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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불리 먹으며
지금껏 계명을 지키라는 말을 하던 모세는 이제는 가나안 땅에서의 풍요를 경험하게 되리라 예견하고, 그것이 초래할 부정적 결과를 보여주며 설득한다. 광야에서 하루살이처럼 만나만 먹고 살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잘 먹고 잘살게 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을 잊기 딱 좋다. 그때 광야 길에서 베푼 하나님의 폭포 같은 사랑을 기억할 것, 하나님을 떠난 뒤 남은 것은 파멸임을 확실히 선언한다.
신자들은 언제 하나님을 더 찾을까? 언제 하나님을 떠날까? 배고플 때일까? 배부를 때일까? 바울 사도께서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안다고 하셨다. 평범한 신자는 둘 다 어렵다. 위기 때는 위기인 줄 알고, 그래도 하나님 바짓가랑이 붙잡고 애걸해서라도 탈피하려 하지만, 잘 나갈 때는 목이 빳빳하다. 안하무인이다. 힘들 때는 하나님 원망하다가 승승장구할 때는 내 탓 한다. 그러다가 목 날아가지만 말이다. 그래서 성공할 때가 더 어렵다.
잘 나가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이들 많다. 나이 들어도 정상 어드메에 머무는 이는 희귀하다. 내가 잘해서 성공했다고 여기면 어려웠던 과거를 잊고, 도움받았다고 말하기를 꺼린다. 끝까지 지속하는 이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고, 타인의 도움이 있었노라고 말한다. 망하는 이들은 ‘때문’, 흥하는 이들은 ‘덕분’을 입에 달고 산다. 은혜 아닌 것이 없고, 덕분 아닌 것이 없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당신도 고마워요. 아, 배부르다. (신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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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왜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법률을 잘 지켜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과거의 역사적 경험이다. 기적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 없는 출애굽 사건과 광야 40년 방랑길을 더듬는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의 먹거리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다. 풍족하지는 못해도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 과거에 기대어 풍성한 미래를 가늠한다. 광야 길을 여태껏 지켰던 주님이 가나안에서도 똑같이 지킬 것이다. 그러니 먹는 것 너머의 무엇, 즉 말씀을 읽고 믿고, 살아내라.
인생을 무엇에 비유할까? 산이 많고 강과 들, 바다가 있는 우리에게는 인생은 등산이나 흐르는 강물, 거칠고 망망한 대해로 빗대어 말하곤 한다. 내게 인생은 광야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끝없이 펼쳐진 모래 바다. 인적도 없고, 드문드문 풀이 돋아나고 돌멩이만 지천에 널린, 그 막막하기 그지없는 곳, 모든 곳이 길이고, 어느 곳도 길이 아닌데, 어떻게든 이 악물고 버텨내고 살아야 한다. 태어난 이상 죽을 수 없으니까. 살아야 하니까. 뭘 먹고 어찌 사나?
살아보니 먹는 것 해결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더라. 살아보니 먹는 것 해결해도 살아도 산 것 같은 삶은 아니더라. 뭔가 비어있는, 헛헛한 거시기가 있더라. 광야를 지나는 사람에게는 나침반이 있어야 한다. 방향과 목표가 있어야 길을 헤매 돌지 않는다. 그걸 잃는 순간, 그는 먹는 것 찾아 걸신들린 듯 광야를 뺑뺑 돌다 인생 종 친다. 쉬어도 쉰 것이 아니고, 먹어도 먹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밥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가 보다. (신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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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는 공동체가 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 감탄사부터. 언빌리버블!! 자녀가 번창하고, 풍성한 결실을 얻고, 질병도 없는 곳이 된단다. 한 번 더. 와우~~ 나처럼 믿기지 않을 이들을 위해 이집트에서의 일을 꼬집는다. 열 가지 재앙 사건 말이다. 맞다, 맞아. 그러니 걱정 말고, 가나안 풍습에 젖어 들지 말고, 그들과의 경계선을 분명히 하고, 이스라엘의 삶과 마음에서 몰아내라고 신신당부한다. 믿고픈 너무 좋은 말씀이로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이 말씀처럼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상낙원이 따로 없구나, 그런 소망하는 착한 마음보다는 반신반의하곤 했다. 이것이 어떻게 실현 가능하단 말이지? 성경은 역으로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면 그런 질병에 걸린다고 경고까지 하는데, 믿고 싶은데, 믿기는 믿는데, 그닥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난 그리 잘못한 것 없고 의사도 갸우뚱하는데 위험할 뻔했다. 주변에 그런 이들이 지천으로 널렸다. 그런데도 믿으라고?
코로나를 겪으면서, 기후 위기를 보면서 저 말씀이 일점일획도 가감하지 않아야 할 신의 절대 말씀임을 알았다. 창세기와 신명기, 욥기에서 강조하였듯이, 하나님이 그어놓은 자연의 경계를 인간이 제멋대로 파괴한 결과 자연의 복수, 곧 인수공통감염병의 출몰을 경험했다. 인간의 이기적인 안락한 삶, 아니 부유한 선진국의 물질적 풍요를 위해 지구 생태계를 재앙에 빠뜨렸다. 성경을 따라 사는 세상 되면, 모든 질병이 멀어질 것이다. 이제 나는 믿는다! (신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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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적은 자야
약속의 땅에서 해야 할 일 중 하나를 알려준다. 그 땅의 강적을 쫓아내라는 것이다. 그들 더 강하고 수도 많은 일곱 민족을 축출해야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종교 문화적으로도 온존히 보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행여 그들의 위세와 유혹에 넘어가면 그들보다 약하고 수가 적은 그들은 생존을 보장하기 어렵다. 그래도 담대할 이유는 가장 적은 그들을 선택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때문이다. 조건 없는 사랑이다. 그러니 말씀에 순종만 하면 그만이다. 그래야 오래 산다.
정치 군사적으로 그들 일곱 족속은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간단하다. 지금 그들이 이스라엘에 패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언제 그들이 재기에 성공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만한 저력이 있고, 역사적 경험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한 번 이겼다고 우쭐대다가 그들이 당했던 것 이상으로 한 방에 훅 간다. 그러니 후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후환을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야 그곳에서 오래 산다.
종교 문화적으로도 싹을 아예 잘라버리는 것이 낫다. 그들은 터를 잡은 터라 그곳의 풍토에 맞는 종교 문화를 일구고 살았다. 4백 년 만에 돌아온 이스라엘에 그곳은 완전히 낯설다. 자연스레 그 문화를 흡수하고 빨려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러면 자기 정체성을 잊는다. 유혹, 예컨대, TV 시청이나 스마트폰 중독은 줄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안 하는 것이 맞다. 나는 약하고 가장 적고 작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걸 알아야 오래 산다. (신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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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짓지 않은
가나안에서의 삶 전체를 한 방에 안내하는 말씀이다. 그곳은 무엇보다도 너희들이 짓거나 심거나 가꾸거나 파지도 않은 건물과 농토와 우물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맘껏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풍요롭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풍족하고 안락한 삶에 푹 빠져서 질투하는 하나님을 망각하지 말 것을 엄히 경고한다. 살길은 토라를 따라 사는 것뿐이다. 왜 이리 자꾸 성경, 성경, 하는지를 자녀들이 물으면 그 은혜를 이야기함으로 신앙을 전수하라 하신다.
나는 오랫동안 짓지 않고 심지 않은 것을 누린다는 이 본문이 불편했고, 부러웠다. 나는 그래본 적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하던 야곱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그래도 얼추 그리 살았던 나로서는, 죽어라 공부하다가 죽을 뻔했던 나로서는 내가 고생, 고생한 것에 대한 응분의 대가라도 받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거면 족했다. 괜한 상실감과 박탈감에 빠져들 때는 나의 선택에 자괴감이 들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서운하기도 했다.
상황이 좋아져서 그런 걸까, 시선이 바뀌어서 그런 걸까?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안다. 가족만 봐도 그렇다. 아내가 개고생했고, 아이들이 잘 컸다. 교회는 또 어떤가. 작지만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였다. 책 쓰는 목사를 자랑스러워하고, 후원하자고 하면 헌금도 많이 한다. 저술도 마찬가지다. 내 역량에 비해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 하여, 나는 짓지 않은 것을 누리고 있다.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다. 족하다. (신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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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모두
십계명에 관한 본문이다. 목적지인 가나안이 지척에 보이는 곳, 요단강 동편에서 선포되었다. 그곳은 약속의 땅에 진입하기 직전이면서도 이미 하나님의 승리를 맛본 곳이라 안성맞춤인 지역이다. 모세는 이 언약이 이미 죽은 자들, 그때 그곳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살아 있는, 대대손손을 향한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런 다음 노예살이하던 너희를 구출한 출애굽의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헛되고 거짓된 것으로 만들지 말라고 다잡는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적이고 다종교적 세계에서 오직 하나님만 믿으라는 말은 배타적이고 편협한 말로 들린다. 역사적인 맥락을 놓고 보면 다르다. 거지요 노예로 살았다. 애굽에서 사람 취급 받지 못했다. 개, 돼지요, 물건이었다. 죽여도 되었고, 죽어도 괜찮다. 애굽의 많은 신들이 버린 사람들이었다. ‘유독’ 하나님만이, 딱 한 신(神)만이 그런 이들을 사람 대접했다. 자유를 약속했고 실천했다. 딴맘 품으면 배은망덕이다. 후레자식이다.
출애굽의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지를 모세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한 채, 관습적으로 교회 문턱만 밟고 지나다니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신랄한 반성과 함께 세상을 향해 담대한 확신을 품으라고 도전한다. 교차로 전광판에는 이단의 광고가 잦다. 저들은 겁 없이 홍보하는데, 우리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기 급급하다. 담대하라. 애굽과 되어버린 나와 교회와 사회를 구원할 유일한 하나님, 그는 지금도 살아계신다. 그러니 너도 살아 있다. (신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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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하나님 없다?!
이런 하나님이 있었나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너무 거룩해서 직접 만나면 불에 사그라들 인간에게 친밀한 교제를 허락하는 하나님, 대제국의 강자가 아닌 가장 작은 민족이면서도 목이 곧은 백성을 위해 듣도 보도 못한 기상천외한 이적으로 대탈출 시킨 하나님,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오글거리는 하나님, 제물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라는 하나님. 실수로 크나큰 과오를 저지른 자를 위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하나님이 있었나?
동서고금, 상천하지에 이런 하나님이 있었나? 단언컨대 없었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없다는 데 내 손모가지를 건다. 이런 하나님은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신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속되고 천한 것들과 접촉하면 신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신도 오염된다는 논리를 펴는 마당에, 하나님은 친히 활동한다. 그가 선택한 백성도 지지리 궁상들이다. 안목이 영 꽝이다. 바로도 아니고, 이집트도 아니고, 모세요, 이스라엘이라니. 신답지 않다. 이래서 신이랄 수 있나?
아들과 같이 쓴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에서 한 가지 생략된 부호가 있다. 또는 저 물음표를 느낌표로 읽어야 한다. 몰라서 묻는 물음이자, 너무 놀랍고 좋아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물음표다. 지상의 아비를 잃고 천상의 아비를 얻었고, 죽일 뻔했고, 죽을 뻔했던 내가, 살았고 살리는 사람이 되게 하신 하나님, 참으로 기이하고 기묘하다. 이런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니. 이런 하나님 없다! (신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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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형상도
형상을 만들지 말아야 할 이유를 조목조목 말씀하신다.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위력에 짓눌려 그것을 신으로 숭배하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자기 스스로 격하하는 짓이며, 우상을 닮아서 추해진다. 그리 살면 집단 전체가 악해지고 추해져서 그 땅이 몹쓸 곳이 된다. 그래서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곳에서 말 못하는 것들을 섬기며 살 것이라고 경고한다. 끝내는 하나님께서 회복하겠지만 말이다.
모세가 이런 사람이었나? 여기서 자기가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한다는 얘기가 왜 또 나와? 너희 땜에 못 들어간다는 말을 왜 또 해? 사랑의 끝판왕이기에 질투하는 하나님과 달리 못난 백성 만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나 보다. 뒤끝이 너무 길다. 그래도 나는 못 가도 너희는 가니, 그곳에서 내 몫까지 잘 살라는 뉘앙스도 살짝 엿보인다. 부디 자멸의 길로 들어서지 말고, 하나님을 자꾸 화나게 하지 말라는 안타까움도 있다 싶다.
우상을 만들지 말란 본뜻은 우릴 위한 것이다. 우리가 우상을 만들든 무슨 짓을 하든, 하나님에게 무슨 상관있으랴. 우리에게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을 경배하면 하나님을 닮고, 우상을 숭배하면 우상을 닮는다. 하나님 섬기면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자기보다 못한 것에게 뭐라도 해 줄 줄 알고 빌면 우스운 꼴 된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 추해진다. 그러니 우상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의 형상이 돼라. 형상을 만들지 말고 형상이 돼라. (신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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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례와 법도를 가진 위대한 민족
역사를 상기시킨 모세는 방향을 바꾸어 의미랄까 신학을 설파한다.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을 제정한다. 율법은 헌법으로 고쳐 읽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기 위해서 율법 없던 사건, 곧 제 욕망을 따라 쾌락을 좇았던 바알브올에서의 사건을 환기한다. 아무튼, 하나님이 제정한 법을 따라 살면, 사람답게 살고, 건강한 공동체가 된다. 듣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실천하라고 강조한다. 그러면 약속의 땅에서 번영할 것이다.
왜 율법을 경청하고 순종하면 번성할까? 모세가 중간에 짧게 던지고 넘어간 말 한마디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율법 없던 사건, 곧 제 욕망을 따라 쾌락을 좇았던 바알브올에서의 사건을 환기한다. 예언자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초대받았다. 그러나 신의 뜻은 그들을 축복하는 것이었다. 발락은 이 때문에 복채를 제대로 못 받자 꾀를 냈다. 소위, 돈 섹스 권력이 어우러진 축제이었다. 환장 파티를 열고 무너진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었다.
율법이라는 용어는 아름답다. 한데, 루터 이후로 율법을 복음과 대조시키면서 바리새인 냄새를 풍긴다. 정치 사회적으로는 헌법이나 법률, 신앙과 신학적으로 말씀이라 바꾸면 의미가 산다. 신을 이용하지 않기 위해서,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율법으로 통제해야 한다. 모두가 자기 이익을 따르고,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시대에 적정 수준의 규칙은 절실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열 개다. 우리를 웅장하게 하는 위대한 하나님! (신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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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옵나니 건너가게 하소서
예상치 못하게 요단강 동편의 땅을 차지했다. 만만치 않은 숙적들이었다. 그들이 터 잡았던 곳이라 비옥하고 방어하기 좋은 천연의 요새다. 탐이 난 몇 지파가 그곳을 선점했다. 모세는 허락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형제 지파들이 땅을 얻기 전까지는 돌아올 수 없다. 가족과 가축을 안전하게 지킨 그 지파들은 선봉에 서서 싸웠다. 모세는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건만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여호수아가 미션을 이어받는다.
읽는 내 마음도 편치 않다. 천신만고 끝에 다다른 곳인데, 들어가지 못한다니, 땅을 치고 옷을 찢고 머리를 짓이길 정도로 억울하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목소리는 절절했을 것이다. 때로는 통곡하고, 때로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대거리도 서슴지 않았을 터. 협상도 했겠다. 하나님은 족하다지만, 모세는 전혀 족하지 않다. 마지못해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심통 부린다. 너희들 땜에 내 못 들어간다고오오오~ 안쓰럽지만, 고만하면 좋겠다.
옛 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열어젖히고 싶었는데, 모세도 이전 세대의 인물이었던 거다. 애굽 탈출과 광야 여정을 제 손으로 완성하고 싶었는데, 다 욕심이다. 부질없다. 남 탓하다 애굽에서처럼 누구 하나 죽인다. 제 몸과 맘만 상한다. 위대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도 해서는 안 되는 것, 멈추어야 하는 것, 넘겨주어야 할 게 있다. 헌데도 덜된 나는, 날 위해, 교인 위해 한 번 더 기도해 본다. 구하옵고 구하오니 건너가게 해 주소서. (신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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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본을 넘겨주셨으니
에돔과 모압, 암몬은 이스라엘에는 형제의 나라다. 대결을 피하고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헤스본은 애초에 하나님이 주시마고 약속한 땅이 아니다. 그러니 여기서도 절대로 전투를 벌여서는 아니 된다. 전력을 낭비할 필요도 없다. 예전처럼 평화 교섭을 진행했다. 돌아오는 말이 거칠다. 외려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 왔다. 불가피하게 전투가 벌어졌다. 시작된 전투는 이겨야 하는 법. 그래서 이겼다.
헤스본의 어이없는 행태를 설명하는 모세의 언어는 낯이 익다. 애굽에서의 바로의 그것이다. 바로의 완악함, 말이다. 그의 고집 센 마음이 결국 애굽을 나락으로 몰고 갔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천하 만방에 떨치는 결과를 낳았고,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에는 자신감을 잔뜩 불어넣어 주었다. 시혼의 완고한 마음도 동일한 결과를 낳았다. 전투할 의지도, 의사도 없는 상대를 몰살시키려던 헤스본이 되레 당했다.
평화롭게 지나간다고 하지만, 피해를 주기는커녕 물과 식량을 구매하여 이익을 남겨주겠다고 하지만, 군마가 아니라 모두가 도보로 통행하겠다는 거의 무장해제 수준이라고 해도,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법. 시혼의 고민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길을 내주지 않으면 먼 길을 돌아갔던 이스라엘에 대한 정보도 모르지 않았을 터. 돌아가게 내버려 두면 될 일. 그런데도 그들은 전쟁을 선택했다. 그래서 망했다. (신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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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지 말고
불평의 땅을 떠나 광야 방황 길에 올라섰다. 38년의 배회가 지날 즈음에 불평분자들이 싹 다 광야에서 엎어졌다. 그러자 가나안으로 이동을 시작한다. 가는 길에 몇 군데는 우회한다. 형제 국이라서 그렇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딸이 낳은 후손이다. 그들과는 일절 다투지 말고,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에둘러 가야 했다. 언제까지 돌아갈 수만 없는 법. 헤스본의 시혼 왕과는 일전을 벌여 그 땅을 차지하는 전과를 올린다.
형제의 나라들은 불행히도 입국이나 통행을 거절해서 빙빙 둘러 가야 했다. 이후에는 사사기 시대에는 이스라엘을 약탈하고 잠시 지배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유다가 그들을 정벌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도 그들을 선제공격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에 약속한 땅이 아니거니와 그곳은 그들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면, 아군과 적군을 분별하지 못하면, 군인이 아니라 건달이다. 정의는 사라지고 정글이 되고 만다.
나를 비롯한 일이 잘 안 풀리는 이들, 특히 위기청소년은 자기를 돕는 이들 손은 뿌리치고, 목덜미를 낚아채는 우악스러운 손아귀는 악수를 청하는 줄 알고 손 내밀다가 목 날아간다. 동지는 안 돼도 적으로 돌려세우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다. 반대파에게 하는 정성의 절반의 절반, 그들에게 쏟는 전력의 절반의 절반이면, 내 편은 못 돼도 반대편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싸우지 마라. 정중히 대하라. 모른 체 하라. 주변을 두텁게 하라. 그래야 이긴다. (신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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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때문에
정찰대 파견의 결과는 끔찍했다.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목사님 왈, “나는 징징거리는 사람들을 너무 싫어해.” 이를 두고 한 말이겠다. 하나님은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모세를 포함해서 출애굽의 영광과 기적을 경험한 세대를 광야에서 자연스럽게 소거하기로 한다. 자식 앞세웠지만, 불신앙이었고 이기주의였다. 화들짝 놀란 백성들은 하나님의 만류에도 손에 손잡고, 주섬주섬 무기 챙겨 떼거리로 몰려가 처참하게 패배한다. 그리고 대성통곡한다.
그때를 회고하는 모세는 자신의 가나안 입성 거부의 원인으로 백성들을 지목한다. 그들에게 떨어진 진노의 불똥이 자신에게 튀었다는 것이다. 억울한 거다. 불평이 몸에 밴 종자들이 날마다 징징거린다고 받는 벌과 온유함이 몸에 밴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고작 한 번 화를 냈다고 받는 벌의 경중이 같을 수 없다. 그렇다면 불공정하다. 최고 리더이기에 그만큼 책임도 큰 것은 알지만, 원통한 마음 가눌 길 없어 40년 전 일이건만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 나누나.
모세는 ‘너희 때문에’를 어떻게 발화했을까? 분한 마음 가시지 않은 격앙된 목소리일까? 삭히고 삭혀서 달관한 걸까? 아무 잘못 없는데 너희 때문에 망했다고 투덜대며 남 탓하는, 그래서 백성들처럼 징징거리는 모세가 나는 좋다. 내 광야 길이 길어진 것은 주의 선한 뜻이지만, 그래도 오늘은 모세처럼 남 탓 한번 시원하게 질러보자. “이게 다, 너 때문이란 말이야.” 에고, 이러니 광야 길이 길어지지. 눈물 난다. 눈물 나. (신 1:37)
1/3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너희의 아들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정찰 결과는 안중에 없고 그곳 사람들의 강대함과 그곳 도시와 군사력의 강성함에 지레 짓눌린 백성들의 원망과 통곡이 하늘을 찔렀다. 우릴 죽이려고 이곳으로 불러냈냐며 멍멍이 소리 해대며 둘러댄 말이, 아니 진심으로 우리 자식을 그런 험지로 데려가느냐며 정당함을 항변했다. 홀로 갈렙이 나섰다.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 밥이고, 하나님이 친히 약속하시고, 함께 하시는데 두려워 말자고 외쳐도 아무 소용 없다.
제 자식 걱정하는 것은 모든 부모의 숙명이다. 아이들이 노예로 살지 않고, 매 맞아 죽지 않고, 등 따습고 배부른 세상, 제 하고 싶은 꿈을 맘껏 품고, 양껏 도전하는 세상을 만들자고 애굽을 탈출했다. 그런 새 세상을 하나님이 만들어준대서 용기 내서 떠났는데, 저 무시한 거인 족속의 칼날에 내 자식 목이 뎅강 잘리는 험한 꼴 보려고 나온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 소원 이루는 데 방해가 된다면, 모세가 대수랴, 하나님도 일 없다. 눈에 뵈는 게 없다.
헌데, 부모 세대가 잘 모르는 것이 있다. 자식 길을 막는 최고 방해물은 부모라는 걸. 내가 있어 너희들 있다고 말하지만, 하나도 틀린 말 아니지만, 그래도 아비 어미의 삶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자식들 길을 어둡게 한다. 그걸 몰라서 모르고, 알아도 알지 못한다.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다. 자식 위해 산다는 말이 자식 죽이는 말이었구나. 다 내 생각에 사로잡혀서, 못다 한 내 꿈 피워보자고 한 짓이었구나. 내가 선악을, 사리를 분별하지 못했구나. (신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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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 아들 안음같이
출발하라는 야웨의 명령과 조직 체계도 갖추었다. 모세가 성급했던 걸까? 백성들이 제안을 하나 한다. 미답지이니 정탐 먼저 하자고. 전쟁은 또한 정보전이고, 승리의 요체는 지피지기이니 당연하다. 역시나 좋은 땅이다. 허나, 그곳 전력이 만만치 않다. 겁을 집어먹은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한다. 이번에는 모세가 그들을 다독인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었는지 너희들이 경험해 보지 않았느냐. 그러니 안심하라. 두려워 마라. 내가 네 아비다.
광야에서 계속 살 수도 없고, 애굽으로 돌아간다고 그들이 반갑게 맞아줄 것도 아니다. 광야에서 거지로 살 거나 애굽에서 노예로 살거나 아니면 가나안에서 자유인으로 리스크를 감수하는 모험을 하는 수밖에 없는데 왜들 저 지랄일까. 하긴, 먼 후대의 눈에는 명약관화해도 내가 저 자리에 있어도 야단법석을 피우지 않을까. 오도 가도 못하는 딱한 내 처지 원망하고 누군가에게 화살을 돌리고, 남 탓하지 싶다. 그러나 안심해라. 두려워 마라. 내가 네 아비다.
설득에 나선 모세에게 아들을 안은 아비 하나 보인다. 자식에게 좋은 것 먹이고 입히고, 애비처럼 노예로 살지 말고 당당하게 살라고 고생고생한 게 아니더냐. 「논어」는 자식이 부모 잠자리 챙기라는데, 너희 편안히 잘 자라고 불기둥으로 데우고, 그리 좋아하는 고기 먹인다고 온 세상 메추라기 죄다 모아 주지 않았느냐.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그 이상으로 너희를 가슴에 꼭 안고 돌보았다. 그러므로 안심해라. 두려워 마라. 내가 네 아비다. (신 1:31)
23/1/1
거주한 지 오래니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출애굽 이후 이곳으로 오기까지의 시간을 알려준다. 자그마치 사십 년이다. 그 사이에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강적을 물리친 승리의 경험을 상기시킨다. 그런 다음 호렙산에서 머문 시간이 너무 길었으니, 이제 일어나 본래의 목적지를 차지하는 대장정을 시작하라고 고지한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니 반드시 성취할 것이라며 용기를 북돋운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은 경계에 서 있다. 지척에는 약속의 땅이 보인다. 애굽의 4백 년은 그렇다고 하자. 출애굽 이후, 홍해를 건넌 후, 고작 열하루를 걸으면 당도할 곳을 무려 사십 년이 걸렸다. 뒤에는 떡하니 광야가 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길을 안내했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그저 먹었지만, ‘크고 두려운 땅’(1:19)이기도 하다.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네 인생사에 반드시, 한 번은 통과할 곳이지만, 죽치고 눌러살 수 없다. 이제 가라.
부산에 온 지 어언 스물다섯 해가 지났다.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나, 실존적 유배자요 내부적 망명자로 살았다. 앞으로도 그럴 터. 돌아보니, 수동적이고 방어적이었다. 광야 길이라 생존이 우선이었다. 한 걸음 잘못 내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였다. 그러니 몸을 사릴밖에. 앞으로는 교회도 좀 더 적극적으로 사역하고, 저술은 대중서도 놓지 않겠지만, 학술서로 무게 중심을 이동한다. 그만하면 참 잘했다. 거주한 지 오래다. 새 땅이 내 앞에 있다. 이제 가라. (신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