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 금당사 역시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호국도량이었다. 일제 패망 당시 금당사 주지 김대완 스님은 유림들과 의기투합, 비밀장부인 `동맹록'을 제작 배포하는 한 편 사찰 법고를 동원해 의병 운동을 전개하고 항일 의병운동결사체 창의동맹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펼친 애국지사였다.
애국지사 김대완스님은 경허와 친분이 있었다. 경허가 누구인가? 보조지눌, 태고보우, 나옹혜근, 무학자초 함허득통 청허휴정 등 고려 조선의 간화선 종장과 어깨를 겨누는 근대 최고승으로 지금도 추앙받는 인물이다. 경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6살 많은 선배이자 매부였다. 전봉준은 경허스님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 두 사람은 친족을 맺었다. 불교가 지향하는 인간 평등, 자유의 횃불을 높이 들고 무장 봉기한 근대혁명가 전봉준은 경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죽음이 두려워 동학봉기를 망설이는 전봉준에게 용기를 주고, 동학군의 첫 기병 지점을 알려준 이도 경허였다. 그 내용이 경허가 보낸 편지로 남았다.
전봉준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해 한양으로 압송되자 경허는 조카딸의 신변을 걱정해 피신시킨다. 조카이자 전봉준의 딸 옥련을 금산사에 숨겼다가 큰 절이라 들킬 염려가 있어 친분이 깊은 금당사 김대완 스님에게 부탁한다. 성도 김씨로 바꿨다. 그 때가 1894년 10월, 전옥련의 나이 18세 때였다. 경허는 틈틈이 옥련을 보기 위해 틈틈이 금당사를 찾았다. 그 때 마다 나옹이 수도했던 토굴에서 참선 정진했다. 당시 고금당 나옹굴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가 몇 편 전한다.
그 중 하나 ‘화엄해중(華嚴海中)’이다.
장차 지인을 숨기기 위해(將爲至人隱)
청산은 깊고도 깊었는데(靑山深復深)
복사꽃 살구꽃 도리어 아무 일 없이(挑杏還無事)
옛 부처 붉은 마음 토해 내더라(吐紅古佛心)”
여기서 지인은 경허 자신이며, 청산은 마이산의 옛 이름, 복사꽃 살구꽃은 지금도 벚꽃 터널을 이루는 금당사에서 마이산에 이르는 꽃길을 이른다.
전봉준은 지금의 종각역에서 사형당하고 누구든지 수습하는 자는 삼대를 멸한다는 관의 엄포에 시신은 방치됐다. 이를 수습하여 치운 이가 경허였다. 김대완 스님은 옥련을 수양딸로 삼고 8년간 보호하다가 옆 동네 남자에게 시집을 보낸다.
전봉준의 시신을 수습한 경허는 조계사에 승복을 벗고 삼수갑산으로 들어갔다. 경허가 벗은 승복을 무진장스님이 평생 입었으며 지금은 조계사가 보관 중이다. 이 사실은 ‘경허연구소’ 홍현지 박사의 오랜 연구 끝에 세상에 드러났다.
출처 :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