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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①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②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③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④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⑤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⑥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⑦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
주님기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하느님과 그 영광에 대한 부분이 한 가지이고, 우리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 또 한 가지입니다. 이렇게 크게는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만, 전체적인 내용을 다시 말한다면, 작게 나누어서 일곱 가지 내용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앞의 세 가지는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내용이고, 뒤의 네 가지는 우리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몇 가지 부분으로 나누는지 그 내용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웬만한 지능이나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관심이겠지요? 관심이 없고 흥미가 없다면 세상에 그 어떤 일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말에 ‘평양 감사(監司=관찰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가 신앙인의 길을 걷는다거나, 신앙인으로 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겠다는 약속을 하고 난 다음에 처음으로 가져야 할 생각이 무엇인지 그 기준을 올바로 갖지 않는다면, 주님의 기도를 아무리 멋있는 말로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의미 없을 일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그 기도가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가장 잘 담고 있다고 하는 의도에서 하는 표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제자로서 올바른 태도인지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이 스승으로서 응답하신 것이니 하느님이 뜻을 가장 잘 담았다고 말하는 것이고, 자신의 삶이 하느님의 뜻에 가장 잘 일치하는 방법을 알려주시는 내용이 뒷부분에 함께 있으니 그것을 가리켜 하느님이 완전하신 것 같이 우리도 완전하게 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불어 가장 완벽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주님기도에 대한 윤곽적인 모습을 살피고.....좀 더 자세하게 보도록 하죠.
1.2.0.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 우리 어머니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신앙이 여성을 무시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언젠가부터 갑자기(?) 여권신장을 이야기하는 세상이 되고 난 다음부터 그런 일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성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여성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100년 혹은 150년 전의 일이니, 그 이전에 형성된 여러 가지 주장들에는 상대적으로 여성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는 내용들이 적습니다.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불만이 있더라도 감안하고 들어야 할 일입니다.
하늘은 실제로 끝이 없습니다. 비행기를 타면 날아가는 고도가 때로는 8000미터 위, 때로는 10000미터 위로 일정합니다. 비행기가 날아가는 높이를 직접 잰 것은 아니지만, 비행기를 타면 표시되는 화면에 가끔씩 그렇게 나옵니다. 시속 700킬로미터나 800킬로미터, 고도는 1만 몇천 피트, 그리고 그 높이를 미터로 환산해서 표시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기도의 시작에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다고 우리가 전제하고 들어가지만, 실제로 우리가 눈으로 하느님이 어느 곳에 잘 계신지 확인하고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시시콜콜하게 이런 부분까지는 설명을 하지 않으셨습니다만, 우리는 질문하고 궁금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해주시지 않은 것, 제자들이 궁금하게 여기지 않아서 질문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만,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우리 사람들의 힘이나 생각이 적용되어 함부로 할 수 없는 곳이라는 말로 알아들었으면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동원하여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권력의 맛이겠지요? 아마 그런 환상 때문에 사람들은 한 자리, 높은 곳에 올라서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때로는 노력을 하기도 하지만, 남을 모함하기도 하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렇게 이용된 사람은 토사구팽(兔死狗烹, ‘교토사주구팽(狡免死走狗烹)’: 곧 날쌘 토끼가 죽으니 사냥개는 소용없이 되어 삶아 먹힌다는 뜻으로, 필요할 때는 쓰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야박하게 버리는 경우를 이르는 말) 교(狡,교활하다, 간교하다) 되기 십상입니다. 하느님이 하늘에 계신다 함은 우리 생각에 따라서 그 하느님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있다고 알아들으면 충분할 일입니다.
1.2.1. ①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이름은 한 사람의 존재를 가리키는 대명사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유교식의 제사를 지내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나 혹은 전통적인 방식에서 제사를 지내는 경우, 기억해야할 분들의 이름을 적습니다. 우리 손으로 쓰는 몇 글자, 그 이름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도 알려주지는 않는 일입니다만, 우리는 그렇게 쓰는 이름이 우리가 뵙고 만났던 분, 내 기억 속에 있고 언젠가 내 곁이 사셨던 분이라고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종이에 이름을 써서 내 앞에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때에 적은 이름은 단순히 종이에 적은 글자만은 아닙니다. 사람의 한 존재를 가리키는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무시할 수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되는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처럼, 이름은 큰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전하는 복음에도 이름에 관한 이야기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무덤가 사이를 지나시다가 몸에 쇠줄을 감은 마귀들린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자 그가 무덤가에서 뛰어나오면서, 예수님을 향하여 자기들을 괴롭히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아직은 마귀들린 자기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발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러자 그 앞에서 길길이 날뛰던 마귀 들렸던 자는 자기 이름을 ‘수효가 많아서 군대라고 한다’는 말을 하고 갑자기 고분고분해집니다. 성경의 세계에서 이름을 묻는 힘을 가졌거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상대방에 대한 통솔권을 갖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자기 이름을 밝힌 자, 무덤가에 쇠줄과 함께 살았던 그는 갑작스레, 호숫가 위 비탈에 살고 있었던 돼지들 속으로라도 가게 해달라고 청하면서 예수님의 시선에서 멀어지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여러분들이 복음서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름은 그렇게 한 존재의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그 이름이 거룩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기도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고, 하느님과 그 앞의 상황을 말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세계와는 달리 계신 분이니, 합당한 존경을 받으시기를 빈다는 존경의 표현이요, 기도로 알아들으면 될 이야기입니다.
1.2.2. ②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는 하늘나라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느님의 뜻이 통하는 곳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애석하게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구체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하느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 적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뜻이 적용되는 곳은 작게 말해서 신앙공동체부터 시작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에끌레시아라는 이름으로 모인 곳,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겠다는 것을 첫째 삶의 목표로 세우고 살아가는 우리들 안에서도 때로는 하느님의 뜻을 말로만 반기고 실제 삶에서는 전혀 그렇게 대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도 있습니다. 애석한 일이지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바란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내가 살아가는 이곳부터 하느님의 뜻이 통용되는 곳으로 바꾸겠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렇게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그저 바람만으로 충분할 일은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분야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노력과 행동이 가미되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1.2.3. ③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늘에 올라가서, 그 하늘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그 거리를 짐작할 수 있을 거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싶지만 그것이 마음처럼 되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힘이 적용되어 불의와 불편부당함으로 바뀌기 쉬운 것이 세상인데, 이 세상에 영원불변하고, 만선만덕의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도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만으로는 성취되지 않을 일입니다.
마태오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땅은 하느님의 발판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하지 못한다. 따라서 네가 해야 할 말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 5장부터 나오는 산상수훈, 또는 산위에서 가르쳐주신 긴 이야기에 나오는 한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모습이나 모양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혹시 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천체의 움직임이나 조화라고나 할까요? 아마 그 정도일 것입니다. 하늘 저 위, 우주공간에 떠도는 돌덩어리들은 무지하게 많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돌덩어리들이 지구에 사는 우리들에게 대부분은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이 지구에는 대기권이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매우 튼튼한 벽이 있어서, 우리를 보호해준다고 하지요. 창세기를 썼던 사람들이 가졌던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면,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을 닮아 최고의 존재로 창조해주신 인간을 보호하기 위하여 매우 튼튼한 장치를 해놓으신 것입니다. 그 힘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적용된다면 우리의 삶은 안타까움과 힘겨움이 없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도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적용되도록 협조하면서 살아야 할 일입니다.
1.3 지금까지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 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하느님 찬미’의 부분을 짧게 살폈습니다. 우리가 말로만 바란다고 해서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분명 우리가 해야 할 몫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1.4. 이제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될 부분을 자세하게 살피는 시간입니다. 사람의 바람과 요구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네 가지 내용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그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힘듭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그것 네 가지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일거고, 두 번째는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수없이 외우고 또 바치지만 그 올바른 정신을 잊어버리고 말로만 바치는 탓에 있을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개괄적인 이야기는 접어두고.
1.4.1 ④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사람에게는 하루 삶에 필요한 것이 참 많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질문하면 과연 대답이 조금이라도 달라질까요? 달라진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하루 삶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사람의 욕심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2리터쯤 되는 적당량의 물과 우리의 생명이 정지되지 않을 만큼의 음식이면 그런대로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받아들일 사람은 절대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벌어서 오늘 다 쓰나요? 남겨놨다가 벌지 못할지도 모를 내일에 쓸 수도 있고, 내 삶에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때 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모으고, 때로는 재산을 모으는 일에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며, 나만 옳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살지 않느냐고 희한하에 합리화하는 소리를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 알았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복음서에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해에 밭에서 소출을 많이 얻은 부자가 고민합니다. 이거 큰일났네, 이렇게 많이 얻은 곡식을 쌓아둘 창고가 없으니, 어떻게 하지? 그러가다 부자가 찾아낸 방법이 기존에 자기가 갖고 있던 창고를 헐고 더 큰 것을 지어서, 그 안에 모든 재산을 쌓아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내가 밭에서 얻은 곡식을 저렇게 많이 쌓아놓았으니....이제 네가 할 일은 실컷 쉬고 마시고 즐기는 뿐이지 않겠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자기 앞가림만 생각하고 삽니다만, 예수님의 말씀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너에게서 네 영혼이 떠나갈 터인데, 네가 그렇게 많이 쌓아놓은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준비해놓는 사람이지만, 하느님에게 인색한 사람은 이와같을 것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날에 필요한 것을 그날에 얻고, 그날에 필요한 것 이외에 우리가 더 바라지 않을 수 있다면 세상에 잘못될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이런 내용을 우리가 이론으로만 알고 욕심을 다스리거나 조절하는 입장에서 알아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1.4.2. ⑤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용서에 대한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내용에도 용서에 대한 것이 나오기는 했습니다만, 용서는 세상에 사는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방법입니다. 제가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용서는 하느님의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전혀 실천하지 못할 일도 아닙니다.
단 조건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조건도 주고받는 경우처럼, 순서를 잘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먼저 용서를 할 줄 알아야 하느님께 내가 삶에서 저지른 잘못들에 대해서도 용서를 바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라고 말할 것은 없습니다만, 많은 경우 우리는 남이 나를 먼저 용서해주어야 내가 그만큼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어릴 때의 삶을 살펴보면 대부분 그렇게 움직이지요? 내 배가 불러야 남의 배가 고픈지 어떠한 지 돌아본다는 것은 아동기의 삶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아동기, 혹은 유아기의 삶에서 바뀐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인으로 올바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기도하라, 그리고 그 기도가 하느님 앞에 전달됐고, 그 기도가 우리들 삶에 실현되었다고 믿기만 한다면 그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은 앞ㆍ뒤를 정확히 꿰는 계산의 논리에서만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1.4.3. ⑥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유혹이라는 말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우리를 유혹하신다는 표현을 가끔씩 들을 수 있는데, 합당한 소리가 아님을 기억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시험하시기는 합니다. 그 시험이란, 우리가 인간적인 조건에 빠져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말고, 마음과 생각을 다져서 우리를 유혹으로 이끌고 가는 힘을 이기게끔 하는 역할이 있을 때, 하느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유혹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옵니다. 절대로 미운 녀석이나 추녀나 아주 징그러운 모습으로만 이 유혹이 우리에게 온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는 아주 예쁜 얼굴로, 때로는 아주 향기로운 모습으로, 때로는 인간의 자만심을 한껏 부풀리는 방법으로 우리 삶에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런 유혹을 올바로 볼 줄 안다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살아왔던 좋은 일들이나 삶의 원칙을 잠시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거 지금하지 않아도 돼, 5분이나 10분이나 한 달이나 일년 뒤에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어차피 네가 할 것인데, 조금 있다가 한다고 난리날 것을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서 우리가 마음속으로 갖는 긴장의 끈을 놓게 만드는 특징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원조들의 설화라고도 합니다만, 뱀의 모습으로 등장한 유혹자는 아름다웠을 여인, 하와에게 다가가서,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과를 먹게 하는데 이런 말을 합니다. ‘이 과일을 먹는다고 네가 죽을 거라구? 노노...., 절대로......네버.... 낫.... 결코, 아니.... 너희가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알고 두려워하신 하느님이 너희로 하여금 먹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것뿐이지.
1.4.4. ⑦악에서 구하소서.
악은 하느님 반대편에 선자의 친구입니다. 전통적인 교리에서 악한 자의 이름은 베엘제불(=이스라엘이 있는 근동지방의 말. ‘파리들의 대왕’이라는 뜻)이라거나, 루치퍼(LUXIFER, 빛을 가진자)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이 악한 자는 하느님에게로 다가가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잡아채서, 자꾸만 뒤로 돌아서게 하려고 합니다. 끊임없는 합리화의 방법을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악으로 가지 않으려면, 먼저 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악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내가 거기에서 피할 수 있지....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착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가 악이 무엇인지 한 번 알게 되면, 그 악은 우리가 자기에게서 도망갈 수 있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이 악은 사람들이 쌓기를 원하는 지식과는 다릅니다. 이 악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악이 무엇인지를 배워서 거기에서 탈출하거나 도망치는 방법을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서 그 악의 위치를 몰아낼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악은 선의 힘 앞에서 자기 명함을 내밀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선 하나만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