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는 맑았다가 오후부터 흐려진다던 일기예보와는 달리 아침부터 하늘이 뿌엿다. 산행모임 북박이 멤버 2명이 몸컨디션이 안좋다며 불참하니 상호하고 단 둘이서 데이트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올림픽대로를 시원하게 달려서 팔당대교를 건너자마자 팔당역 근처에 주차하고 가파르게 솟아오른 예봉산 정상을 향해 출발하였다.
예봉산에는 1번에서 6번까지의 등산코스가 있는데 어쩌다 보니 가장 단조롭고 거의 직선으로 오르는 5번 코스를 택하게됐다. 지난번 이곳 산행시에는 더워서 꽤나 힘들어했던 기억이 났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느린 속도로 차근차근 그러나 꾸준히 오르다 보니 어느새 정상에 올라 있었다. 약 10평 남짓한 정상은 좌판 깔고 점심먹는 등산객들로 발디딜 틈도 없이 만원이어서 정상에 오른 기분을 즐길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바로 하산했다.
정상에서 쫓기다시피 내려온 서운한 기분은 하산 도중에 일어난 2가지 작은 사건(?)들로 인하여 말끔히 해소됐다. 앞서 가던 40대 부부와 우연히 대화를 터서 예봉산의 가을단풍이 좋았다는 얘기를 하면서 내려오는데 부인이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남편의 코멘트가 걸작이다. 퉁명스런 어조로 "그렇게 자빠지면 넘어지지." 라고 핀잔을 주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쿡-"하고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분들도 말 실수를 눈치채고 따라 웃었다. "우리는 넘어지면 자빠지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자빠져도 넘어지는 군요."하고 농을 걸었더니 박장대소를 한다. 덕분에 잘 웃었다고 인사치레까지 하고 헤어졌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한동안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못하고 내려오는데 길에 등산용 상의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상호가 주어들었다. 그 옷의 임자를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왔을 때 어느 젊은 여성이 빠른 속도로 우리를 지나쳐 갔는데 그 여자의 배낭뒤에 묶여서 덜렁거리던 옷이 바로 우리가 발견한 그 옷인 것이다. 옷 속에는 의료보험카드와 자동차열쇄가 들어 있었으므로 분명히 다시 뒤돌아 올 것인데 그때 만나면 돌려줄 심산으로 들고 내려왔다.
얼마되지 않아서 남자 한 명과 여자 두명이 쉬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그중에 한 여자가 눈치를 채고 반기며 다가왔다. 걱정하던 차에 그리고 다시 뒤돌아 오르려고 채비를 하던 참에 옷을 들고 내려 오는 것을 보니 얼마나 반가우랴. 떡을 집어줘, 과일 깎아줘, 소주를 권하는 등등 대접이 극진하다. 나는 소주는 입에도 안대고 떡과 과일은 한 두 개 받아 먹었을 뿐인데, 상호는 완전히 딴 사람이 돼서 넙죽 넙죽 잘도 받아 먹더구먼. 눈두덩이가 벌게져서 술마신 티를 냈다. 전화번호도 받고 이번 목요일에 등산도 같이 뭐 어쩌구 저쩌구...(이하 생략)
점심은 분당 정자동까지 와서 추어탕으로 맛있게 먹었다. 결론이 가관이다. 그 여자 전화번호를 상호가 자기 헨드폰에 잘난척 하면서 저장했다더니만, 점심 먹으면서 확인해 보니 뭐가 잘못됐는지 전화번호가 온데간데 없다는 것이다. 진짜 없어진 것인지 딴 속셈이 있는 지는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