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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주공아파트 19평에 살던 저는 이제 6살난 큰 아이와 4살난 둘째 두 딸을 키우고 있었고 제 마누라는 조선소옆 골목에서 부식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누라 버는 돈이 저보다 많았죠, 그래도 마산에서 부잣집 아홉째인 제 마누라는 고무통을 이고지고 동태며 채소,콩나물을 시내버스에 싣고 떼어와 채소는 다듬어팔고 남는 것은 반찬만들며 억척이 이었고 아이들은 잘 커주고 있을 때입니다.
이영춘의 말대로 위생도구를 챙겨 거제 고현의 대명장여관에 도착하니 다들 와서 기다리더군요.
이동. 마산 크리스탈호텔 한식방에 합숙합니다. 하루가 지나 삼성동방연수원인 용인 자연농원으로 옮겨지고 우리는 밖에서 열쇠잠금을 당한 채 야간통행금지되죠. 이튿날 저희는 제일모직탁구단 28인승버스에 실려 땅굴견학, 63빌딩관람, 기타여러곳을 배회하다 저녁먹고 기사가 가는대로 낯선 도시 뒷골목에 내려집니다. 매음굴... 평택역옆 사창가에 내려진 일행은 인솔자가 미리 정해놓은 창녀촌 쪽방에서 집단 매춘을 경험합니다.
이 집단매춘으로 전부 벙어리가 되고 그렇게 삼성그룹비서실에서 나온 방인배,이상배에 의해 처절한 노예로 전락합니다. 이들이 노조파괴마술사 이상배 삼성전자 방인배전무의 실체입니다. 한 놈은 천벌받아 암으로 돼졌습니다. 레스링선수 김일에게 병문안가서 일억을 쾌척했던 자입니다.
10여일 후 부산연수원 저와 양광길이 반항하여 헤쳐모여... 저는 부산역옆 외숙집에 피신하고 인사부 전흥식(삼성정밀화학전무.지금은 계열사 사장인가(?)하는 넘)이 셋째 처남집에 피신해있던 저와 가족에게 돈 30만원을 주며 고향에 가 있으라 하더군요.
제 처가 하던 부식가계는 데모대에 의해 부서지고 아파트 집안의 장롱은 엎어놓고 밟아 뒷면에 판자가 없는 상태로 제가 애지중지하던 난들은 송두리채 3개만 남기고 없어집니다. 제 처는 수두를 앓던 둘째를 들쳐업고 감시망을 틈타 평소 안면있던 약국부인으로부터 도움으로 승용차 뒷편에 아이들을 담요에 감싸 숨기고 거제를 빠져나와 부산처남집에 와 있었습니다.
이 때 후유증으로 둘째는 경기를하며 자랍니다.
저는 이 불합리한 사건에 어찌해볼양으로 거제에 숨어듭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는지 당시 인사부사원 설인환(이후 도장부장하다 과로사하였으나 산재적용도 외면당함.)이 나와 거제 해금강으로 피신시킵니다. 이영춘은 다시 통영을 통해 부산으로 되돌려보냅니다.
제가 이때 좀더 현명했더라면 오명을 벗을 기회였으나 당시 제나이 32... 거대조직 삼성에 맞서 저는 한낱 무지랭이였죠.
전흥식과의 만남에서 전배를 종용받고 그져 아이들하고 살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언양삼성전관(현 SDI)인사과장명령을 받고 언양으로 방구하러 갑니다. 언양 우체국옆 이층가옥의 이층방을 얻고 돌아오던 중 택시기사님께서 저희 차림새를 보고 하는 말... 무슨 일 있습니까? 저희 가족은 5월 말을 앞둔 시기에 도망자의 행색으로 겨울옷을 입고있어 경험 많으신 기사님 눈에 밟힌겁니다. 전 자초지경을 말하고 그 기사님으로 부터 이 얘기를 듣습니다. 자기 여동생과 사귀던 매제될 아이가 노조문제로 저와 같은 처지였고 결국 정신병자되었다는 것을...
삼성이란 거대조직에 맞서면 결국 그렇게 될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전 그 길로 울산 첫째 동서에게 갑니다. 당시 동서는 삼성물산쪽과 무역경험이 있던 이북출신 임모씨로 제게 아랫것들 아무도 만나지 말고 삼성본사에 가서 해결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 그 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최서방... 서울가서 따지라우..."
전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향합니다.
삼성본관...
저와 아이들이 택시에서 내리자 현 세콤들이 아우성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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