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가위 바위 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최후의 만찬 最後의 晩餐」에는 식탁에 올려놓은 예수의 두 손이 그려져 있다. 한 손은 주먹을 쥐고 있고, 또 한 손은 손바닥을 펴보이고 있다. 아이들이 장난하는 가위 바위 보로 치자면 예수는 유다를 향해 주먹과 보자기를 동시에 내민 셈이다.
주먹은 바위와 같다. 손가락은 성문(城門)의 빗장처럼 굳게 안으로 잠겨져 있어, 이미 外部의 아무 것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주먹은 거부(拒否)이며 도전(挑戰)이며 징벌의 의지(意志)를 나타낸다. 우리는 거기에서 응고해버린 분노(憤怒)를 볼 뿐이다.
유다의 배신(背信)에 대해서 예수는 오지 주먹만을 쥐었던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反對)로 한 손은 부드럽게 열려져 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키우는 五月의 大地처럼 그 손은 펼쳐져 있다. 텅 빈 하늘이거나 경계선이 없는 바다이다. 눈물을 받아들이고 아픔을 받아들이고 ……증오(憎惡)나 악(惡)까지도 그 손바닥 위에서는 용해되어 버린다.
빈 뜨락과도 같은 손바닥에서, 우리는 너그러운 사랑을 본다.
예수는 두 주먹을 쥐지도 않았고 두 손을 모두 펴지도 않았다. 주먹과 보자기…… 그러기에 그는 生의 가위 바위 보에서 이길 수가 있었다.
주먹의 言語와 보자기의 言語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詩人은 예수처럼 슬프고도 행복(幸福)하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는 그 끔찍한 가위를 이길 수가 있다. 모든 것을 분할(分割)하고 토막내고 갈가리 찢어버리는 가위의 言語를 막을 수 있다. 단지 방어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주)宇宙와도 같은 보자기의 품안에, 자신이 내민 주먹까지도 감싸버린다.
詩人이여. 주먹을 쥐어라. 분노(憤怒)의 주먹을 쥐어라. 주먹처럼 단단한 言語로써 詩人들은 벽(壁)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 의지(意志)로 그 분노(憤怒)로 유다의 惡을 징벌해야 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지. 마치 어린 것들의 머리를 쓰다듬듯이, 폐허에 새 종자(種子)를 뿌리듯이 한 손일랑 부드럽게 펴야만 한다.
넓고 텅 빈 손바닥의 그 言語가 있을 때만이 딱딱한 주먹의 言語는 폭력(暴力)의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詩人의 마지막 장치도 그러하리라. 주먹과 보자기를 내미는 가위 바위 보. 그렇게 해서 운명(運命)의 놀이에서 이길 수가 있다.
지은이: 이어령
출 처: 『문학사상』 1977. 05
..........................................................
길
바람이 남도 길을 열어 준다. 먹장구름이 물러나는 하늘에서 봄볕이 내려와 반짝인다. 분분하게 떨어진 붉은 꽃에 마음이 머문다. 섬과 육지를 이어 주는 외길 위에 정겨운 사람들의 웃음으로 가득하다. 일상에서 벗어나 길을 나선 사람들처럼 닻을 내린 선박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바닷길을 열어 주던 등대는 곤하게 잠들어 있다. 어디에서 음악이 흐르는가 싶더니 그 음악에 맞추어 물줄기가 춤을 춘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한 둘 음악 분수대 앞에 모여든다. 오동나무 꽃이 하늘에 걸렸다. 오동나무가 많았다는 작은 섬에는 뭉텅뭉텅 진 동백이 붉은 자국들로 난자하다. 겨울이 혹독할수록 시련이 클수록 더 붉게 타는 동백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내어 주는 길은 아름답다. 모든 길이 바다로 열린 죽포에서 유일하게 뭍으로 흐르는 길이 하나 있다. 사람들은 실오라기 같은 이 외길을 따라 바다를 건넌다. 먹장구름 한편에 고개를 내민 쪽빛 하늘이 우리네 인생도 그런 데 아니냐며 너울댄다.
길 위에는 날마다 벽에 걸어 두고 보아 온 달력 속 풍경이 펼쳐진다. 물이 빠져나간 갯벌에는 석화가 피고 바닷바람에 그을린 아낙이 고쟁이를 입고 그물을 뜯는다. 이런 풍경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내게 철 잃은 봄동은 노란 웃음을 짓는다. 길은 장비를 동원해야만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듯이 때로는 소리가 길을 내고 풍경이 내는 길 속으로 사람들이 들어간다. 그 풍경 소리가 사람들의 발길을 붙들기도 하고 사람이 길을 잉태하기도 한다.
나는 자유롭게 거니는 걸 좋아한다. 많은 연인들이 만들어 놓은 길 위에서 어떤 향기를 내려놓았는지 서성거린다. 길 위에 서면 애절한 서정시를 혀 위에 마음대로 굴릴 수 있고 정처 없는 소요에 심취할 수 있다. 아름다운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경치가 주는 신선함은 눈을 즐겁게 해 주고 잠시 머무는 쉼 속에서 기운을 얻는다. 낮게 드리운 구름이 바람이 되고 흔적 없이 사라지는 풍경을 만나기도 한다. 쉬엄쉬엄 길을 가다 보면 풍경을 닮고 싶을 때가 있다. 마음은 산과 들을 닮고 사람은 마음을 닮는 것처럼.
땅 끝에 선 절집에 바람이 분다. 하늘과 바다 사이에 뜬 풍경은 말이 없다. 금가루로 덧칠을 한 전각보다 처마에 귀걸이처럼 달린 풍경이 마음을 더 뺏는다. 바람은 불건만 풍경은 무심하다. 오랜 명상으로 길들여진 풍경의 여유일까. 깨달음의 경지일까. 그 고요의 한끝에서 나는 무언의 소리를 만난다. 묵언의 경지에 든 풍경이 인생도 저처럼 살라고 타이른다. 대웅전에서 새어 나온 향냄새가 바람에 날려 쪽빛 바다에 흩어진다. 바다는 깊어지고 하늘도 깊어진다. 풍경은 귀를 두드리지 못하지만 마음의 문은 활짝 열어준다. 이처럼 길에는 소리도 있고 말씀도 있다. 애달픈 꿈도 있고 그리움도 있다.
우리네 인생도 매양 그렇지 않을까. 소리를 낼 때는 소리를 내어야 하고 침묵할 때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부족한 것은 소리를 내지만 가득 차면 오히려 고요해진다. 새로운 물을 채우기 위해서는 가득한 항아리를 비워야 하듯이 우리 삶에도 여백이 필요하다. 털고 털어도 밤하늘의 별처럼 돋아나는 것이 욕심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그리움을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소리를 내며 살았는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저 풍경처럼 침묵을 통해 나 자신을 비워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도 길이다. 인생에 주어지는 많은 결과들은 아쉬운 순간들을 남긴다. 하지만 시간은 그저 길처럼 흐를 뿐이다. 지난날 잃은 것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인생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살면서 조금씩 배우고 느껴 가는 것이다. 사람마다 걸어온 길은 다르다. 어떤 길도 어머니가 걸어간 길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으며 아버지의 발자국이 난 길처럼 숭고하고 가파른 길은 없다. 각자의 길에 새겨진 인생의 무늬처럼 길 위에는 사무치는 인생의 노래가 있다.
길에는 좁은 길이 있고 넓은 길이 있으며 반듯한 길이 있는가 하면 구부러진 길도 있다. 그 중에서 나는 구부러진 길을 좋아한다. 들국화 향기를 따라 구부러진 길 끝에 서면 암자로 이어지는 길이 나타나기도 하고 세속과는 다른 길이 펼쳐지기도 한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구부러진 길에는 들꽃도 많이 피고 볕도 많이 든다.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어 넉넉하다. 그래서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위를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부러진 삶이 더 값지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둥글둥글한 사람이 나는 좋다,
사회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서사시가 될 수도 있고 서정시가 될 수도 있다. 로마로 통하는 돌을 깐 길들이나 미국 대륙을 그물처럼 누비고 있는 고속도로에서 크나큰 서사시를 읽을 수 있다면 미루나무에 그늘진 한국의 논길 혹은 산길 너머 이웃 마을로 통하는 한국의 산길에서 따뜻한 서정시를 들을 수 있다. 신작로는 소읍에서 저잣거리가 있는 큰 읍내로 나가는 길이며 골목길은 집과 집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얼마 전, 매스컴을 통해서 T도시로 예술가들이 모여든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T도시는 많은 예술가들의 고향이며 사랑이 머물고 바다가 풍경이 된 곳이다. 사랑과 풍경이 있는 그곳에 예술가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터를 잡는다고 한다. 풍경이 있는 곳에는 길이 있고 길이 있는 곳에는 사람이 모여든다. 그래서 절로 문화가 꽃을 피우고 하나의 공동체가 되기도 한다.
돌아보면 모두가 길이었다. 수많은 길과 고개를 넘어 나는 지금도 길 위에 서 있다. 아스팔트 같은 탄탄대로도 있었고 절벽 같던 길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뻐꾸기 울음소리처럼 애달픈 길도 있고 다정했던 사람과 걸었던 오솔길도 있다. 기억 속에서 까맣게 지워 버리고 싶은 길도 있다. 길은 풍경이고 추억이며 희망이다. 그 길 위에서 살아온 날들, 이제는 마음속의 길을 헤아려야 할 시간이 되어 버린 지금 삶의 질서를 관조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하리라.
지은이: 김희자
출 처: 좋은 수필 [좋은수필]길 / 김희자|작성자 에세이 자키
.....................................
<그만 내려놓으시오>
공광규
인생 상담을 하느라 스님과 마주 앉았는데
보이차를 따라놓고는
잔을 들고 있어보라고 한다.
작은 찻잔도 오래 들고 있으니 무겁다.
그만 내려놓으시오.
나는 팔이 시원해졌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떠나야 바다에 이른다는 말씀이
나를 오랫동안 따라다닌다.
도심의 화분에 담긴 꽃과
도랑에 고인 오수를 지나오면서
구름 속에 심은 꽃
구름 속에 고인 강을 생각해 본다.
<접는다는 것>
권상진
읽던 책을 쉬어 갈 때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
접혀진 자국이 경계같이 선명하다
한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
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
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
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잠시 접어두라는 말은
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
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
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주는 일
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 본다
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때와 다르다
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서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진실들이
우리의 페이지 속에는 가득하다
*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변용.
- 『노을 쪽에서 온 사람』(걷는사람, 2023)
지난 일요일에는 영덕고을 역사문화 탐방을 다녀왔습니다. 명현을 많이 배출하여 소안동(小安東)으로 불리우는 영덕고을, 재령 이씨 집성촌과 영양 남씨 집성촌이 있는 관계로 수백년 넘은 전통 고택들이 남아 있는 곳이었습니다. 전통 고택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목은 이색 선생과 평민출신 의병장 신돌석 장군 관련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서 감동적이었습니다.
유정독서 모임은 5월29일 수요일, 14:00시에 실레마을 김유정역 김유정문학열차에서 진행됩니다. 이번에 함께 읽을 작품은 김유정의 수필 <병상영춘기>와 < 네가 봄이런가> 입니다.
수요일 오후 2시, 김유정문학열차에서 뵙겠습니다.
2024.5.27 강버들
목은 이색 (1328~1386) 선생과 의병장 신돌석 장군 (1878~1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