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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大親會 (대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정용(오천원보)
*임난호국 영남의사 충의비
*우리는 이 땅에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뜻뜻하게 살아갈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민족은 나라가 위급 할때 마다 백성들이 스스로 온 몸을 던저서 나라를 지켜낸 민족이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말할수있는 이유는 우리 선조님들을 보더라도 삼한시대때 시조 취산진지촌 부장 지백호께서는 6부로 갈라져있는 작은 부락에서 통합하여 신라 라는 한 나라를 세웠고, 고려때에는 예종,인종,의종,3대왕의 중신으로 환관정치에 눈이 멀은 의종이 충신 정습명을 멀리하자 스스로 약을 마시며 충언을 하지만 끝내 말을듣지 않아 결국 왕은 허수아비격인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끝내 고려는 1392년 이성계 일파가 공양왕의 왕권이 빈약하다는 허점으로 왕은 어두워도 중신들이 힘을 합하여 뭉친다면 국권은 강할수있다는 단심가의 정몽주를 결국 격살하고 고려는 망했습니다,
조선이 들어서서 조선왕권도 집권내내 분파타툼에 시달리다가 선조임금때에도 남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바람에 국권은 통 채로 흔들려 이를 주시하고 있던 왜의 수괴 가등청정은 1592년4월13일에 드디어 군사 20만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했답니다.
[임진왜란은 왜 일어났나]
*조선 선조임금때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처 왜군이 침략한 전쟁으로 1차는 임진왜란이라 하며 2차침입을 정유재란이라 합니다,
1,2차를 합쳐서 통상 이 亂난을 두고 조선에서는 (壬辰年에 倭가 침입했다하여 壬辰倭亂)임진왜란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분로쿠 케이초의 역(文祿慶長 役),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萬曆 逆),이라고 부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약200년 동안 해안의 부분적인 외침을 제외하고는 전쟁을 치른 적이 없는 조선이나 일부 조정에서는 왜침을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조선선조시대 때도 중신들은 서인이니 남인이니 하는 당파싸움에 예상되는 전쟁에 대한 대비 소홀로 이를 틈타 더디어 선조25년1592년4월14일 가등청정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무모하게도 대륙정복의 야욕을 안고 조선 부산앞바다에 침입하여 14일에 부산성, 15일에 동래성,을 함락된후 조선의 관군들은 싸움하기도전에 기세에 밀려 백성과 성을 버리고도망가기에 바빳고 이에 왜군들은 큰 싸움 한번 치르지 않고 진격하여 20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2달만에 평양과 함경도에 이르렀다,
[경주황성공원]
*이 비가 바로 경주에 세워진 임진왜란 의병 창의3비 로써 .
1.문천회맹 기념비, 2.경주임란의사 창의비, 3.임난순절의사 위령비,입니다.
[경북 영천지방 의병 모집과 영천성복성~서천전투 영천 의병 순절사]
선조25년(1592년4월13일)에 왜군 20만이 까마귀떼 처럼 바다를 건너와 동래,울산,경주,를 함락하고 23일에는 영천성을 함락시켜 지나가는 곳 마다 불사르고 노략질하며 파죽지세로 북상할때에
대가는 이미 서쪽으로 몽진 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호수)鄭世雅 정세아 선생은 [이제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 하셨으니 우리들이 어찌 초간에서 편히 살기를 구하겠느냐,]하시자 선생의 장자 생원 鄭宜藩 정의번이 부공의 이 말씀에 찬동하시니 먼저 선생의 아들 의번과 셋째아들 鄭安藩 정안번에게 하여금 행오를 짜고 격문을 만들어 향병을 소집하니 이 때가 5월 초순으로 선생 58세 때이다,
이 때에 격문을 보고 족제 (창대)鄭大任정대임,과 그의 재종제 大仁대인과 함께 창을 잡고 활을 끼고 와서 선생을 뵈오니 서로 손을잡고 통곡하며 드디어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고 순절할 것을 다짐하고 군중을 서로 권하고 군사를 모아 도적들을 토벌할 의논을 하고 성심을 다하여 모병하니 보름만에 문무인 900명이 모였다,
이에 향인들은 군 서쪽 법연 위에 (壇)단을 만들어 호수 정세아 선생을 추대하여 의병대장으로 삼고 崔壁南최벽남을 중위장으로 삼아 왜적에 유린당한 강토를 수복하여 나라를 보전할 것을 하늘에 엄숙히 (告)고 하였다,(호수실기,창대일기)기록
[임난 영천의병사 인명부]
김자평,김기,김대해,김연,김명해,김득추,곽영탁,노기종,류원걸,류복흥,류흥복,박언국,박사념,이정분,이순복,이파수,이호인,이국번,이지암,이일장,이영근,이득린,이득룡,이지효,윤취선,신응국,신준룡,손덕침,손덕순,손응현,서도립,성립,전억주,전영재,전흥제,전삼익,전삼달,조시언,조이항,조의함,조준기,조덕기,조성,조경,조이절,최인제,최동보,최벽남,한득의,정희소,
정세아,정대임,정대인,정사진,정담,정석남,정천리,정의번,정안번,정득현,정광윤,정응서,정수번,=이상 영천인 등등,많은 선비분들이 참가하였습니다,(오천정씨)모두 2파 분들,
정삼외,정삼계,정삼고,정인헌,=이상 흥해인(오천정씨)3분은 5파 사의헌공 휘:인헌,8파
정대용,=영일인 (영일정씨) 사의헌공의 조카이십니다,8파
(경주임란의사 창의록,경주읍지,영양지,)등등,기록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참가하여 각각 군사를 나누어 선봉장,좌,우 중위장,별동대장,결사대장,등등 활동분담을 두고 영천군성을 탈환할 준비를 하여 진군하며 영천군성은 그 어느 지역보다 요충지 이기에 가등청정은 자기가 가장 신임하는 왜놈의 법화승을 영천성에 우두머리로 두었고 그런만큼 영천이 당시 북쪽으로 향하는 교통 중심지 역활을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적 들은 영천성에 둔거하여 낮에는 사방에 나아가 노략질을 하고 밤이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고 있었다, 이에 영천의병대장 정세아는 영천의병 병사 만으로는 적 보다 수 가 적어서 군사를 보충하기로 결정하고 영천군성 공격을 7월26일로 정하여 신녕의병장,권응수를 비롯하여 하양,진량,안강,흥해,영일,의병들에게 힘을합해 줄것을 지원요청을 해 두고 영천성 밖으로 나와 노략질 하는 적 들을 먼저 섬멸하기 시작하여 박연전투,당지산전투,청송전투,등등 에서 대승을 거두고 드디어 약속한 날짜에 여려고을 의병들이 속속 도착하니 지원군은 공격하기 쉬운 서,북방면을 치도록하고 영천의병 정세아는 의병장 정대임과 아들 생원 정의번, 생원 최인제,등으로 선봉장으로 삼고 동,남방에서 적을 치니 화살과 돌이 고슴도치 침과 같이 날리며 큰 함성을 지르며 육박전으로 나아가니 왜병이 크게 무너저 성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날은 때 마침 날이 저물어 다음날 다시 진격하여 공격하니 성중의 적이 외성을 쌓고 죽음을 각오하고 항거하며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북동풍을 이용하여 불탄제를 이용하여 바람에 날리고 불화살을 공격하여 불을 지르니 드디어 외성이 함락되어 다급해진 적이 창고에 숨어들어감으로 창고에 불을 지르니 왜병들은 다시 불을피해 동남문을 따라 뛰어 나오므로 의병들이 이를 모조리 쏘아 죽였다, 궁지에 몰린 적은 갈 곳이 없자 명원루(현 조양각)를 따라 물에 빠져 죽은 (者)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이로인해 드디어 영천성은 복성 되었다, 이 영천복성의 승전 전과가 임진왜란때에 조선 최초의 복성으로 전 조선군에 용기를 실어준 전승 이라는 것을 우리는 뿌듯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영천시 조양각*
[영천의병 경주성 복성전 전투]
*경주내성*
영천의병대장 호수 정세아 선생은 공조판서 光厚의 후손으로 당시 進士로 벼슬을 즐기지 않아 영천 노항 고향에서 향 서당을 열고 학문에만 온열을 솓은 선비였으나 나라가 위급하니 의병을 모아 많은 전투에 왜적을 무치르고 영천군성을 손에 넣고 연이어 7월19일 영천복성 탈환의 전과 여세를 몰아 경주성을 강탈하여 조선 백성들을 괴롭히는 왜놈 들을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안강현 고촌에서 의병을 모으니 증병을 합하여 5천여명의 의병이 모였다,
5천여명의 영천의병진은 21일 경주에 진을 치고 왜적들의 노략질을 보고서 곳 바로 경주성을 치기로하고 군사들을 정비하는데 다른 의군 장수들이 적세가 강함을 보고 선두에 서기를 꺼려 하니 호수 선생은 솔선하여 선봉장이 되어 경주서문으로 쳐들어 가니 왜적은 성문을 열고 뛰처 나오니 영천의진 정세아 군영이 북을 치면서 고함을 지르며 혈전을 다하여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니 왜적은 밀려 동문으로 도망쳐 흩어졌다, 그러나 정오가 될 때 울산에서 지원나온 왜적병과 경주왜병이 합세하여 다시 성안으로 쳐들어 오자 성중의 의병들은 적세를 보고 두려움에 떨면서 다투어 서문으로 빠져 나가자 적의 기병과 복병들이 뒤따라 나오면서 포를 쏘며 의병들의 목을 풀베듯 베니 동중이 몹시 어지럽게 흩어지며 흥해,영일,의병진 등 관군들은 먼저 달아나고 의사 박진의 군사 마져 달아나니 오직 영천의병진만 홀로 고군분투 하면서 서천 물가에서 행오로 막고 서로 짖밟으며 죽음으로써 적과 싸웠다,
[ 충신효자 생원 정의번과 종노 억수의 마지막 전투 ,영천10열사 순절사들 ]
서천(문천)전투 방어전에 각지 의병장들이 만류하면서 후퇴하기 바빳으나 그러나 영천의병대장 호수 선생께서는 "우리가 여기서 물러난다면 두번다시 복성이 불가 하여 나라를 구하는데 어려울것이라" 하시고 영천의군 들에게 명 하기를 '"우리는 죽기로 작정하고 목숨을 바쳐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진흙탕 속에서 건져내어 백성들의 안위와 나라를 구 할 뿐이다" 하시고 좌우 방어선 에는 선생의 장남 생원 백암 의번과 생원 최인제, 유생 이득룡,손응현,정석남,김대해,등등 에게 돌격 장수로 명하고 선생과 창대 대임,대인,등이 적의 목을 베며 밀고 적진을 들어가니 수짜가 많은 왜병속에 선생이 포위 되니 선생의 장남 생원 (宜藩)의번,이 부공을 구하기위해 수 차례나 적진을 가르며 목을 베나 아버지가 보이질 않으니 백암 의번은 아버지가 왜적에게 죽은줄만 알고 어릴때 부터 시종 하든 종노 억수에게 말하기를" [억수야 ! 나는 아버지의 원수를 갑고 여기서 죽을 것이나 너는 여기에서 죽을것 까진 없으니 너는 이 길로 고향으로 곳장 가거라"] 하니" 종노 억수가 울면서 말하기를" [주인과 종의 분수가 군신과 부자와 같은데 종이 평생 먹여주신 주인을 버리고 어데로 가겠나이까,"] 하고는 말에 올라 주인을 뒤 따라 말에게 채찍을 치면서 적진으로 돌진 하였다, 의번이 말 위에서 활을 가지고 적을 쏘니 도적들이 화살에 맞아 꺼꾸라 지면서 감히 가까이 오지를 못 하였다, 그러나 화살은 다 하고 활이 부러지니 칼을 뽑아 독수리 처럼 날아 좌우우돌 하면서 적을 치고 포위를 뚫어서 부공을 찾아 퇴로를 만들고 부공과 나머지 의진부장을 구하고 생원 정의번 자신은 적에게 수십군데의 창을 받아 왜적에게 잡히게 되었으나 분발하고 꾸짖으며 굽히지 아니하고 종노 (億壽)억수와 함께 충효에 불타는 장열한 죽음을 맞이 했다, 또한 여기 이 서천전투에서 영천의 많은 의병장수들이 내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우다 순절 하였다,이날이 바로 때는 임진년(1592년) 8월21일 생원 백암공 휘:의번의 나이 33세 였습니다,
(학봉 김성일 장계,호수일기,창대일기)등등 기록,
*경주산성 외성*
선생은 장남 의번을 이 전투에서 잃고서 후퇴 하여 진영을 다시 재 정비하고 있을때 군사 박진,등 이 찾아와 전투의 작전실패를 인정하고 선생에게 사과 하고서 군사들을 정비하여 다음날 다시 적을 격살하기로 하여 다음날에 적진으로 비격진천뢰를 발사하며 신기전으로 수 많은 화공으로 진격하여 끝내 적들은 선멸하고 나머지 도적들은 서생포로 도망 가면서 승리하여 경주성을 탈환하였다,
당시 영천복성전과 경주성 탈환 전투는 지방 선비들이 의병을 모아 치열한 전투의 전승으로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승전과 동등한 전과라 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수선생 정세아는 임진왜란이 평정되자 나랏님이 전공을 세운 선비와 장수들에게 공상을 나누어 주는것에 모두들 다투어 받았으나 선생은 공적을 남에게 나누어 주고 본인은 취하지 아니하였다, 이를 두고 학봉 김성일,등 많은 사람들이 어찌하여 부귀를 마다하십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人君이 욕되면 신하가 죽는 것은 직분이고 국가의 위급한데 따랐을 뿐,功名을 생각 했던바가 아니다, 다행이도 하늘의 신령한 힘을 입어 한번 거사함에 온전히 보장 할 수 있었으면 족한 것이지 그 무엇을 원하겠나]" 하셨다,(학봉 일고)
*비격 진천뢰
*신기전 * 한 번에 많은 화살을 쏜다,
서천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경주성을 복성한후에 호수 선생께서 시신을 찾으려 가 보니 때는 무더운 한 여름이라 우거진 잡초속에 백골이 산더미처럼 쌓여 시신을 분별할 수 없어 찾지 못하고 화살로 초혼하여 집으로 돌아와 (靈座)령좌를 설치하여 선생은 아들의 시신을 거두지 못하여 허공을 맴도는 忠魂충혼,孝魂이 의거할 곳이 없음을 슬퍼하시고 (遠近)원근 (宜藩)의번의 옛 친구에게 만사와 제문을 두루 구해서 입던 옷과 신을 함께 관 속에 넣어 장사 지내니 세상 사람들이 이 무덤을 詩塚시총 이라 하여 지나는 사람마다 슬퍼했다 한다,
이러한 명성을 듣고서 당시 정성오리 이원익 대감이 한양에서 당파싸움에 실정이나 벼슬을 휴직하고 그길로 한양에서 영천 노항까지 찾아와 호수공과 당시 시국에 대한 중대사를 논의 하시고 한양으로 올라가 임금에게 고하여 호수공에게 벼슬을 여러차례 내리지만 선생께서는 모두 사양하고나아가지 않았다가 오리정승 이원익 대감의 간청에 의해 황산도 찰방으로 나가서 고을을 군자로서 잘 다스리니 백성들과 병사들이 모두 어버이처럼 따랏고, 벼슬은 연이어 선교랑,승훈랑,으로 승진하였으나 선생께서는 모두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만 연구하셨다,
황산도(현:물금)를 떠나시니 떠난후에 고을 선비들과 군민들이 선생의 선덕비를 세웠다,
*맨 뒤쪽이 호수공 정세아 묘소이나 비석만 보인다,그 다음이 호수공의4자 호군공 수번의 묘소,그 다음의 보이는 해수돌 비석이 시총, 그리고 종노 억수의 묘소,
*鄭宜藩정의번=본관은 迎日 烏川 호수공 鄭世雅정세아의 4남중 장남으로 1560년 영천 노항에서 출생하여 字는 衛甫위보,號는 栢巖백암으로 부공의 연원을 이어받아 25세에 선조18년(1585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33세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공과 동생 安藩안번,과 함께 창의하여 박연전투,고촌전투,자인전투,영천성전투,등등 많은 공을 세우고 경주복성 전투인 서천전투에서 충효를 다 하고 순절하시니, 임금이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고 충효정려가 내려졌고 또 이조참판에 가증되어 영천 환고사에 父公과 함께 배향되었다,
*환고 세덕사*
*호수공께서 이렇게 아들을 묻고 나서 자호정사에서 詩를 읊조린 첫 구절에 [여러산이 에워산 한 시냇 머리에 몇가지 솔처마는 여름도 가을 이라네]이 구절이 전장에서 많은 젊은 장수와 자식을 잃은 슬픔의 심정을 두글자로 품어낸 구슬픈 심정의 구절이랍니다,
호수공께서 사후에 나라님이 충효을 다 한 백암공 의번에게 충신효자의 정문이 내려졌고 또 한 호수공 정세아에게 통순대부 병조참의,병조판서를 증직하여 시호를 강직한 성품이라 하여 (剛)강 이라하고 선비로서 충신의 의로움을 다 했다하여 (義)의 라 하여 (剛義)강의,라는 시호와 신도비문을 내렸으며 자손이 영원히 대대손손으로 신위를 모셔 제사를 지내라는 불천위가 내려졌습니다,
(영천시 대전동 호수종택에서,여름,불천위와 겨울,불천위가 있다)
*경주서천전투 영천 순절10현 의사를 배향한 고천서원*
*영천의사 10현 순절의사는 다음과 같고 이분들이 모두 고천서원에 배향 되어 있다,
1.경주인,김대해=자는 홍도,호는 소곡,으로 영천 북안 반계리 사람,
2.경주인,김연=자는 언홍,호는 노항,으로 영천 자양 노항리 사람,
3.벽진,이득룡=자,사운,호는 추계,로 영천 고경 추곡리 사람,
4.벽진,이득린=자,성상,호는 대재,로 영천 고경 추곡리,
5.영천이씨,이영근=자,경무.호,쌍계,로 영천 쌍계리 사람,
6.성주인,이지암=자,여욱,호는 사촌,으로 영천 쌍계리 사람,
7.벽진,이일장=자,성보,호는 남전,으로 영천 고경 추곡리,
8.오천,정석남=자,대경,이요 호는 충효재,로 영천 북안 통천리 사람으로 (감찰공 휘:귀소,의 후손)이다
9.경주인,손응현=자,자임,호는 남계,로 청송 현서면 문천리 사람,
10.영천인,최인재=1588년에 생원으로 등제하고 자는 성부,호는 만정,으로 영천 망정동 사람,
*창대공 휘:정대임,은 영천 창구동 창대서원에 배향됬으며,그리고 원호공 휘:천리,와 복제공 휘:담,은 영천 삼창 백의사,에서 배향되고 있음,(모두 2파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