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창은 성종 14년(1483)에 생원이 되었다. 이미 서른넷, 늦은 나이였다. 다시 성균관 생활. 모친상을 마치고 조정에 나선 김종직도 만났을 것이다. 또한 75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어전에서 『대학』과 『중용』을 강의한 첫 스승 이관의를 다시 뵌 것도 즐거움이었다. 이때 「율정(栗亭)이관의 선생의 운을 따르다」를 올렸다.
우주와 인간을 탐구하는 공부는 당대 으뜸이시지만
[ 學 究 天 人 冠 一 時]
거친 마을에 지내시며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而 居 陋 巷 不 求 知]
성군께서 특별히 부르시어 다스리는 도리를 물으시고
[聖 君 特 召 問 治 道]
이내 산림으로 돌아가려는 뜻을 받아주셨네
[ 因 許 山 林 意 所 之]
이관의의 학문이 높은 것을 알았던 성종이 벼슬로 붙잡고자 하였으나 나이가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어서 향리로 떠나보내며 곡식과 면포 등을 상급으로 내린 사실을 담담히 적었다.
당시 왕실에서 창덕궁과 수강궁 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승려를 동원한 일이 있었다. 한 달 사역을 마치면 도첩을 내렸는데 성균관 유생이 집단으로 반발하였다. 정여창도 나섰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갔다.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진산군(晉山君) 강희맹(姜希孟)·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우찬성(右贊成) 허종(許琮)·좌참찬(左參贊) 이승소(李承召)·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파(李坡)·공조 판서(工曹判書) 손순효(孫舜孝), 동지사(同知事) 이극기(李克基)·유진(兪鎭), 대사성(大司成) 노자형(盧自亨)과 승지(承旨)들이 입시(入侍)하였는데, 전 찰방(察訪) 이관의(李寬義)를 불러서 《대학(大學)》·《중용(中庸)》을 강(講)하게 하고, 시강관(侍講官) 서거정·허종 등에게 명하여 성리(性理)의 근원을 논하게 하였으며, 또 천지의 도수(度數), 일월 성신(日月星辰), 세차(歲差), 역수(曆數)의 일을 묻자, 이관의가 물음에 따라서 대답하였는데, 혹은 맞고 혹은 맞지 아니하였다. 이관의는 젊어서 시·서(詩書)에 통달하고 성리학(性理學)에 정밀하여 한때의 선비가 함께 추앙하는 바가 되었으나 여러 번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찰방 벼슬로 마쳤는데, 이때의 나이 75세였다. 집이 이천(利川)에 있는데 손순효가 경의(經義)에 밝다 하여 추천한 까닭으로 부른 것이다. 또 노자형과 유진에게 명하여 《주역(周易)》을 강(講)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재상들과 글을 강하고 논난(論難)한 것이 많았으니, 다시 사람을 쓰는 도(道)를 논하는 것이 가하겠다.”
이관의(李寬義)에게 유의(횼衣) 두 벌을 하사하고 묻기를,
“그대가 지금 벼슬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관의가 말하기를,
“신이 이제 늙고 병들어서 벼슬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본도 관찰사(本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여 미두(米豆)를 내려서 권장하게 하였다.
호조(戶曹)에 전지(傳旨)하기를,
“내가 듣건대, 전 찰방(察訪) 이관의(李寬義)가 이학(理學)을 연구하여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하기에 불러서 시험해 물었더니, 논의가 정밀하고 능숙하여 과연 소문과 같으므로 장차 드러나게 기용하여 그 뜻을 위로하고자 하였으나, 이관의가 스스로 나이가 많아 일을 다스릴 수 없다고 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가서 여년(餘年)을 마치고자 하므로, 내가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의복을 하사하고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그런데 이제 흉년으로 생활이 어려울 것이니, 그가 살고 있는 이천(利川) 관청으로 하여금 쌀과 콩 아울러 10석을 하사하여 나의 포장(褒奬)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시험년도】 예종(叡宗) 01 (1469) 증광(增廣) 생원(生員)
【합격등위】 3등 0089
【본인성명】 이점(李?)
【본인본관】 광주(廣州) 이(李)
【본인문과】 정유(丁酉) 1477 춘(春) *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이관의(李寬義)
【부친관직】 율봉도(栗峯道)/찰방(察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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