것이라는 해석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경에서 기름을 바르는 행위를 해석하기를 그러한 행위는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종교적 의식으로 해석함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경향은 그가 성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영적인 해석 또는 상징적인 해석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3. 문맥과 당시 정황을 고려한 해석
심프슨은 신유의 은사를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파악하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영어 성서의 복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단어에 대한 원어적인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는 서신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수신자의 정황을 고려한 해석을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야고보서는 회람 서신으로 "점차 다가오고 있는 이 세상의 종말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훈계하기 위하여"라고 쓰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심프슨은 저자와 수신자 그리고 수신자의 정황을 고려하고 있는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과 육체의 통전적인 치유에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다 보니 본문에 나타난(요한삼서1:2) 범사라는 단어를 해석하지 않고 가버리는 아쉬움도 남기고 있다. 그리고 에베소서 5장 30절과 로마서 8장 11절의 해석은 동일하게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신자의 육체에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해석으로서 그 문맥을 고찰하고 단어의 의미를 고려할 때에 정당한 해석을 하고 있다. 또한 그의 고린도후서 4장 15절의 "너희를 위하여"를 당시에 고난 당하고 있던 신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서라고 해석함으로써 수신자의 정황을 고려해서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심프슨의 해석이 모형론적 해석과 구속사적 해석의 요소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문자적인 해석이면서도 영적 해석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심프슨의 해석은 문맥과 당시 성서가 쓰여진 정황을 고려한 해석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III. 김상준, 이명직의 신유 해석에 대한 평가
우리는 초대 한국성결교회의 신유이해를 하기 위해서 김상준과 이명직을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김상준은 동경성서학원의 졸업생으로 후에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성서학원을 설립하였다. 따라서 그의 신유 이해는 초기 한국성결교회의 신유이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한국성결교회의 신유이해는 이명직에 의해서 체계화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김상준과 이명직의 신유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두 사람은 동경성서학원의 선후배이고 신학교에서 함께 교수를 한 사이로서 많은 공통점이 있으며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 최초의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동시대의 성결교회 지도자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김상준이 신유를 세 번째에서 네 번째로 바꾸어 놓은 반면, 이명직은 그것을 다시 세 번째로 놓은 것으로 보아 이 둘의 신유에 대한 중요도 인식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의 신유 이해는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신유 이해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은 함께 진행해 보고자 한다.
1. 모형론적 - 사중복음 해석
모형해석은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뱀에 대한 해석에서 그 근거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문자적인 해석으로는 풀 수 없고 그 뱀이 사탄 마귀(계12:9)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명직에게서는 구약주해에서 이러한 해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김상준도 그러한 해석학적 관점에 서 있다. 김상준은 이스라엘 족속의 홍해 도하를 세례의 모형(고전10:1-2)이라면 요단강을 건넘은 성령세례의 모형으로 보고 있으며, 요단강 물은 성령의 모형(요7:38-39)으로 해석하고, 애굽인 은 비신자의 모형, 누가복음 5장 14절의 기름은 성령의 모형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또한 이명직은 보다 문자적이고 온건하게 홍해 도하 사건을 전후하여 그것을 모형론적이지만 또한 사중복음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특히 이명직은 그의 {신약전서 사경보감}에서 신약성서를 사중복음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사도행전에서 7가지 병의 이름을 밝히고 그것이 어떻게 치유되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신약성서 전체를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중복음의 차원에서 신약을 해석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마가복음 6장 13절과 야고보서 5장 14절 그리고 요한1서 2장 27절을 근거로 하여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서인선에 따르면, "이명직 목사는 문자적 해석을 선호하는 경우도 있고, 부활에 대한 영적 해석을 단죄하기도 하지만, 그의 성서해석은 무엇보다도 영해, 모형론적 해석, 또는 때때로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명직은 김상준과 달리 기름을 바른다는 부분을 해석할 때에 문자적이고 문화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명직에게서 모형적인 해석이 약화되고 문자적-문화적 해석을 하는 반면 사중복음의 관점에서의 해석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김상준은 이면에서는 그가 사중복음을 한 발짝 승격시켜서 사중교리로 표현한 점으로 보아 사중복음의 신학적인 작업을 염원한 도리어 더 사중복음에 깊이 서있는 해석을 하려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해야 한다.
2. 문자적 해석과 문맥적 해석 차이
김상준은 창세기 3장 19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육신의 죽음과 영적인 죽음이 동시에 왔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로마서 6장 23절의 죄의 값을 죽음이라고 했는데, 이 죽음은 곧 영, 육의 죽음을 말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죄와 죽음과 질병이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 원류를 차례로 거명하기를 악마가 죄를, 죄가 질병을, 질병이 죽음을 만든다는 공식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는 이명직도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질병의 원인이 사단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그는 신유론 제2장 제2절에서 다루는데 그의 해석은 문자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김상준은 병의 근원을 말할 때에 구약에서 두 구절(신28:37; 욥 2:6절이하)과 신약에서 세 구절(히12:10; 요9:3; 막9:18)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신유를 정의하기 위해서 신약의 3구절(행2:27;눅11:15,20)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구절들 거의 대부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김상준은 그의 '신유에 대한 문답적인 설명'에서는 바울이 언급한 가시(고후12:7)를 핍박으로 인해 약해짐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고, 눈병(갈4:15)에 대한 바울의 언급을 "어떤 사람의 망상일 뿐이고 다만 그곳 신자들이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이 눈이라도 빼어줄 듯 하다는 표현"이라고 해석하여 이 부분에서는 문맥을 고려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3. 원어를 인용하고 문화적 해석을 시도
김상준은 출애급기 15장26절의 치료하는 자를 원어(롯부/라파)로 언급하고 있으며, 디모데에게 바울이 위병 때문에 포도주를 쓰라고 번역된 부분을 가리켜서 이것은 그곳에 물이 나빠서 음료수를 대용하는 포도즙(곧 알콜이 없는 즙주)를 쓰라고 한 것이지 결코 약으로 마시라고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문화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대목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명직도 그의 '신유론'에서 문화적인 해석을 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4. 신유를 선교와 연결하는 해석
이명직과 김상준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신유의 목회와 선교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언급이다. 이명직은 신유가 교회에 허락된 은사로 전도 사명에 부수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신유의 역사는 영혼을 사랑하는 전도에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하나의 증거로 따른다고 보았다. 이 신유는 오늘날의 선교 현장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실제적인 현장과 괴리되지 않은 해석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한 두 사람에서의 공통되는 확신은 믿음의 기도로 치유의 은총을 누린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믿음의 기도는 무엇을 말하는지를 좀 더 분명하고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제시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김상준이 의약을 절대로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 제시한 성경적인 근거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는 별도의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Ⅳ. 김관수 목사의 신유해석에 대한 평가
김관수 목사는 신유 사역이 교회 성장에 끼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신유를 강조하는 사역을 통해서 교회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성결교회가 강조하는 사중복음의 신유문제를 그의 사역의 이론적인 근거로 채택하고 있다. 특히 그의 논문 제4장 '성결교회 신유 운동과 교회성장'에서 성결교회의 신유의 역사가 심프슨, 카우만, 길보른으로 이어진다고 보면서 역사적 맥락에서 성결교회가 심프슨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제시한다. 김관수의 그의 논문에서 질병과 죄의 상관관계를 지적하면서 마가복음 2장 7절과 시편103편 3절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그는 이것이 죄와 질병의 깊은 관계를 설명하는 구절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한가지 죄를 범하면 반드시 한 가지 병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의 신유 해석에 대하여 평가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문자적인 해석
그는 그의 논문에서 죄와 질병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면서, 죄를 용서받으면 병도 치유 받는다는 관점에서 문자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그 근거로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병을 고쳤다' 하지 않고 '네 죄를 사했다'(막2:7)고 사죄선언을 하신 사건을 들고 있다. 이것은 죄도 질병도 모두 구속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편103편(너희 불의를 사하시고 너희 모든 병을 고치셨다)을 통해서 더욱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마태복음 14장 14절과 마가복음 1장 41절을 예로 들어서 예수 신유의 동기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민망히 여기는 마음에서라는 주장에서 보여 준대로, 그의 해석방식은 해당 성경구절만을 뽑아 그 구절이 신유와 관련됨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2. 문화적 해석
심프슨은 야고보서의 '기름을 바르라'(약5:14-15)를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는 상징적 종교의 의식"으로 보았다. 이에 반하여 김관수는 이명직의 문화적 해석을 따르면서도 이것이 당시의 구약과 신약의 시대에 실제로 기름을 바르면서 병자를 위하여 기도한 것이라고 해석함으로 이명직의 상징적 해석을 뛰어 넘고 있다. 그는 렌스키(Lenski)의 주석을 인용하여 '기름이란 환자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작용'을 말한다고 하면서 당시 그레코-로마 사회에서의 기름 사용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로마사회에서는 감독이나 제사장 그리고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에 의하여 사용될 때는 의학적인 효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름은 사죄의 표시와 병자의 치료로 사용되고 있었음이 공통된 것이다." 이러한 일은 예수의 제자들이 마가복음 6장 13절에서 병자들을 고칠 때 사용한 방법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기름을 바르는 것 자체에 대한 주석적 고찰을 하고 있으나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해석을 유보하고 있다.
3. 예언의 성취로서의 모형론적 해석
김관수는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서 성취되었다는 구조에서 신유를 해석하고 있다. 그는 출애굽기 15장 26절, 말라기 4장 2절, 민수기 21장 4절에서 9절, 23장 18절 그리고 이사야 53장 등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성취로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제시한다. 이러한 해석은 그가 축자 영감설을 지지하기에 나온 결과라고 언급을 하지만 그는 약속과 성취의 구조로 신약과 구약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예수께서 최후의 명령을 주시는 본문에서 신유를 필히 사용하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막16:15-18).
4. 의약과 신유의 가능성을 보다 열어놓은 해석
김관수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를 9가지로 열거하면서 신유의 은사를 정확히 말하면 "병 고치는 은사들"(12:9)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오늘날 의학계에도 여러 전문 분야의 특수 병원이 있듯이 은사에도 그 은사를 받는 사람에 따라서 특별한 병을 다른 병보다 더 능력 있게 낫게 하는 은혜가 있는 것을 말한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해석은 병의 종류에 따라서 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그 병자를 위해서 쓰임 받아야 한다는 것과 신유문제를 보다더 섬세하게 대응해야 할 것을 암시하는 진일보한 해석이다.
그는 야고보가 병자를 치료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치료하는 믿음의 기도를 도입함으로써 영적인 방법과 세상적인 방법을 병행하여 사용하였다고 해석함으로 의약과 치유의 병행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또한 에바브로디도는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비록 그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하여 회복되기는 하였으나 그가 기적적으로 병고침을 받았다는 어떠한 암시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빌2:25-30)고 주장한다. 그는 그러므로 질병을 취급함에 있어서 성경 그 어디에도 정상적인 수단의 사용을 금지하는 곳은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대한 근거로 디모데와 누가의 경우를 제시하였다. 디모데의 비위와 자주 일어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면을 받았다(딤전5:23)는 것이다. 또한 의원 누가(골4:14)의 신약성서에서의 위치를 고려하면서 사도 바울의 개인 주치의로써 사도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신유와 의약과의 관계를 배치되게 해석한 선배들의 해석을 완화시키며 의약과 신유의 협동적인 사역을 가능하게 열어놓는 해석이다.
5. 신유의 신학화를 제시
김관수는 신유의 올바른 성서신학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신유를 신학화(Theologizing)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학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교리를 추상적인 차원에 교정시키는 대신 변천하는 현실과 목회 상황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말한다"는 것이다. 신유에 대한 성서신학적인 체계화를 시도하는 작업을 함과 동시에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신유는 구체적으로 병든 자를 일으키는 행동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권능이며 섬김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유는 반드시 신학화를 통해서 보다 더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 교리의 자기 갱신이며 보다 더 넓은 영역을 추구하는 자기 개방이지만, 목회 현장에서 더 가깝게 체험되고 신자들의 지도를 통해서 신유는 그 실제가 확장된다는 논리를 그는 제시한다. 즉 사중복음 곧 신유를 신학화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며, 이것이 도그마화 되지 않기 위하여 실제의 영역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6. 성결교회 신유 해석에 대한 시대적인 정리와 정체성 확립을 위한 노력
김관수의 논문의 또 다른 기여는 교단 [활천]지가 창간된 1922년을 시점으로 전(1922-1930), 후반기(1931-1945)로 나누어 그 때에 문헌을 통해서 신유를 강조한 흔적을 [활천]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 때에 강조되었던 본문을 제시하고 또한 신유의 실재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말하고 있다. 당시(1925년) 성서학원 원장이던 이 에이 길보른이 "신유를 베푸시는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서 "예수는 크신 의원이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변치 아니하신다. 저는 긍휼이 무궁하셔서 우리의 죄와 질병도 담당하셨다(마8:16-17; 약5:13-16)"고 주장하고 있다. 활천 제1권에서 1호에서는 마가복음 9장 5절을 근거로 하여 신유가 메시야 사명의 명백한 증거라고 하면서 이 신유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히13:8)께서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허락한 것이고 성경 전체에서 이 신유의 은사는 믿음의 분량을 따라 주시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이미 [활천] 제1권 3호에서 "… 그리스도는 육신의 병만 고치심이 아니요 영혼의 치료도 하신다 하며 세상의 의술도 약도 거부하지 만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는 점을 말한다. 그는 그리고 목회현장에서 신유의 역사가 나타난 사례를 설명하면서 당시의 신유의 지도자로는 강시영, 김진문, 이문현, 박영순, 이정원, 김종인, 강송수, 김응조, 김규호 등을 들고 있다. 후반기의 신유지도자들은 훨씬 수가 늘어나서 이천영의 성결교회사에 보면 성서학원에서는 교수들이 이명직, 최석모, 이명헌, 곽재근, 이건, 박명헌, 이상철, 박영순, 강송수, 김응조, 전성운, 이정원, 변성남 등이며 목회자들은 원세성, 배선표를 비롯하여 44명에 달한다고 한다.
김관수는 성결교회가 얼마나 신학교에서부터 신유의 실재가 살아 움직였는가를 보여주는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신학교 교수들이 대부분 신유사역자들이었다는 것이며 그것은 그대로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성결교회 교회 성장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는 것을 통계표를 통해서 제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성결교회는 사실상 신유 운동의 선구자였으며 신유 유업을 이을 장자 교회인 것을 다시 인식하게 된다. 그 당시에 교역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목회현장에서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때때로 금식기도하고 철야하며 기도하여 치유케 되는 것은 평범한 행위였으며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고 원로 목사님들은 한결같이 말한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신유 해석은 성결교회에 신유 전통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면서 이론과 실재를 병행하여 해석함으로 사중복음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 보다 진일보한 연구를 보여 주었다. 본문 주석의 충실하려는 면을 보이면서 또한 한계를 노출하기도 하였다. 그는 성결교회 선배들의 신유 해석과 맥을 같이 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적인 죽으심은 우리의 죄와 질병에 유효하다는 구원론적인 차원에서 신유를 보면서 구원은 전인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그도 동일하게 온전한 구원과 더불어서 범사라는 차원을 해석함으로 그것이 삶의 전 영역과 관련되는 구원의 우주적인 차원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제약성도 발견된다.
또한 신유의 필요성을 마가복음16장 15절에서 18절을 근거로 전도자에게 신유를 은사로 허락했다고 전제하면서 그 은사를 주신 목적을 약속된 메시야를 믿게 하기 위해서와 죄 사하는 권세를 보여주기 위해서로 해석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받은 자( 직설법 표현)에게 명령이 내려진다(명령법)"의 중요한 예수 명령의 구도(마5:23-24)와 바울 서신의 구조를 고려할 때에 전도의 기능에 효과가 있고 더 나아가서는 만족한 생활과 교회 생활에 충성한다는 통계를 제시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영혼 구원과 함께 적극적으로 사회와 국가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는 자로서의 삶에 대한 강조가 약하지 않느냐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맺는 말
지금까지 성결교회 사중복음 중 신유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를 1907년도를 기점으로 하여 이전으로 컬리스, 심프슨, 카우만을 그 이후로는 김상준, 이명직을 그리고 1960년대 이후의 인물로는 김관수를 중심으로 신유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해석학적인 측면에서 평가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 적어도 이명직까지에 이르는 인물들의 신유에 대한 이해는 신유는 의약을 쓰지 않고 하나님께 믿음의 기도로 낫는다는 것을 신유라고 정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직은 "의약이나 다른 방법으로 병이 나은 것을 부인하지 아니하는 것이라"한다. 그러나 의약을 쓰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 쓰는 것이고 그것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나 신유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김관수 목사에 이르러서는 신유와 의약과의 관계를 분명히 구분하거나 아주 격하시켜서 해석하려는 태도를 완화시키며 의약과 신유의 협동적인 사역을 가능하게 하는 해석으로 발전시키고 있다는 면에서 신유에 대한 이해를 성서적으로 보다 확장하여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드러난다.
2) 이들이 견지하는 성경해석의 태도는 4중복음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노력이다. 이것은 이명직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신약전서 사경보감에서 마태복음에서 요한 계시록까지를 사중복음의 관점에서 분류하여 놓은 것이다. 선조들이 문자적인 해석을 했든지, 약속과 성취의 구도에서 구속사적으로 해석을 했든지, 때로는 알레고리로 그리고 모형론과 상징적인 해석을 혼용하여 썼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오늘의 우리가 선배들의 교단적 색깔을 세우려는 노력을 어떻게 국내외와 국제적인 시각에서 발전시켜야 할 것인가의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3) 신유를 구원론적 관점에서 즉 전인 구원의 측면에서 보고 치유의 권리를 예수의 고난에서 찾는 것은 좋으나 목회와 선교로의 강조가 미약하며 더욱이 사회와 환경의 치유에 대한 강조를 통해 우주적 구원의 개념으로 발전시켜야 할 과제를 남겨놓고 있다.
4) 4중복음을 신학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더욱 선명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사중복음과 관련하여 논문을 발표한 학자들 곧 한영태 교수, 홍성국 교수를 위시하여 이상훈 교수와 서인선 교수가 지적하는 대로 사중복음을 보다 신학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라는 데에 함께 공감하면서 보다 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성서 신학적이고 조직신학적이고 목회선교 신학적인 복합적인 차원에서 신유를 비롯한 사중복음을 체계적으로 다루기 시작하여 전도의 표제에서 더 나아가 성결교회의 신학의 근간으로 발전시킬 것을 제안한다. 특히 성서신학 분야에서 신약학자들은 신약 안에서의 신유의 실례를 사중복음을 이해하는데 좋도록 주석서를 집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여지며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사명을 가지고 신약 각 권을 주석 하는 주석서를 기획하고 작업을 시도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둘째, 신유와 현대 의학을 접목하는 새로운 차원의 신유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최근 신유와 의약과 관련하여 좋은 기사가 소개되었다. 이것은 중보 기도가 얼마나 불임이라는 치유에 효과적으로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한 실례가 되었다. 이것은 의학과 기도가 함께 치유에 동참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일반인들에게 기도의 중요성을 알리게 됨으로 선교에 탁월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했다. 중보 기도를 보다더 신유의 실제적 역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한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믿음의 기도로 신유를 체험한다고 누누이 강조하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에 하나 한방 병원의 원장인 최서영 박사가 시도하는 동서 의학의 협진과 이울러 이것과 성경의 진리를 통합하려는 시도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통전적인 치유를 시도하려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우리 대학은 장차 새시대의 패러다임을 여는 차원에서의 이러한 각도에서 접근하는 의학과 중보기도 그리고 동서의학과 성경을 통한 통합적인 치유 센터를 세워야 할 가능성을 제시해 본다. 그리나 이 사역은 주님의 왕되심에 근거하여 통전적- 우주적인 치유를 지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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