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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語錄) - 최신崔愼의 기록
[신] 사마천(司馬遷)과 한유(韓愈)의 문장은 누가 더 낫습니까?
[선생] 아마 서로 비슷할 것이다.
[신] 유종원(柳宗元)과 한유는 어떻습니까?
[선생]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한유의 문장이 바다와 같다면 유종원은 강과 같고 한유가 강과 같다면 유종원은 시내와 같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그 높낮음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신] 사람들이 ‘한유는 문(文)에는 뛰어났지만 시(詩)는 잘못하고 소식(蘇軾)은 시와 문에 모두 뛰어났다.’ 하는데, 그렇습니까?
[선생] 소식의 문에는 한유의 원도(原道)와 같은 글이 없고 시에도 남산시(南山詩)와 같은 것이 없으니, 소식과 한유의 우열을 구별하기가 어렵지 않다.
[신] 구양수(歐陽脩)는 어떻습니까?
[선생] 금석문자(金石文字)에는 아마도 구양수만 한 이가 없을 것이다.
[신] 주자(朱子)의 도덕은 공자 이후로 제일인자라 하는데, 문장은 어떻습니까?
[선생] 주자의 문장은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마음먹은 대로 말을 토하면 글이 되었으므로, 아마 문장도 주자만 한 이가 없을 것이다.
[신] 퇴계와 율곡의 글은 이른바 도학자의 글인데, 모두 문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 퇴계의 글은 정심 질실(精深質實)하여 문장도 아니고 과문(科文 과거(科擧)의 글체)도 아니며, 율곡의 글은 과문이요 문장은 아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물었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글은 어떻습니까?”
[선생] 정암의 학문(學問)과 품질(稟質)은 일세에 뛰어났다. 그러나 문은 그다지 좋지 않았으니, 이것을 보면 문장은 문장이고 도학은 도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 우리나라의 문장 가운데 집대성(集大成)한 이는 누구입니까?
[선생]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집대성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계곡(谿谷 장유(張維))이 집대성했다 하겠다.
[신] 택당(澤堂 이식(李植))은 어떻습니까?
[선생] 택당은 계곡처럼 집대성하지는 못했지만 정묘(精妙)한 경지에 들어가서는 계곡보다 낫다.
[신] 오늘날의 문장은 누가 주장이 됩니까?
[선생] 정동명(鄭東溟 정두경(鄭斗卿))의 글이 병통이 없지는 않아서 비록 옛것을 환히 통한 문장이 되지는 못하나, 오늘날 그와 비교할 만한 문인ㆍ재사가 없으니, 오늘날의 문장이라 할 수 있겠다.
[신] 임유후(任有後 인조(仁祖) 때의 문신)가 스스로 자기의 문장과 정두경의 문장이 서로 대등하다 했는데,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 자기를 자랑하고 능한 이를 시기하는 것은 속된 선비들의 관습된 태도이니,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어떤 사람이 두보(杜甫)의 시를 배우려 하였으나 선생이 거절하면서, 그와 같은 시(詩)와 사(詞)는 내가 알지 못한다고 사양하고 가르치지 않았다.
대개 과문을 공부하여 급제(及第)함으로써 일신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는 선생이 일체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일체 남에게 가르치지도 않았다. 사람들을 가르칠 때에는 《소학(小學)》으로부터 시작하여 《대학》ㆍ《논어》ㆍ《맹자》ㆍ《중용》ㆍ《시경》ㆍ《서경》ㆍ《예기》ㆍ주역》ㆍ《춘추》 등의 책을 차례로 가르치고 《가례(家禮)》ㆍ《근사록(近思錄)》ㆍ《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가르쳤다. 이백ㆍ두보의 시나 당음(唐音) 같은 시사는 일체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않았고 저술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자손들이 과거 공부를 하려고 하면 금하지는 않았다. 선생은 말씀하셨다.
“사람의 출처(出處)는 모두 그 자신에게 달렸다. 옛사람들이 ‘사람이 물을 마실 때에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 가려서 마신다.’ 한 말과 같이 사람의 출처 역시 자신이 알아서 스스로 행동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그런 것을 시킬 수도 없는 것이고 형이 아우에게 권할 수도 없는 것이다. 윤선거(尹宣擧)가 ‘큰아들 증은 제 스스로 과거 공부를 하지 않았고 작은 아들 추(推)는 제 스스로 과거 공부를 하였으므로 나 또한 그것을 금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 말이 옳다.”
이 때문에 서구(敍九 송주석(宋疇錫))가 과거 공부를 해서 급제했을 적에 선생이 일찍이 권하지도 금하지도 않았다. 선생은 말씀하셨다.
“나는 저에게 고서를 읽혀 유업을 닦게 하려 했었으나 제가 꼭 과거를 하고 싶어 하므로 나는 그것을 금하지 않았다.”
[신] 오늘날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는 것이 모두 의(義)가 아니라고 하는데, 어째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선생] 어째서 의가 아니라는 건가?
[신] 안자(顔子)와 민자건(閔子騫)은 계손씨(季孫氏)의 가신(家臣)되는 것도 부끄럽게 여겼는데, 더구나 오랑캐 신하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오늘날 벼슬아치들은 모두 북쪽 오랑캐의 배신(陪臣)이 되었으니, 만약 안자와 민자건 같았으면 오랑캐의 배신이 되기보다는 반드시 숨어 살면서 일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어찌 과거를 보아 출세하기를 즐겼겠습니까.
[선생] 주자(朱子)가 일찍이 ‘공자께서 만약 후세에 태어났다면 반드시 과거를 보았을 것이다.’ 하였으니, 대개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벼슬에 올라 도를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선비들이 만약 벼슬에 나아가 임금을 보필하여 병자년의 욕을 씻을 수 있다면 대인(大人)의 사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과거 보려는 선비를 그르다 하겠는가. 만약 이와 같은 사업에는 뜻이 없고 출세할 계산만을 한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일이다.
[신] 남행(南行)이나 음관(蔭官)으로 벼슬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선생] 처음 벼슬길에 오르는 참봉(參奉)으로부터 수령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이른바 녹사(祿仕 봉급만을 받기 위하여 벼슬을 하는 것)이니, 이 같은 벼슬을 하는 사람은 의리에 해로울 것이 없다. 주자도 일찍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벼슬을 했다는 말이 있으니 오늘날 가난한 선비가 혹 과거를 보거나 혹 음관으로써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계책을 하는 것이 어찌 의리에 해가 되겠는가.
[신] 지금 오랑캐의 연호로써 홍패(紅牌)나 교지(敎旨)를 기록하는 것이 싫어서 과거를 보거나 음관을 아니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생] 취향이 그와 같다면 이는 결백한 선비라 할 수 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는가.
[신] 선비가 절구(絶句)나 율시(律詩)를 잘 짓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생] 시사(詩詞)는 지어도 좋고 안 지어도 괜찮다. 시사를 짓지 않는 것이 해될 게 뭐 있겠는가.
무릇 사서(四書)는 익히지 아니하고 경서(經書)에만 힘쓰는 사람이 있으면 선생이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주자는 경서의 의리(義理)가 사서처럼 명백하지 못하다 하고 일생 동안 공부를 사서에다 치중하였으니, 후학들도 사서를 숙독한 뒤에 경서를 배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신] 율곡이 김시습전(金時習傳)을 지을 때, 그는 나면서부터 문자(文字)를 알았다 하였으니, 김시습은 나면서부터 안 성인이라 할 수 있습니까?
[선생] 나면서부터 의리를 알았다면 성인(聖人)이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나면서부터 문자를 알았을 뿐이지 의리를 안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면서부터 문자를 안다는 것도 자질(資質)이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하겠다. 그 때문에 매월당의 인품은 매우 높아서 중이 되어 미친 사람처럼 행세하면서 세상을 피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수자 운(愁字韻)으로 된 시를 가지고 와서 ‘선생의 저작은 잡설이 많다.’고 하였다. 내가 그윽이 의아스러워서 그 시를 가져다가 선생에게 보이며 그 진가를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이것이 무슨 시냐. 내가 평생에 이와 같은 잡설이나 문자를 지은 적이 없고 또 이유 없이 쓸데없는 글을 지은 적도 없다.”
[신] 정자(程子)의 문하에서는 정좌(靜坐)하는 것으로도 학문하는 공정을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종일토록 꿇어앉는 것은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비록 꿇어앉지는 않더라도 몸을 바르게 하여 평좌(平坐)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선생] 무릎을 꿇고 정좌하는 것이 참으로 좋으나 평좌를 해서 몸이 기울지 않고 안정(安靜)되게 하는 것도 좋다. 정좌란 반드시 꿇어앉아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주자는 일생 동안 각기병이 있었기 때문에 꿇어앉을 수가 없어서 승가(僧家)의 가부좌(跏趺坐)를 하였는데, 가부좌란 것은 양 무릎을 서로 포개어 앉는 것이라 한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몸가짐을 엄정하게 하여 앉을 때는 반드시 꿇어앉고 말할 때는 반드시 말수가 적으므로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어렵게 여겼으나 더욱 공손하였다. 만년에는 매우 화평하였어도 꿇어앉는 공부는 더욱 독실하여 무릎을 펴는 적이 없었고, 말을 적게 하는 공부는 더욱 숙련되어서 말이 많지 않았다. 선생은 일찍이 스스로 말씀하셨다.
“나의 성격이 본래 많은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반가운 사람을 만나도 인사말 이외는 다른 말이 없었다.”
[신] 율곡께서 이기(理氣)에 대한 말을 많이 하였는데 ‘물은 모나거나 둥근 그릇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고 공기는 병의 크기에 따라 양(量)이 달라진다.’ 한 말이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과 같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생] 본연(本然)의 성(性)이란 맹자가 말한 ‘성품은 착하다.’ 한 것이 이것이다. 기질(氣質)의 성(性)이란 공자가 말한 ‘성(性)이란 서로 비슷하다.’ 한 것이 이것이다. 본연의 성이란 것을 주로 하여 본다면 요 임금ㆍ순 임금과 같은 성인이나 길 가는 사람들도 동일한 성이며, 기질의 성을 가지고 본다면 어질고 어리석은 것과 착하고 간특한 것이 만 가지나 되어 같지 아니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질을 변화시키는 데 대한 공부를 힘쓰지 아니하고 성선설만 고수하면서 성현의 문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이것은 심지 않고 거두려 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선인(善人)이 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천지의 원기(元氣)를 타고난 사람은 나서부터 아는 성인이 되고 혼탁하고 박잡한 기운을 타고난 사람은 몹시 어리석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없게 된다. 이것으로 맑은 기운을 타고난 사람은 선인이 되고 탁한 기운을 타고난 사람은 악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기운의 청ㆍ탁이 많고 적음에 따라서 얻어지는 이치도 청ㆍ탁이 많고 적게 된다. 이것이 율곡(栗谷)께서 ‘물은 그릇에 의하여 형태가 달라지고 공기는 병의 크기에 의하여 양이 달라진다.’는 불가의 말을 깊이 취하게 된 까닭이다. 비록 지극히 선한 품성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어도 기질의 품성은 항상 외부에 구애되기 마련이다. 이러므로 군자가 한쪽에 치우치는 기질의 품성을 충분히 조화되도록 노력하여 잘 돌이킨다면, 그 본연의 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신]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귀신은 만물의 체(體)이므로 빠뜨릴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귀신이란 어느 물(物)에나 존재하지 않음이 없고, 따라서 사람의 몸에까지도 귀신은 구비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 말이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는 말과 다른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선생] ‘귀신은 만물의 체이므로 빠뜨릴 수가 없다.’는 말은 천지 사이를 왕래(往來)하는 음양의 실리(實理)는 귀신 아님이 없다는 뜻이다. 대저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된다는 말은 혼(魂)은 위로 솟아 하늘로 돌아가고 백(魄)은 밑으로 내려 땅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이른바 혼백은 곧 귀신이다. 사람만 이런 것이 아니고 짐승도 그렇다. 이는 ‘귀신은 만물의 체(體)이므로 빠뜨릴 수 없다.’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
[신] 사람이 죽어서 혼백이 각각 하늘과 땅으로 돌아간다면 천지와 함께 영구히 오래되어 없어질 때가 없습니까?
[선생] 오래되면 없어진다. 어찌 끝없을 리가 있겠는가.
[신] 선유(先儒)들이, 사람에게 촉감되고 사람을 오싹하게 하는 것을 귀신의 광경(光景)이라 하였습니다. 귀신은 형체도 색깔도 없는 것인데, 어찌 광경이 있겠습니까?
[선생] 무릇 사람이 죽은 집에 혹 이상한 기운이 눈에 보이는데, 이를 광경이라 할 수 있다. 또 불도(佛徒)들의 윤회설(輪回說)이 매우 허황하기는 하나 혹 어떤 때는 맞을 때도 있다. 옛날 어떤 사람이 날 때부터 피부에 돼지털이 난 적이 있었는데 주자는, 그 사람은 돼지의 품성을 타고났다고 하였다. 이것은 혹 그럴듯하지만 지극히 드문 일이므로 불도들의 말과 같이 모든 사물이 모두 윤회를 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問。司馬遷,韓愈文章孰愈。先生曰。恐相等耳。柳與韓何如。曰。古人云。韓如海柳如河。韓如河柳如川。就此可定其高下也。曰。人言韓長於文短於詩。蘇詩文俱長云。何如。曰。蘇文無原道等文。蘇詩無南山等詩。蘇韓優劣。不難辨也。曰。歐陽如何。曰。金石文字。恐莫如歐也。
問。朱子道德。孔子後一人也。文章何如。先生曰。朱子之文。無所不具。而從心所欲。吐辭爲文。則竊恐文章亦莫如朱子也。曰。退,栗之文。可謂菽粟之文也。皆可謂文章否。曰。退溪之文。精深質愨。非文章非科文。栗谷之文。乃科文。非文章也。傍人曰。靜菴之文何如。曰。靜菴學問稟質。超越一世。而其文則未善。是知道學自道學。文章自文章耳。
問。吾東文章。誰爲集大成。先生曰。牧隱當集大成。我朝則谿谷當爲大也。澤堂何如。曰澤堂雖不如谿谷之大。而入於精妙處。則過於谿谷也。
問。今之文章。誰爲主張。先生曰。鄭東溟之文。不能無病。雖不得爲通古文章。然今日文人才士。未有其比。亦可謂今日之文章也。問任有後自謂其文與鄭相埒。未知何如。曰。矜己妬能。俗士之常態。何足計乎。
有人欲學杜詩。先生却之曰。此等詩詞。吾所不知者也。辭而不誨。蓋習隷科工取第榮身之事。先生一切不以經心。故亦一切不以敎人。敎人始自小學。而大學,論,孟,中庸,詩,書,禮記,周易,春秋等書。次第爲敎。家禮,近思錄,朱子書節要。亦從其願而敎之。如李,杜,唐音等詩詞。一不誨人。亦不以製述誨人也。然子孫之欲爲科業者則亦不之禁。乃曰。人之出處。皆在其人。
古人曰。如人飮水。冷煖自知夫。出處者自知而自行也。父不可以使子。兄不可以勸弟。尹宣擧之言曰。長子拯。渠自不爲科工。次子推。渠自爲科業。吾又不能禁止。其言是也。故敍九之習科工取第也。先生未嘗勸止曰。吾欲令讀古書爲儒業。而渠必欲爲科擧。故吾不之禁也。
問。今日取第榮身者。皆非義也。未知如何。先生曰。何謂非義。曰。顏閔且恥爲季氏之家臣。況臣僕乎虜耶。今日之仕者。爲北虜之陪臣。若有如顏,閔者。則寧爲虜之陪臣。必隱居而終身矣。豈肯爲取第榮身之事乎。先生曰。朱子嘗以爲孔子若生於後世。則必爲及第。蓋不爲科第。則不能登仕行道故也。今日之士。若能登仕。而輔吾君以復雪。則可謂大人之事業也。豈可深非取第之士乎。若無意於此等事業,而只爲榮身之計則大不是也。問南行蔭官者何如。曰。自初入仕參奉。以至守令。皆所謂祿仕也。爲此等仕者。無害於義也。朱子亦嘗有門戶扶持之說。今日寒士之或取第或蔭官。以爲門戶扶持之計者。又何害於義乎。
問。有人以虜年號書於紅牌及官敎爲嫌。而不欲登第與蔭官者。何如。曰。志尙如此。則可謂志士之淨潔 者也。豈不善哉。
問。士之不能作絶句律詩者何如。先生曰。詩詞。作之可也。不作亦可也。不能作詩詞。何害之有。人有不習乎四書。而務博乎經書者。則先生戒之曰。朱子以爲經書義理。不如四書之明白。而一生用工。多在四書。後學亦可熟讀四書。而後方可學經書也。
問。栗谷作金時習傳。以爲生而知文字云。金也可謂生知之聖乎。先生曰。生而知義理則聖人也。如梅月堂者。惟生知文字。義理則未也。然生而知文字。亦可謂資質之非常。故梅月堂之人品甚高。跡佛佯狂而
避世。
有人持愁字詩而謂先生所著者。多有雜說。愼竊以爲訝。取其詩奉示先生。問其眞贋。先生曰。此何詩也。吾平生未嘗作如此雜說文字。又未嘗無故作無用之文也。
問。程門以靜坐爲爲學之工。然終日跪坐。人所難能也。雖不跪坐。而正身平坐何如。先生曰。跪而靜坐。固善矣。平坐不傾身而安靜。亦善矣。所謂靜坐者。非必跪也。朱子一生有脚氣疾不能跪。乃爲僧家跏趺坐。跏趺坐者。兩膝相疊而爲坐云爾。
先生自少持身嚴正。坐必跪。言必寡。人難近而益致恭。晩年雖甚和平。跪坐工夫益篤而膝未嘗伸。寡言工夫益熟而言未嘗多。嘗自言吾性本不能多言。故雖逢可喜人。而寒暄外更無語也。
問。栗谷多有理氣之說。而至有水逐方圓器。空隨大小甁之語。與孟子性善之說不同。何也。先生曰。有本然之性。孟子所謂性善是也。有氣質之性。孔子所謂性相近是也。主其本然之性而觀之。堯舜途人。同一性也。就其氣質之性而見之。賢愚淑慝。有萬不同。若不用力於變化氣質之工。而徒守性善之說。冀其入
於聖賢之門。則是殆不稼而求穡也。何得爲善人乎。而況稟得天地之元氣者。爲生知之聖人也。稟得昏濁駁雜之氣者。爲下愚之不移也。此可見稟其淸氣者爲善人。濁氣者爲惡物。隨其氣之多少淸濁。而所得之理。亦爲之多少淸濁。此栗谷所以於釋氏水逐方圓器空隨大小甁之說。爲有深取之意也。至善之性。雖具乎中。而氣質之稟。常拘於外。此君子必爲克化之功於氣質之偏。而善反之則復其本然之性。
問。中庸曰。體物而不可遺。以此觀之。鬼神無物不在。雖至於人之一身。莫不具鬼神也。此與人死爲鬼之
說不同。何也。先生曰。體物而不可遺者。天地間屈伸往來底陰陽之實理。無非鬼神也。若夫人死而爲鬼之說。魂升而歸於天。魄降而歸于地。則所謂魂魄。卽是鬼神。非但人爲然。禽獸亦然。此與體物而不可遺者不同也。問人死而魂魄各歸天地。則與天地同其久。而無有滅盡之時否。曰。久則無也。豈有無窮之理耶。問先儒以焄蒿悽愴。爲鬼神之光景。鬼神無形色。則豈有光景耶。曰。今有人死之家。或不無異氣之見。於目者。此可謂光景也。又曰。釋氏輪回之說。甚爲虛誕。而或有時適然者矣。古有人生而膚有猪毛者。朱子以爲稟得猪氣而生者也。此或時適然而極其稀罕之事。非如釋氏說物物皆輪回而生者也
* 최신崔愼 1642년(인조 20) ~ 1708년(숙종 34)
조선의 학자. 본관은 회령(會寧) , 자는 자경(子敬), 호는 학암(鶴庵), 시호는 문간(文簡). 회령(會寧) 출생. 함경 감사 민중정(閔鼎重)의 주선으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들어가 10년 동안 배우고 마침내 고제(高弟)가 되었다. 1675년(순종 1) 송시열이 예론의 화로 귀양가게 되자 그는 소를 올리려 하다가 중지하고, 동문(同門)인 유필명(柳弼明)의 소문(疏文)을 지었다는 무고를 받고 사천(泗川)에 귀양갔다가 사면되어, 광흥주부(廣興主簿)를 거쳐 회인(懷仁) 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이 비를 세워 덕을 추모하였다. 1689년 송시열이 사사(賜死)됨에 따라 광양(光陽)에 귀양갔다. 뒤에 순종이 뉘우치고 송시열의 관작을 회복시킬 때 그도 석방되어 광주(廣州)에서 살다가 사망, 처음에 사헌부집의(司憲府執議)를, 뒤에 이조 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