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회고록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저 / 조일문. 신복룡 편저
올 12월 4일은 갑신정변이 일어 난지 135년째 되는 날이다.
3일 천하로 끝나버린 갑신정변은 주모자들이 양반 관리이고 그들이 남긴 기록이 있어서 우리는 그 전모를 알수 있다.
주모자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이 직접 쓴 갑신정변에 대한 글은 교과서에서 배운 정변과 그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새롭게 해주었다.
갑신정변은 부귀영화의 뜬구름을 잡으려는 젊은이들의 환상이 아니었고 나라와 백성들을 사랑하는 청년의 정의감과 충정의 발로였다. 비록 외세를 등에 업고 정변을 기도한 그들의 거사 준비가 부족하고 미숙하고 허술하였으며(거사에 대한 소문이 영국공사, 독일공사에게 이미 알려졌으며 원세개도 감을 잡고 있었다.)거사시에는 단호하지 못하였으며 지원을 약속했던 일본의 배신으로 낭패를 당한 뒤 청군의 개입으로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였지만 그들은 사뭇 진지하였다.
⌜갑신정변 회고록⌟은
개혁의 의지를 가진 피 끓는 젊은이들, 그들의 고뇌, 좌절과 열망 그리고 타락한 당시 권신들의 부패상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김옥균의 ⌜갑신일록⌟번역문과 원문,
박영효의 ⌜갑신정변⌟,
이광수의 ⌜박영효 씨를 만난 이야기: 갑신정변회고록⌟
서재필의 ⌜회고 갑신정변⌟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독자들은 갑신정변을 일으킨 자들이 쓴 1차 사료를 직접 읽는 경이감을 맛보며
정변의 시작과 종말까지의 과정을 신문을 통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처럼 읽을 수 있어 흥미롭다.
특별히 김옥균의 12월 2일자 일기에 나오는 '별궁에 방화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각자에게 암호를 주고 '천' (하늘 천) 또는 일본 말로 '요로시'로 응하게 하는 12가지 또는 12단계의 지시, 지휘사항은 거사를 한 눈으로 보며 마음을 졸이게 만든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에 참석한 내외 인사들 좌석배치도
갑신정변의 주모자는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이다.
그 나머지 인물들 예를 들자면 서재필과 변수 등은 그들이 정변을 준비하며 훈련시킨 청년들로서 거사에 행동대원으로 참여하여 군인을 동원하는 등등의 임무를 맡았다.
이들 주모자의 공통점은
첫째 박규수 문하에서 실학을 배운 일,
둘째 역관 오경석과 교제를 통하여 청나라의 진보적인 서적을 섭렵하며 청나라의 ‘양무론’, ‘변법론’ 등
청나라의 개명 사조의 영향을 받은 일,
셋째 이동인을 통하여 일본에 관한 정보를 얻고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가르침을 받은 일,
넷째 서구문물을 수용한 일, 서구제국과의 조약, 서구인들의 서울 거주,
구미사절단의 유럽과 미국 유람 등으로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깨어난 일,
다섯째 사대부 가문의 출신이지만 불교에 대하여 개방적인 자세를 가진 점이다.
이런 공통점을 가진 피 끓는 4인방은 반상과 양천의 계급을 타파하는 민권 존중 사상,
중국으로 부터의 독립,
국토와 산업개발을 통한 부국강병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봉건적인 의식과 폭력과 음모로 척족세력의 기득권 수호를 위해 청에 기생하며 나라와 백성을 고사시키고 있는 사대당에 블록킹 당하였으므로
민비를 비롯한 그 일당을 제거하지 않고는 그들의 이상을 구현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고심 끝에 나라와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생명을 건 한 수를 두고자 하였다.
바로 그 한 수가 ⌜갑신정변⌟으로 나타났다.
갑신정변의 핵심인물인 김옥균은 일본의 발전과 서구 문물에 대한 관심으로
1881년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1882년 초까지 머물며 유람하였다. 그는 일본의 선각자, 게이오의숙의 창시자인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으며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2차 방문은 1882년 8월 임오군란 사절사로 가는 박영효의 종사관이 되어 그를 수행하여 일본의 각계각층을 접촉하였다.
그의 3차 방문은 1883년 6월 신식군대 양성을 위한 차관 교섭을 위해 갔으나 교섭에 실패를 하였다. 교섭의 실패와 민씨 세도가 주는 절망감 속에서는 그는 ‘무력에 의한 혁명’을 시도하기로 결심하였다.
김옥균과 개화파 인사들은 청불전쟁으로 조선에 대한 청국의 관심이 소홀해진 것을 틈타서 청의 세력을 몰아내고 민씨세도를 끝장내기로 하였다.
갑신정변의 ‘3일천하’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12월 4일 우정국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시작된 거사는 고종을 경우궁으로 안치하고
개화파 내각을 반포하고
12월 5일 고종의 요청으로 왕의 거처를 경우궁에서 대궐로 옮기고 14개조 개혁안을 상신하고
12월 6일 일본 군인들이 왕궁 수비를 중지하고 철수. 원세개가 군사 600명을 거느리고 입궐, 청군과 개화파 군인들 전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다케조에를 따라 치 도세마루호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는 혁명 운동의 모의는 김옥균이 귀국하고 가을에 일본 공사 다케조에가 부임하였을 때 이미 성립되었으며 걸림돌인 청나라 군대를 일본군의 힘으로 제거하는 것이 관건이어서 여러 번 주저하다가 다케조에의 확답을 듣고 개혁을 꾀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혁명의 목표를
1. 비상 수단으로써 민영익 이하 사대당의 거두를 제거하고 청국의 간섭을 끊고 독립국의 체면을 바로 잡을 것
2. 궁중의 요망한 무리를 소탕하여 민비의 정사 간여를 금단할 것
3. 주상에게 요청하여 튼튼한 책임내각을 조직하게 할 것으로 세우고
여론도, 정당도, 병력도 없으므로 나라를 어지럽히는 권신을 주륙하고 군왕의 신변을 옹호하며 정령의 남발을 막는 길 외에는
다른 것이 없으므로 희생을 각오하고 비상수단을 쓰기로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는 갑신정변 주요 추진자와 역할을 아래와 같다고 한다.
홍영식 : 모의 총람의 제일인자
박영효 : 집행의 총지휘
서광범 : 참모 계획
김옥균 : 일본 공사관과의 교섭과 통역을 맡음
서재필 : 대문을 막고 병사를 영솔함
이규완, 윤경순 : 사관학교 생도 10여명을 인솔하고 방화와 주륙 등 하수 임무 일체를 맡음
병 력 : 이미 광주유수 재임 때에 양성한 어영병 1천 명은 이때 교관 신복모를 거쳐 벌서 나 의 수하가 되었으며, 일본의 원병이 약 200명이 있었다.
적병은 정복 군인 400명과 사복 잡졸이 8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박영효는 광주유수로 발령을 받았을 때 어영병을 양성하였다.
그는 일본의 군인 철수와 청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났고 정변 가담자들은 살육당하거나 망명을 하였으며 조선은 10년 동안 청나라 비호 아래 민비와 척족 정권의 발호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서 마침내 동학당의 봉기와 청일전쟁의 원인을 제공하였으며 멸망에 이르렀다고 한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을 권력을 잡기 위한 정치혁명이 아닌 민중의 경제적. 사회적 복리를 위한 혁명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목적과 의도가 선함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실패를 했던 것은 일반 민중의 성원 부족과 혁명 추진자들이 외세를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혁명의 정신적인 지도자인 김옥균이 ‘신지식을 주입하고 일신기술을 채용함으로써 정부나 일반사회의 구태 인습을 일변시켜야 할 필요를 확각’하였으며 구미문명을 일시에 따라잡은
일본의 유신을 모델로 치고 조선을 개혁시키고자 하여 고종과 민비에게 기피의 대상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김옥균은 끈질기게 고종에게 개혁안을 올렸으며 고종은 그의 개혁안에 대하여 찬성과 반대를 번복하였으나 과학기술 연구의 명목으로 귀족의 자녀들을 일본 유학시키는 것은 허가를 하였다.
서재필은 김옥균의 권유로 도야마학교에서 군인이 되기 위해 ‘무예’를 배웠으며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고 하니 우리는 우리나라를 아세아의 프랑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꿈과 야심을 신뢰하고 우리의 전로에 무엇이 닥쳐오든지 우리의 책임을 이행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으로 김옥균을 추종하였으며 혁명에 참여를 하였다고 고백한다.
그는 회고록을 마무리하면서 ‘독립당의 계획에는 부실한 것도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제일 큰 패인은 그 계획에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이며 민중의 조직과 후원이 없이 다만 몇 사람의 선구자만으로 성취된 개혁은 없다고 회고한다.
민권, 인권의 개념과 대립되는 왕권, 사대부와 귀족의 개념을 뛰어넘기에
개화파의 몸은 왕의 일부였으며 왕의 식탁에 앉은 자들이었고
봉건제도를 타파하기에는 그들은 가진 자들로서 조선 백성의 고통과 삶을 너무 몰랐고
혁명을 성취하기에는 단호하지도 독하지못하였으며 지나치게 의존적이었다.
대의명분을 위해서? 아니면 그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일까?
부정부패의 정점이요 핵심인 왕과 왕비를 그대로 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왕과 왕비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
그들의 거사는 '삼일천하'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
아쉽다!
갑신정변이 성공했다면 한국의 역사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텐데.
목 차
간행사
해제
⌜갑신일문⌟ 역문
⌜갑신일문⌟ 부 원문 김옥균
⌜갑신정변⌟ 박영효
⌜박영효 씨를 만난 이야기 : 갑신정변 회고록⌟ 이광수
⌜회고 갑신정변⌟ 서재필
영문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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