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무의 『예수의 이야기』
1. 대표적인 민중 신학자 안병무의 『예수의 이야기』는 성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비유를 교리적 해석이나 학문적 분석이 아닌 삶의 현장을 살아가던 민중의 시각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이야기’는 삶의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지혜의 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생활환경에 대한 이해를 통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민중은 원래부터 관념적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따위의 물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 즉 지금의 삶이 중요합니다.”
2. 저자는 예수의 비유를 몇 개의 범주로 묶고 이야기의 핵심적인 의미를 찾아 나선다. 그것은 당시 예수와 민중들의 진정한 교감을 목표로 한 말씀이자 행동이었다. 예수는 당시의 시대와 세대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어쩌면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현실적 인식이었는지 모른다. 유대와 갈릴레아 지역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로마와 로마에 기생한 종교 권력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었으며, 또한 로마에 저항하는 젤롯당의 반란 때문에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던 시기였다. 그 속에서 예수에게 가장 큰 문제로 비춰진 것은 식민지적 착취보다도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차별과 배제의 모습이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죄인이라는 이유로, 병들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에서 배제되었다. 예수는 가난한 자와 죄인들의 친구였다. 누군가를 차별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도래했다.”라고 말한 것도,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특징을 말해준다.
3.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찬 종교 지도자들을 공격했고 차별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실한 모습을 부각시켰다.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도, 바리사이인과 대조되는 ‘세리’의 이야기도 이러한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여성, 특히 과부의 이야기는 사회의 가장 큰 약자인 여성의 믿음과 행위 속에 담겨있는 진실함과 절실함의 소중함을 보여준다. 가장 적은 액수의 돈을 헌금한 과부의 행위는 부자들의 많은 헌금과 비교할 수 없는 ‘삶의 전체’를 바친 숭고한 결정인 것이다.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은 진정한 실천의 가치가 갖는 의미를 전달한다. “(창기가) 너희보다 앞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4. 저자는 예수 비유에 대한 설명을 통해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적 틀을 넘어 인간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사람들에 대한 포용과 연대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예수가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복음서의 말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신을 말하지 않고 어떤 종교를 고백하거나 그 조직에 가담하지 않으면서도 포도원 현장에 나가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저들은 바로 비종교인, 비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저들을 일러 이름을 감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붑니다.”
5. 현재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신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고 있다. 하지만 복음서 속의 예수의 가르침은 ‘믿음’과 ‘기도’의 위선을 공격하며 참다운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다. 이러한 예수의 강조점은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에게도 전승되었던 중요한 기준이었다. ‘세계 심판’에 관한 이야기는 이러한 관점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심판 때 선한 자와 불의한 자를 나누는 기준은 결코 헌금의 액수와 유대교인들이 중시한 금식이나 율법의 준수가 아니었다. 가난하고 약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는가가 중요한 기준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당시 근동 종교에서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이집트의 『사자의 서』처럼 대부분의 종교가 우선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6. 예수가 제시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은 사악한 현재의 세대를 극복해야만 하는 세계였다. 하지만 그것은 폭력적인 혁명을 통한 쟁취는 아니었다.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는 오직 내면의 변화, 정신적인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보았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제시한, ‘씨앗의 성장’,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등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상징적 성격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조용한 혁명입니다. 소리내고 시위하는 그런 혁명이 아닙니다. 조용히 지하에서 흐르는 생수처럼 보이지 않는 데서 퍼져나가 전체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그 놀라운 사건”인 것이다.
7. 예수의 ‘포도원 일꾼들에 대한 동일한 임금’(마태 20, 1-15)이야기는 현실의 인식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복적 관점이 등장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 농장의 주인은 새벽부터 일한 일꾼이나 해가 저물어 일을 시작한 일꾼이나 모두 동일한 임금을 준다. 항의하는 새벽부터 일한 일꾼에게는 주인은 나는 결코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고 말한다. 어쩌면 주인의 횡포처럼 비쳐지는 이 모습은 현실의 ‘형평의 원칙’을 깨뜨리는 ‘생명의 원칙’의 제시인지 모른다. 임금이 살아가기 위해 최소한의 물질을 구입하는 비용이라면, 그것은 일을 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가치가 아니라 살아가야 하는 존재에게 주어져야 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비용이라는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본다. “새질서, 새가치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을 노동력으로 보고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질서입니다. 물질이 아니라 사람이 가치의 기준이 되는 세계입니다.”
8.예수의 비폭력적인 ‘이웃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당시 혁명적인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오해이자 비난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까지 ‘폭력’의 위험을 경고했다. 진정한 하느님 나라, 지속가능한 새로운 세계는 오직 의식의 전환과 개혁을 통하여 실현되는 차별과 배제가 사라진 공감의 세계라는 점을 밝힌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삶 속에서만 증명되는 가치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다면, 그것을 위해 삶의 전체를 바칠 각오가 없이는 실현할 수 없는 지난한 과제인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예수의 가르침은 내세에서의 구원과 영생에 대한 기대로 전환되었다. 러셀의 비난처럼 ‘개인의 구원’이 강조되면서 기독교는 이기적으로 바뀌었고, 사회적 구원은 실종된 것이다. 안병무의 ‘예수 이야기’는 예수가 당시의 민중들과의 교감을 통해서 이루려 했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그 속에서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실천’과 ‘내면의 혁명’에 대한 문제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첫댓글 - 놀라운 사건, 이어지는 이야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