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불조약이 비준되어 전교의 자유가 생기면서 신자 수는 나날이 늘어갔다. 이에 힘입어 조선교구에서는 자선사업을 구상하고 고아들과 양로를 구제할 목적으로 1887년 새롭게 입국한 르메르(Le Merre 李類肵) 신부, 라프르카드(Lafourcade. 羅 신부, 롤트(Rault. 盧蓉望) 신부가 들어온다. 그리고 다음 해 프랑스 샬트르(Chartres)에 본부를 둔 성 바오로 수녀회가 진출하게 된다. 그 당시 조선에는 16명의 성직자와 20명의 신학생 15,400명의 신자가 있었다 일 년 사이 1,200명이나 늘어난 것이다. 성 바오로 수녀회는 블랑 白 주교의 요청에 의하여 정부로부터 소외당한 고아, 병자, 노인들을 위한 자선사업을 목적으로 진출하기로 한 것이다. 블랑 白 주교는 1880년부터 길에 버려진 고아들을 모아 몇몇 교우 집에 위탁하여 보호하고 있었다. 1885년에는 한양 곤당골( 현 을지로 1가) 기와집과 종로 똥골(현 관철동)에 있는 기와집을 사드려 고아원과 양로원을 만들고 교우들에 도움으로 맡아보도록 하였다. 1887년 7월까지 이미 고아 100여 명, 양로 40여 명이 구 가옥에 수용되어 있었다. 이 고아들 중에는 천주교를 믿다가 잡혀 가 순교한 자제들도 섞여 있었다. 자식들을 순교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도 물론 있었다. 이들을 교우들에게 위탁관리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에는 큰 희생과 봉사 정신이 따르기 마련인데 재속에 살고 있는 교우들로서는 한계가 있고 그들에게 매달 지급하는 봉사료 지급에 많은 자금이 소요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실정이 블랑 白 주교로 하여금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도움을 청하게 된 배경이었다.
블랑 白 주교의 요청에 따라 성 바오로 원장 수녀는 1888년 5월, 그곳에 있던 자카리에(Zacharie) 수녀. 에스텔(Estelle) 수녀와 월남 사이공에 있던 중국인 프란치스카(Fancisca) 수녀, 비르지니(Virginie) 수녀를 조선에 진출하도록 하였다. 4명의 수녀는 1888년 7월 22일 제물포에 위의 화보처럼 상륙하여 조선교구 경리담당 포아넬(Pooisnel. 朴道行) 신부에 안내를 받으며 한양으로 들어와 정동에 마련한 임시 수녀원에 머물게 된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한국 본원에서는 그 당시의 진출에 대한 배경설명과 조선으로 입국 과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길고도 혹독한 박해가 끝나갈 무렵인 1883년, 조선교구 제7대 교구장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블랑 주교가 취임하였다. 조선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불안정하였고, 질병과 기근이 계속되어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하였다. 불안한 상황에서도 블랑 주교는 고아원과 양로원을 운영하였으나 많은 어려움이 있어 1887년 7월 프랑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모원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였다.
수녀님들의 훌륭하신 주보 성 바오로처럼 우리도 우리가 받은 신앙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책임이 있습니다.
-블랑 주교의 서신 중에서
1888년 7월 22일 새벽 5시, 제물포항
흰 코르넷을 쓴 네 명의 첫 선교 수녀들이 아직 순교의 피가 마르지 않은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수녀님들의 첫발을 조선 땅에 올려놓는 이때 수녀님들께 환영의 인사 말씀을 드립니다. 수녀님들의 힘과 생명을 바쳐 조선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이곳에 오게 한 그 헌신을 보며 조선의 천사들도 바닷가에 나와서 수녀님들에게 감사드리고 있으리라는 것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오십시오.”
- 블랑 주교의 서신 중에서
7월의 찌는 듯한 날씨에 가마를 타고 서울까지 40리 길을 왔다. 그들의 첫 공동체는 정동의 임시 수녀원에서 시작되었다. 수녀들의 입국 일주일 후, 순교자 집안의 다섯 명의 지원자들-김해겸 마리아, 김순이 마리아, 김복우지 마리아, 박황월 글라라, 심발바라-이 입회하였다. 순교자들의 영성이 봉헌의 삶으로 꽃피기 시작하였다.
자카리아 수녀와 첫 선교 수녀들
자카리아 수녀는 조선에 온 첫 프랑스 선교 수녀로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제 1대 원장이다. 자카리아 수녀와 에스텔 수녀는 1888년 5월 31일 샬트르를 출발한 후 사이공에서 두 명의 중국 수련 수녀-비르지니와 프란치스카–와 합류하여 두 달간의 긴 여행 끝에 조선에 도착했다. 수녀들은 수도생활의 씨앗을 뿌리며 가난과 질병 속에서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자카리아 수녀는 6개월 후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초창기 수녀들은 대부분 과로와 질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첫 선교 수녀들의 숭고한 희생은 조선의 처녀들이 봉헌의 삶을 사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계속되는 수녀들의 헌신이 깊이 뿌리를 내려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교육, 의료, 사회복지뿐만 아니라 영성적 성숙의 기반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재 서울관구와 대구관구에서 천여 명의 수녀들이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물며 봉헌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블랑 白 주교는 머지 않아 성 바오로 수녀들이 입국할 것을 예상하고 조선교우 중 수녀가 되기를 희망하는 순교자 후손 박 사베리오를 비롯한 4명의 소녀를 선발하여 정동 임시 수녀원으로 보냈다. 임시 수녀원 인원이 8명이 되어 협소한 관계로 브랑 白 주교는 다시 명동에 있는 60여 칸의 두 채 한옥을 매입하여 개조한 후 고아원과 수녀원을 마련하여 당해년 9월에 곤당골에 있던 수녀들과 145명의 고아들을 명동으로 옮겨 양육토록 하였다. 이어서 브랑 白 주교는 2층 목조건물을 신축하여 보다 많은 고아들을 수용한 후 성장함에 따라 글과 기술을 가르쳐 자립의 길을 열어 주고 종로 관철동에 있던 양로원도 명동으로 옮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명동 천주교 보육원 시초가 된 것이다.
신앙의 자유는 조선 국내에 성소 활판소를 개설하게 하였다. 고스트 高 신부는 1882년 부터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교회서적을 인쇄하여 국내로 들여다 사용하곤 하였는데 고 신부로 하여금 성서활판소를 1888년 국내 정동으로 옮겨왔다. 당시에 조선 교구 경리 신부 포아넬 박 산부의 집 옆에 다른 집을 사서 그곳에 활판소를 설치하였다. 이 당시 활판소에서 사용한 활자는 대, 중, 소 3 체로서 여러 출판소에서 사용된 근대식 한글 활자였다. 8년 뒤 4월에 서재필박사가 미국에서 귀국하여 창간한 독립신문도 정동에서 발간하게 된다. 천주교회는 조선의 나라를 여러방면으로 근대화시켜 나가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전국에 신자수는 15,046명이 되었고 성당 4곳 성직자 16명과 신학생 20명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끈질긴 순교의 신앙심이 이끌고 온 기적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조선교구는 신앙의 활동과 전교 사업은 목이 말랐다. 더 관심과 열정을 갖고 펼쳐나가야 할이 아직도 너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