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청사열전(淸士列傳)
세상의 변고를 당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은둔하여서 혹 행적은 더럽혔지만 삶은 깨끗이 한 사람이 있으니, 그 몸은 깨끗함에 맞고 세상을 등진 것은 권도에 맞는 사람을 성인은 허여하였다. 그러므로 청사열전을 쓴다.
김시습(金時習)은 본디 창해(滄海 강릉) 사람이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5세에는 《대학》과 《중용》을 달통하여 어른들도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를 보고는 기재(奇才)라 하고 이름을 ‘시습’으로, 자를 ‘열경(悅卿)’으로 지어 주었다. 세종대왕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불러 만나 보려 하였으나 신하들이 안 된다고 하여 승정원을 시켜 불러서 보게 하고는 그의 집에 후한 은사를 내리며 “잘 길러라. 틀림없이 크게 쓰일 것이다.” 하였다. 이에 사방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오세동자(五歲童子)’라고 하였다. 문종 때에 김시습이 어느 정도 장성하자, 해박한 지식과 남다른 재능으로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노릉(魯陵 단종)이 손위(遜位)하게 되자, 김시습은 책을 모두 불태우고 그 길로 집을 떠나 승려가 되어 속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양주(楊州)의 수락산(水落山), 수춘(壽春 춘천)의 사탄향(史呑鄕), 동해 가의 설악산(雪嶽山)과 한계산(寒溪山), 월성(月城 경주)의 금오산(金鰲山)은 모두 김시습이 즐겨 머물렀던 곳이다. 그는 스스로 ‘췌세옹(贅世翁)’ 혹은 ‘청한자(淸寒子)’ 혹은 ‘동봉(東峯)’이라 호(號)하였다.
김시습은 큰 명성을 일찍 얻었으나 세상의 변고를 만나 하루아침에 은둔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었다. 미친 척하고 숨어 살면서 괴팍하고 기이한 행적으로 괴상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치세(治世)에 있으면서 자신의 몸만 깨끗이 하고 인륜을 어지럽히는 것은 수치이고 난세에 있으면서 세상을 떠나 멀리 가는 것은 선이라고 여긴 것이다.
결연히 속세를 벗어나 유명한 산천을 두루 다녔으니, 마아갑(摩阿岬)을 유람하고 개성의 옛 국학(國學)을 구경하고 살수(薩水)에서 칠옹중(七翁仲)을 읊고 평양에서는 정전(井田)의 옛 자취를 살펴보았다. 드디어 보현봉(普賢峯)에 오르니 신령스러운 봉우리가 8만 4000개나 되었다. 그 너머 아득한 북녘 땅에는 기이한 초목과 괴상한 금수가 많이 있었다. 강남(江南 전라북도)과 해양(海陽 전라남도)에 이르러 진귀하고 특이한 토산물이 풍부한 것을 보고는 “백제(百濟)는 이 때문에 강해졌고 또한 이 때문에 망하였다.”라고 하였다. 그의 기록에 “이곳 풍속은 강하고 사나우며 원수 갚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니, 이것은 백제의 유풍(遺風)이다.”라고 하였다. 동이(東暆 강릉)로 나가 풍악산(楓嶽山)과 오대산(五臺山)에 올랐고 바닷가를 유람하였으며 월송정(越松亭)을 거닐었고 울릉도(鬱陵島)와 우산도(于山島)를 멀리 바라보았다.
성종(成宗) 때에 환속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벼슬하라고 권유하자 응하지 않고 방랑하며 마음대로 놀면서 자기 뜻대로 하였다. 그의 편지에 “13세에는 경사(經史)와 백가의 책을 두루 읽어 큰 뜻과 기개가 있었고, 19세에는 손자(孫子)와 오자(吳子)의 병법을 공부하였는데, 지금은 다 없어졌다.” 하고, 이어 천지만물의 조화를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혹자는 “아무런 욕심이 없이 속세의 밖을 노닐었고 기기(氣機)의 운행과 변화에 관한 술법을 통달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직접 자화상을 그러고는 찬(讚)하기를 “너의 형체는 지극히 용렬하고 너의 마음은 너무도 어리석으니 너는 구렁에 버려지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아내가 죽은 뒤로 다시 장가들지 않고 승려 차림으로 동해를 유람하는 등 사방을 다니다가 끝내는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생을 마치니, 향년이 59세였다. 화장하지 말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절 옆에 빈소를 설치하였다가 3년 뒤 장례를 지내려고 관을 열어 보니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았다. 승려들은 그를 부처라 하고 다비식(茶毗式)을 한 뒤에 그를 위해 부도(浮圖)를 세웠다.
그의 저서로는 사방지(四方志) 1600편과 기산(紀山)과 기지(紀地) 200편과 또 시집이 세상에 전해진다. 음애공(陰崖公 이자(李耔))이 그의 글을 읽고 말하기를 “몸은 불가에 의탁하고 있었지만 유자의 삶을 산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허암 사적〔虛庵事〕 세변(世變)에 나온다.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스스로 은둔하여 무명으로 살면서 구차스레 목숨을 보존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니, 어찌 행실을 닦아 이름을 이루려는 선비와 견줄 수 있겠는가. 북창선생열전(北窓先生列傳)을 쓴다.
북창 선생은 성은 정(鄭)이고, 이름은 렴(𥖝)이며 자는 사결(士潔)이고 북창은 별호이다. 선생의 선조는 백제 탕정현(湯井縣) 사람으로 전대에 현달한 사람이 많았다. 우리 조선조의 예종과 성종 연간에 교리(校理)였던 충기(忠基)와 헌납(獻納)이었던 탁(鐸)이 2대에 걸쳐 현직(顯職)에 있었고, 탁의 아들 순붕(順朋)은 중종, 인종, 명종을 섬겼는데 가장 크게 등용되었으며 선생을 낳았다. 선생의 어머니는 태종의 장왕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의 증손녀이다. 중종 원년 3월 갑신일에 선생이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마음을 가다듬어 신과 통하여 가까이는 한마을의 사소한 일에서부터 멀리는 사방 오랑캐의 풍속이 전혀 달라 개 짖는 소리나 새 우는 소리처럼 들리는 이방의 말까지 귀신처럼 알았고, 여러 방술(方術)과 백가의 술법 또한 모두 배우지 않고도 깨달았다.
14세에 중국을 유람하였는데, 기이한 기운을 보고서 이곳에 온 유구(琉球) 사람이 선생을 뵙고는 재배하며 “제가 운명을 점쳐 보니, 점괘에 ‘모년 모월 모일에 중국에 가면 진인(眞人)을 만날 것이다.’라고 나왔었습니다. 당신이 참으로 그분이십니다.”라고 말한 다음 배우기를 청하였다. 이에 중국에 온 여러 오랑캐들이 그 소식을 듣고 모두 앞 다퉈 달려와 선생을 뵈었는데, 선생이 사방 오랑캐의 여러 언어로 능숙하게 응답하자, 모두들 크게 놀라고 경이로워하며 ‘천인(天人)’이라고 칭송하였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물었는데, 객사에서 땔감을 베어 오는 품팔이꾼이 앞으로 나와 자세히 보면서 뭔가 할 말이 있는 듯이 하였다. 선생이 “너는 무슨 할 말이 있느냐?”라고 묻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선생이 그와 함께 이야기해 보니 그는 음양의 운행과 조화, 기괴한 술법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선생이 “그대는 무슨 연유로 품팔이를 하게 되었는가?”라고 묻자,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저는 틀림없이 이미 죽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자신은 서촉(西蜀) 사람으로 모년에는 모처로 갈 것이라고 말하였다. 선생은 온갖 일에 이미 신통하여 무궁한 경지에 들어갔으니, 《도덕경(道德經)》의 “방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의 일을 안다.”라는 것이 선생을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선생은 술을 좋아하여 몇 말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성인은 인륜을 중하게 여겼는데 석가와 노자는 마음을 닦아 성불(成佛)하라는 말만 하고 인사에 관한 배움은 없으니 석가와 노자는 대동소이하다고 말하곤 하였다. 선생은 항상 “말은 믿음을 받지 못하고 행동은 인정을 받지 못한다.”라고 탄식하면서 큰 소리로 노래하며 스스로를 희롱하고 세속을 떠나 즐겁게 노닐었지만 자신을 대중과 다르게 생각한 적이 없었고 사람들과 거처할 적에 공자의 학술에서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선생의 깨달음은 선가(禪家)와 유사하고 행적은 노자와 유사하였지만 가르칠 때에는 한결같이 성인을 근본으로 삼았다.
내가 그의 자취를 상고해 보니, 19세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선발되었는데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고 양주의 괘라리(掛蘿里)에 거주하였다. 중종 때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 관상감(觀象監)과 혜민서(惠民署)의 교수가 되고 뒤에 포천 현감(抱川縣監)이 되었는데 홀연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서 자취를 감추고 깊이 은둔하여 살다가 10년 뒤에 별세하였으니, 때는 명종 4년으로 향년이 43세였다. 선생은 스승도 없었고 또한 제자도 없었다. 양주 사정산(砂井山)에 북창 선생의 묘가 있다.
북창 선생의 동생 작(碏)은 자가 군경(君敬)이고 별호가 고옥(古玉)이며, 북창 선생보다 27세 아래이다. 청정함을 좋아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가 수련법을 터득하였고, 중년에 아내가 죽자 다시 장가들지 않고 금욕하면서 36년간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관상학에 능통하였는데 신기하게 맞는 경우가 많았다. 초서(草書)와 예서(隷書)를 잘 쓰고 시 읊는 것을 좋아하여 세상에 이름이 났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선생은 낮에도 그림자가 없다고 전한다. 나는 병길(丙吉)이 “지인(至人)은 그림자가 없다.”라고 말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선생이 바로 지인인가보다. 혹자는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잘하였다고 하니, 상고 시대에 태어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워 스스로 자기 이름을 말한 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어쩌면 그리도 기이한가. 고옥과 같은 분은 세속을 초월한 부류라고 이를 만하다.
동산옹(東山翁)은 태학(太學) 상사생(上舍生)인 정두(鄭斗)로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진주의 동산에 살았기 때문에 후인들이 동산옹이라고 불렀다.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우며 은둔하여 세상에 자신을 알리려 하지 않았다. 평소 잘못을 숨기고 명예를 구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며 사람들과 교유하고 세속을 잘 따랐으므로 기이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토정공(土亭公 이지함(李之菡))이 남쪽 지방을 유람하다가 은사(隱士) 남명(南冥)을 만나 보고 또다시 동산옹을 만나 보았는데, “고매한 선비로구나. 강우(江右)에는 이 사람 하나뿐이다.”라고 하였다. 진주의 부로들이 전하는 말에, 동산옹은 새와 짐승의 소리를 알아들었는데 산속으로 들어가 피리를 불면 새와 짐승들이 와서 따랐다고 하니, 이는 무슨 연유인가.
동산옹이 죽음을 앞두고 “오래지 않아 우리나라에 큰 난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유언하고는 동산의 길섶을 가리키며 “내가 죽거든 여기에 묻어 달라.” 하였다. 이어서 아들에게 말하기를 “모년에 너는 여기에서 죽을 것이니, 네가 죽었을 때는 너를 묻어 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묻히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여기에 유해가 남겨지는 게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였다. 임진년에 과연 왜구가 침입하였고, 그의 아들은 여기에서 왜적을 만나 죽었는데 끝내 장례 치러 줄 사람이 없었다. 이에 “기이하구나. 어떻게 미래의 일을 이렇게 귀신처럼 미리 알 수 있었단 말인가.”라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향리의 부로들은 지금까지도 감탄하며 이 이야기를 한다. 내가 진양(晉陽 진주)에 유람 가서 지방 사람들에게 그에 대해 물어보니, “동산옹은 건장하고 특이하였으며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외물에 가탁하여 스스로 즐겼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유문을 읽어 보면, 그의 행적이 공자의 학술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또한 훌륭한 사람이다.
[주1] 그 몸은 …… 허여하였다 : 우중(虞仲)과 이일(夷逸)의 고사로, 우중은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둘째 아들로 아우인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하여 출가하였다. 이일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하게 상고할 수 없으나, 이궤제(夷詭諸)의 후손으로 벼슬을 권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소’에 비유하며 차라리 밭을 갈지 종묘에 들어가 희생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성인은 공자를 가리킨다. 《論語 微子》
[주2] 칠옹중(七翁仲) : 평안도 안주(安州)에 위치한 칠불사(七佛寺)에 있는 일곱 돌기둥으로, 고구려를 침략한 수(隋)나라 병사가 배가 없어 청천강(淸川江)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승려 일곱이 강을 건너는 것을 보고 따라 건너다 빠져 죽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를 기념하여 칠불사라는 절을 짓고 승려 일곱을 상징하여 일곱 개의 돌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주3] 정전(井田) : 평양성 남쪽에서 대동강에 이르는 지역에 기자(箕子)가 그었다는 정전을 가리킨다.
[주4] 세변(世變)에 나온다 : 《기언》 권26 하편 〈세변〉에 내용이 나와 있다.
淸士列傳
當世變。逃世絶俗。或有穢其跡而潔其行者。身中淸。廢中權。聖人許之。作淸士列傳。
[金時習]
金時習者。本滄海人。生八月。能知書。五歲。通大學,中庸。長者師之。集賢學士崔致雲見之曰。奇才。乃命名時習。字悅卿。世宗聞之。欲召見之不可。令承政院召見之。厚賜其家曰。善養之。當大用也。於是四方號之曰。五歲童子。而不名也。至文宗時。時習稍長成。旣博達異能。名譽益 多。及魯陵遜位。時習悉燒其書。因亡去。逃於浮屠。以絶跡於世也。楊州水落,壽春史呑,海上雪岳,寒溪,月城金鰲。皆時習樂居其間者也。自號贅世翁。或曰淸寒子。或曰東峯。時習早得大名。逢世故。一朝逃世絶俗。佯狂自隱。乖詭譎奇。以取怪而不悔也。以爲居治世。潔身亂倫。恥也。遇亂世。離群遠引。善也。慨然長往。行名山澤。遊摩阿岬。開京觀古國學。薩水問七翁仲。平壤觀井田畎。遂登普賢神岳八萬四千。其外漠北之墟多異草木怪獸奇禽。至江南海陽。見珍異物產之饒曰。百濟以此強。亦以此亡。其志曰。其俗尙強悍報仇。有百濟遺風。出東暆。登臨楓嶽,五臺。窮海堧。遊越松。望鬱陵,于山。至成宗時歸俗。客勸之仕。則不應放跡。玩戲自恣。以適意也。其書曰。十三。通經史百家。磊落慷慨。十九。學孫吳兵法。今已消亡矣。仍言天地萬物之化以自廣。或云無欲而遊方之外。能通氣機運化之法術。有自畫惟肖。其讚曰。爾形至藐。爾心大侗。宜爾置之溝壑之中。妻死不更娶。作頭陀形。東遊海上。適四方。終於鴻山無量寺。年五十九。遺命無燒。殯於寺傍。三年將葬。發其殯。面如生。浮屠人以爲佛也。旣茶毗。爲之立浮圖。有四方志一千六百。紀山紀地二百。又有詩卷。傳於世。陰崖公讀其文曰。跡佛而儒行者也。
[鄭希良]
虛庵事 見世變
[鄭𥖝]
世旣莫我知。自隱無名。以苟存爲恥。烏可與砥行立名之士。比竝哉。作北窓先生列傳。北窓先生者。鄭姓名𥖝。字士潔。北窓別號也。其先百濟之湯井縣人。前代多顯者。我睿宗 成宗間。有校理忠基,獻納鐸。連二世得顯仕。鐸 生順朋。事中宗仁宗明宗。最貴用。生先生。母太宗長王子讓寧大君禔之曾孫也。 中宗元年三月甲申。先生生。自爲兒時。能攝心通神。近而閭里居室之微。遠而四夷八蠻之外。風氣之殊。狗嗥鴃舌。知之如神。如方技百家之術。亦皆不言而喩。十四。觀中國。有琉球人望異氣至者。見先生。再拜曰。僕嘗占命。曰。至某年月日。入中國。當有眞人遇之。子眞是耶。因請學。於是諸蠻夷人至者聞之。皆爭來見之。先生能爲四夷語應之。莫不大驚異之。號曰天人。有客問命。館人有傭任負薪者。前熟視之。若有言者。先生曰。若且有言乎。曰。然。與之語。能通陰陽運化傀異之法術者。先生曰。若奚爲傭任。曰。不如此。吾固已死矣。自言蜀人至某年當適某。先生旣神通萬類。入於無窮。道德經曰。不出戶知天下。其此之謂歟。先生性喜酒。能飮數斗而不醉。嘗言聖人重人倫。釋老。言修心見性。而遺人事之學者也。釋老。蓋大同而小異。常歎之曰。言不見信。行不見知。放歌自戲。託娛遊方之外。而未嘗自異於衆人。其與人居。無一不出於孔子之術者。蓋其悟類禪。其跡類老子。其敎人一以聖人爲宗云。余嘗求考其事。十九。選國子試。更不復求擧。卜居楊州之掛蘿里。中宗世爲掌樂院主簿,觀象監惠民署敎授。後爲抱川縣監。忽棄官歸。深居絶跡。守嘿十年而沒。當明宗四年。年四十三。先生無師。亦無弟子云。楊州砂井山。有北窓先生塚。
[鄭碏]
北窓先生之弟碏。字君敬。別號古玉。少北窓二十七歲。好淸淨。入金剛山。得修鍊之道。中年妻死。不更娶。斷欲。三十六年以壽終。能通風鑑之術。多奇驗。善草隷。喜吟詩。名於世。世傳先生白日無影。吾聞丙吉云。至人無影。先生其至人者耶。或曰。先生生而能言。上古有生而神靈。自言其名者然耶。何其異耶。如古玉者。亦可謂高世拔俗之疇也。
[鄭斗]
東山翁。太學上舍鄭斗者也。晉州人。居晉之東山。後人號曰東山翁。性至孝。隱居不售於世也。平生恥匿過而爲名。善與人徇俗。人莫以爲奇也。土亭公嘗遊南中。見南冥隱者。又見東山翁曰。高士也。江右有此一人而已。晉父老傳。翁通鳥獸語。入山中吹律而鳥獸來馴。此何也。翁死遺命。不久東方大亂。指東山路傍曰。我死。葬於此。仍語其子曰。至某年汝死於此。汝死。葬汝無人。與其無葬。寧遺骼於此。人莫知也。及壬辰。果有倭寇。其子遇屠掠於此。死而終無收葬者。然後莫不曰異哉。何先事而前知若是神也。鄕人父老至今嗟嘆言之。余遊晉陽。問之鄕人。曰。翁蓋魁梧奇偉。不遇於世。託於外物以自戲。然讀其遺文。其所立。不出於孔子之術者。亦賢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