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동쪽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에 있는 청룡사다.
청룡사는 고려 태조 때 도선국사의 유언으로 창건된 비보사찰(裨補寺刹)이다.
"한양 좌청룡에 청룡사를 짓고 비구니를 주석하게 해 고려왕조의 사직을 오래 유지케 하라."
도선국사는 왕건이 언젠가는 왕위에 오를 것임을 알고 아버지 왕륭(王隆)에게 보낸 유서의 일부다.
도선국사는 이 유서에서 "개경을 중심으로 10대 사찰을 짓고 전국에 3천8백개의 비보사찰을 짓도록 하라"고 말한다.
도선국사가 열반한 뒤 20년만에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하고 고려 태조로 왕위에 오른다.
왕건은 도선국사의 유언에 따라 송악산 만월대 아래 왕씨의 도읍지를 정하고 즉위 2년에 개경주위에 10대사찰을 지었다.
즉위 5년에는 한양의 낙산에 청룡사를 창건하고 혜원비구니를 주지로 삼았다.
비보사찰이란 고려시대, 이름난 곳이나 명산에 절을 세우면 국운을 돕는다는 도참설과 불교 신앙에 따라 세운 절을 일컫는다.
왕건은 당시 정치이념으로 풍수를 적절히 활용했다. 그가 정치적 권위를 얻은 뒤에는 통치이념으로 강화했다.
왕건의 태조유훈으로 일컬어지는 훈요십조(訓要十條)에 풍수의 통치이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훈요십조 3개조에 풍수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제1조, 국가의 대업은 반드시 여러 부처가 호위해 주는 힘에 의지했다. 그러므로 선교(禪敎)사원들을 창건하고
주지들을 파견해 향을 사르고 도를 닦게 함으로써 각각 그 업을 다스리도록 했다. 후세에 간신이 권력을 잡으면
승려들을 사주하고 청탁을 받아 각 업의 사사寺社들을 쟁탈하려 들 것이니 엄격히 금지해야 한다.
제2조, 여러 사원들은 모두 도선이 산수山水의 순역을 미루어 점찍어서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이르기를 “내가 선정한 것 이외에 망령되이 추가로 짓는다면 지덕(地德)을 훼손시켜서 국운이 길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낙산의 청룡사는 한양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왕기(王氣)를 눌러 개경의 왕씨왕조를 번성키 위해 세운 비보사찰이다.
서울의 주산은 백악이다. 그 뒤에 있는 삼각산이 조산이다.
북한산정에 솟아있는 세봉우리인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으로 삼각이란 세개의 뿔을 의미한다.
주산인 북악산의 양쪽으로 좌청룡에 해당되는 것이 동숭동 옛 서울대 뒤쪽의 낙산이고,
우백호에 해당하는 것이 금산형태인 인왕산이며 주산을 마주보고 있는 남산이 안산이다.
그리고 안산을 멀리서 떠 받치고 있는 관악산이 조산이다.
三角山 靑龍寺,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 세 개의 뿔에 걸린 청룡사다.
태조 왕건은 철원의 도피안사에 있던 혜원비구니를 청하여 제 1세 주지로 주석케하였다.
그때 혜원의 나이는 72세였다. 혜원은 청룡사로 와서 16년이란 세월을 지내다가 세수(歲壽) 88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청룡사 초대 주지 혜원 스님을 왕건은 궁예에게 소개받는다.
혜원은 신라 제 46대 문성왕 13년 서기 851년에 계림부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금성태수 김융이요, 어머니 는 경주 최씨였다.
아버지 김융이 신라 제 48대 임금인 경문왕(서기 861~874년)이 승하하여 궁중으로 들어가는 도중
경문왕의 제2비 소생인 용덕왕자(龍德王子 : 弓裔)가 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구출하려고 하다가 상대 위홍(魏弘)등에게
몰려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역적 누명을 쓰고 죽게 된다. 이때 가산이 탕진되고 집안이 적몰된다.
혜원은 24세의 젊은 나이로 몸을 태백산 세달사로 몸을 피하여 허담 화상에게서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혜원은 18세가 되어서 화랑도이었던 예흔랑에게 출가하였다. 20세 되던 해 예흔랑은 국선(國仙 :花郎)으로서 금강산에
들어간 뒤로 계속 소식이 없었다. 그 때 혜원은 친정아버지 금성태수 김융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가 아버지 김융이
역적으로 몰려 죽으므로 몸을 세달사로 피하여 스님이 되었던 것이다.
세달사에 있는 동안 혜원비구니는 용덕왕자인 태허스님을 극진히 아끼고 보호하였다.
신라 제 51대 진성여왕 5년에 나라가 어지럽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자 용덕왕자인 태허스님은 스님의 수도생활에서 인연을 등진다.
그는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다시 양길의 부하가 되어 중을 세우고 진성여왕 8년(서기 894년)에는 명주(溟州)·철원(鐵置.鐵原)을
함락한 뒤 독립하여 장군을 자칭하고, 이듬해 강원도 일대를 세력권 아래에 두어 나라의 규모를 갖추었다.
궁예는 신라 제 52대 효공왕(孝恭王) 5년 (서기901년)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라 칭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
혜원 비구니의 나이가 57세 되던 해에 궁예왕은 혜원 비구니를 청하여 철원의 화개산에 있는 도피안사에 주석(住錫)케 하고
가끔 궁중으로 모시어 연석(宴席)을 배설하고 공양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 때 혜원비구니는 왕비 난영이와 친밀하게 되고, 왕비 난영의 소개로 궁예왕의 신하인 왕건을 알게 되었다.
왕건은 즉위 5년(서기 922년)에 청룡사를 창건하고 철원의 도피안사에 있던 혜원비구니를 청하여
제 1세 주지로 주석케하였다. 그때 혜원의 나이는 72세였다.
조선이 건국되어 이성계가 왕위에 나아가자, 공민왕비 혜비(惠妃)이 나라를 잃은 망국의 슬픔을 안고
스님이 되어 이 절에 주석한다. 그는 고려의 천재 익제 이재현의 딸이다.공민왕의 개혁정책을 적극 추진한다.
노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이재현의 딸이 왕비로 들어간다.그가 혜비로 청룡사의 주지다.
태조 이성계는 왕자의 난 이후 제2왕후 강씨 소생으로 오직 살아남아 있는 일점혈육인 경순공주를 불러
직접 눈물을 흘리면서 공주의 머리를 깍아 스님이 되게하고 동대문 밖에 청룡사에 있기를 명한다.
경순공주는 부왕의 명령대로 동대문 밖의 청룡사를 찿았다.
공주는 청룡사에 당도하여 자신의 전후 사정을 자세히 말하니 혜비는 공주를 반갑게 맞으며 하는 말이
"비구니나 나나 같은 처지구려 왕씨의 나라를 너무도 참혹하게 없애더니
이제는 또 이렇게 형제끼리 싸우는구려. 나무이미 타불"하고 측은해 하였다.
"혜비마마 부왕의 잘못하신 과보가 이몸에 왔나 보오이다.
부왕의 업륜(業輪)으로 고통을 당한다면 달게 받겠나이다."
경순공주는 일어나 합장하였다.
"고마운 말씀이오. 나는 아버님의 지나친 고집으로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오.
이제 누구를 원망하고 무엇을 한탄하겠오 모두가 스스로 우리 전생에 지은 업원이오.
이제부터는 서로가 도와주고 서로 힘이되여 살아갑시다.
혜비는 오히려 경순공주를 위로 하였다.
태종 5년(1405)에는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 내려가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무학대사로 하여금 한양으로 모셔오게 어명을 내렸다. 무학이 이를 성사시켰다.
이에 태종이 사례로써 왕사가 머물고 있던 이 청룡사를 중창토록 하였다.
세조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18세의 왕비 송씨와 이곳우화루(雨花樓)에서
애끊는 이별을 한다.이어 왕비 송씨는 이 절에서 세 궁녀와 함께 스님이 되어 여생을 보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숙종 24년에 비로소 정순왕후(定順王后)로 추복되었다.
인조 2년(1624)에는 예순(禮順)비구니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명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명복을 빌고
또 다시 이어 중창을 하였다.
영조 47년(1771)에 이르러서는 영조가 단종과 정순왕후를 위하여 옛 사원터에 새롭게 중창하도록 명하였다.
또한 왕비가 일생 거처했던 곳은 일반 사원의 명칭으로 부를 수 없다고 하여 이에 청룡사를 정업원(淨業院)으로 개칭하였다.
이는 옛날 궁중의 비빈(妃嬪)과 궁녀들이 출입하였던 내불당(內佛堂)의 명칭을 취한 것이다.
영조는 또한 정업원이라는 비문을 쓴다.
“앞 산의 봉우리 뒤 언덕 바위여! 천만 년이나 영원하리라
전봉후암 어천만년(前峰後巖 於千萬年)”
그 옛터에 친필의 현판 액자를 하사하였다..
이는 모두 어필(御筆)로 기록하여 비석과 누각을 세운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보존되어 국가문화재의 하나가 되었다.
순조 13년(1813)에는 뜻하지 않은 화재로 사원이 전소되어
그 이듬해에 묘담(妙湛), 수인(守仁) 두 비구니가 협력하여 중창하였다.
순조 23년(1823)에는 순조의 왕비에게 때마침 생각치 않은 병환이 있어
그의 생부인 김조순(金祖淳)이 정업원을 찾아가 기도하자 병환이 곧 회복되었다.
이를 인연으로 김조순이 주청하여 다시 어명으로 정업원을 청룡사로 환원하여 부르게 되었다.
고려 창건의 시공을 500년 뛰어넘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다.
그는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궁궐을 짓기 위해 몸소 한양의 곳곳을 답사하였다.
물론 핵심 참모들을 대동하고 왼쪽에는 삼봉 정도전, 오른쪽에는 무학대사를 중심으로 책사들을 데리고.
한양 어느 곳에 땅을 파게 하였다.땅을 파던 중 인부들한테서 비석이 한 점 나왔다.
무슨 글씨가 쓰여 있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다.
이 비석을 보고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정중하게 아뢰기를
“폐하 우리가 올줄 알고 미리 옥룡자(玉龍子)께서 예언을 해두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성계는 왕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대사 왜 그러시오?”라고 되물었다.
무학대사는 의복을 정제한 뒤 흙에서 나온 비석을 향해 예의를 갖춘 후 이성계 에게 다시 아뢰었다.
“폐하 이곳이 아니라 이곳에서 10리를 더 가라고 옥룡자께서 예언을 하셨습니다.”
라고 말하고 흙에서 나온 비석을 보여 주었다.
비석은 인부들에 의해 깨끗이 씻어져 있었고 가로 1자반 높이 5자 정도의 크기에
뚜렷하게 가운데 '妖僧無學 枉尋于此 往十里'라고 쓰여져 있었고 옆에 玉龍子書 라고 쓰여 있었다.
이성계는 기이하다고 생각하고 무학대사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무학대사는 이성계에게 예를 갖추고 “玉龍子께서 여기서 십리를 더 가라고 예언을 주셨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이성계 역시 왜구를 비롯한 외적을 물리친 백전노장의 탁월한 무장으로서 옥룡자 도선의 예지력을 익히 아는지라
“그렇게 하시오”라고 윤허를 내렸다.
그 비석이 발견 된 자리가 바로 오늘의 서울 왕십리요 행정구역은 서울시 성동구 도선동이며
주변에 무학초등학교, 무학여, 중고가 자리 잡고 있다.그 뒤쪽에는 무학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