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瀋陽往還日記 (심양왕환일기)
병조참판공 휘 정철(廷喆․1583~1657)의 자는 자길(子吉) 또는 정채(廷采)며 호는 만회재이다. 판서공 휘 덕화(德和)의 장남으로 21세 때인 1604년 무과에 등제*하여 선전관(宣傳官)․감찰(監察)․함평현감(咸平縣監)을 지냈다.
* 등제(登第) : 과거에 급제함
1621년(광해군 13) 후금 칸이 요양을 공격하자 명의 요동도사(遼東都司) 모문룡(毛文龍)은 도망쳐서 평안도 철산 선천에 주둔했다.
그러나 이곳까지 후금이 공격을 하자 난처해진 조정은 북변(北邊)첨사인 공으로 하여금 모문룡을 가도(椵島)로 옮겨줄 것을 교섭케 했다. 그는 모를 설득, 철산 남쪽 70리에 있는 가도에 진을 치게 했다. 1623년(인조 1) 명나라는 가도에 도독부를 세워, 모문룡을 도독으로 임명하고 동강진(東江鎭)이라 했다. 이와 함께 선천 신미도(身彌島)에 그 분진을 뒀다
공은 1623년(癸亥) 인조반정 때 정사훈(靖社勳), 1624년 甲子亂 때 진무훈(振武勳) 1등의 녹훈을 받았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서북양도순찰사로 임명돼 방어에 만전을 기했다. 이후 조정은 공에게 길주(吉州) 책임자로 임명했다가 부임 전에 영흥(永興)도호부사 겸 남도방어사로 제수했다.
이 무렵 후금과 외교적으로 난처한 사태가 발생했다.
후금은 예단이 미흡하자 명나라에 군량미를 제공하는 등 정묘년 조약위반을 트집 잡았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1630년 12월 18일 박난영(朴蘭英)을 춘신사로 보냈다. 춘신사는 심양에 도착, 칸에게 예물을 전달코자 했으나 값싼 물품이라는 이유로 수행한 군관을 옥에 가뒀다.
박춘신사는 1631년 3월 4일 귀국길에 올랐는데 차사(差使)가 뒤따르며 위협을 가했다.
조정은 1631년(辛未) 봄 부랴부랴 공에게 병조참판을 제수하여 1631년 3월 19일 회답사로 파견했다. 공은 후금의 수도 심양을 찾아갔다.
후금의 칸은 부재중이라 여러 날을 기다린 끝에 만나서 어렵게 수습하고 1631년 4월 30일 귀국했다. <왕환일기>는 공이 출국해서 후금의 칸을 만나 뒤틀린 양국관계를 풀기 위해 매일일기를 썼던 역사기록을 일컫는 것이다.
일기는 1631년 3월 19일 출국 당일부터 4월 30일 귀국까지 49일간의 기간이다. 회답사 일행은 당일 중국 요동성(遼東省) 구련성(九連城)에 이르렀다. "신은 지난 19일 신시(오후 3-5시)경에 압록강을 건넜는데, 의주(義州) 대안(對岸)에 위치한 중강(中江)이라는 지역에 간신히 이르렀을 때 날이 이미 저물어 그곳에서 잠시 머무르면서 말에게 꼴을 먹이고는 달뜨기를 기다렸다가 길을 나섰다.
그리고 구련성(九連城)을 지나 5리쯤 되는 곳에 후금(後金)의 차사(差使)들이 머무는 데서 묵었습니다."라고 첫날의 여정을 적고 있다.
1. 3월 21일 (後金 差使와 一泊, 후금 차사와 일박)
(중략) 용호(용골대)가 먼저 말에서 내려 길가에서 마치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라 臣도 도착하자마자 곧 말에서 내려 마주앉아 각기 문안 인사를 나눈 후에, 용호가 먼저 물었습니다.
"국왕께서 평안하신가?"
신이 대답하였습니다.
"아주 평안하시다"
신이 또한 칸(汗)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편안하시다"
신이 또 물었습니다.
"이번 그대들의 일행이 거느린 군병 및 장사꾼과 물품이 얼마나 되는가?"
"군병은 600 여명이고, 장사꾼은 800 여명이며 물품은 단지 6만여 냥 어치다."
이 같이 운운하였는데, 지난번 용호가 먼저 와서 말한 것과는 서로 크게 같지 않을 뿐더러, 이번 말도 그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용호가 또 물었습니다.
"근래 도중(島中 : 椵島)의 소식은 어떠한가?"
신은 '아마도 아지호(阿之好) 박중남(朴仲男) 두 차사가 이미 도중의 변고를 먼저 알고 먼저 길을 나섰기 때문에 이처럼 만나서 묻는 것이다" 고 생각하고는 천천히 대답하였습니다.
"도중에 이른바 변고가 일어났다고 운운하는 말은 내가 압록강을 건너는 날에 잠시 풍문으로 들었는데, 그곳에서 멀리 바라보매 서로 싸운 것 같다고 하지만 지금은 뱃길이 통하지 않고 막혔는지라 그간의 실상을 어떻게 알겠는가?"
용호가 또 말하였습니다.
"내가 만약 귀국에 도착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 팔도하(八道河)에 으르러 이곳에서 묵었습니다.
※龍骨大란? (용골대란?)
타타라 잉굴다이로 만주어로 ᡨᠠᡨᠠᡵᠠᡳᠩᡤᡡᠯᡩᠠᡳ,, 중국어 간체로는 他塔喇 英俄尔岱, 정체로는 他塔喇 英俄爾岱, 병음으론 Tatara Inggūldai으로 불린다. 그는 청나라 장수로 1596년부터 1648년까지 활동했다. 한국어권에는 한자로 음차한 용골대(龍骨大)로 더 알려져 있다.
병자호란 때 조선에 침입,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삼전도의 주역들이다.
누르하치는 1616년 大金이란 국호를 제정해 독자적인 여진국가를 천하에 공표한다. 이후 1618년, 명의 요동지역 요충지 무순성을 함락시키면서 대명공략을 시작했다. 이후 1619년 사르후 전역에서 명, 조선, 여허 연합군으로 이루어진 10만의 군사를 괴멸시킴으로써 후금의 기세는 한껏 올라갔다.
누르하치 후금 군대의 용맹은 바로 용골대가 한축을 이루고 있다.
잉굴다이는 자손 대대로 자쿠무(요녕성 무순 동남쪽 일대)에 거주했는데 그의 조부 다이투쿠하리가 누르하치에게 귀순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잉굴다이는 젊어서부터 누루하치를 따라다니면서 대소전투에 참가, 전공을 세워 니루이 어전(niru-i ejen, 牛祿 額眞)으로 승진했다. 특히 1621년 요양, 심양(瀋陽)전투에 참전, 결정적인 공을 세워 참장(參將)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그해 말 사고에 연루되어 비어(備御)로 강등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천명 8년(1623년)에 무훈을 세워 삼등유격으로 진급했다. 그 이후 천명 10년(1625년)에 무훈을 또 한 번 더 세워 삼등참장으로 승진한 후 대죄를 지어 참수형을 당할 일이 생길 때도 1번 면제받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 등 청나라 황제로부터 엄청난 총애를 받은 주인공이다.
(144-026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25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25일차에서도 '만회재공'의 파란만장한 삶이 밴드에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 주1) '만회재공' 편은 자료가 많은 관계로 총10회차에 걸쳐 게재되며, 이번차는 10회 중 3번째 입니다. 이번호부터는 만회재공 할아버지께서 병조참판으로 후금의 수도 심양을 다녀온 과정(49일)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심양왕환일기"가 본격 게재됩니다.
※ 주2) 읽는이의 편의를 위하여 게재자가 단락을 구분하고 일부 제목에 음을 달았습니다
(본문내용- 만회재공(정철)의 유고 계속, 10회 중 3번째)/ 무곡
심양왕환일기는 심양을 갔다가 돌아온 과정을 난중일기처럼 일기형식으로 쓴 내용인데, 2008년도에 발행된 초판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에는 수록되지 않은 자료로 그 후에 발견된 귀중한 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 무곡
만회재공께서는 지금으로 보자면 국방부 차관입니다. 당시 명나라와 금나라 사이에서 틀어진 문제를 외교로 풀라는 왕명을 받들어 파견된 고위급 특사인 외교관으로 보면 되겠네요. 예나 지금이나 약소국의 줄다리기 외교는 변함이 없네요./ 벽천
무곡 위상환 님
전임자가 금나라와 외교를 통해 관계정상화에 참담하게 실패하는 바람에 만회재공의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습니다./ 벽천
碧泉 위윤기 !
24일차 서두에 긴급 외교현안사항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아마 해결과정상 그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할것 같네요/ 무곡
후금은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인 1636년에 중국식 국호인 청으로 변경하였으며, 1912 신해혁명으로 멸망했습니다./ 무곡
무곡 위상환 님
학교다닐 때 「하상주진한수당송원명청」하고 외우던 기억이 납니다./ 벽천
碧泉 위윤기 !
오, 예
거기에는 후금이 빠져 있네요
게재하고 보니 다 아시겠지만
후금과 청이 동시에 등장하는데,
그 기준이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인조14년)이네요
☆ 우리 위씨 선조님과 연계하면 주왕실에서 갈라진
희씨성과 연결이 되는 거죠./ 무곡
무곡 위상환 재치(財痴) 위현동 栢江 위성록/장흥 방촌/34세/판서공 13대손 님
요람과 천년세고는 1,400년 씨족사와 천년 씨족지성사의 총론이요, 원론입니다. 저자이신 원산 위정철 前소장님께서는 족보와 선조저서를 전거해 총론 즉, 표준(normal form)창시로 사명을 다하셨습니다. 총론은 그저 큰 물줄기입니다. 산으로 보자면 금강산의 개략적인 모양새를 그린 것입니다.
이제는 학식이 출중해 지혜롭고 뛰어난 백강과 재치 같은 후세가 이를 이어받아 각론을 편찬하셔야 합니다. 각론은 디테일과 무오류가 생명입니다. 신세대이니 인터넷도 보고 조선실록같은 역사도 참조해 정밀하게 저술하기를 기대합니다. 자꾸 거시론을 미시론처럼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의성과 반복성 이면에는 불순한 의도가 엿보입니다./ 벽천
인터넷에 접하기 어려운 90객에 가까운 저자를 공개적으로 폄하하지 마십시오. 금강산이 좋아보여도 가까이서 보면 죽은 쥐도 썩은 나무가지도 있습니다. 쥐와 나무가지 때문에 금강산을 "불싸질러라"는 몰상식은 침소봉대를 일컷는 씨족 내 대표적 妄言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망언의 장본인과 부추킨 자에게 언젠가 준엄한 평가가 뒤따를 것입니다.밴드는 학문을 논하거나 시비를 가리는 공간이 아닙니다. 그저 선조들의 학덕을 기리는 공간일 뿐입니다. 그냥 목적에 알맞게 사용하면 되지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내용의 하자는 씨족문화연구소 위원인 원곡과 야운과 함께 연구하여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신세대이니 문제를 해결하는 절차와 방법에는 하자가 없었는지도 곰곰히 성찰바랍니다. 이것이 밴드를 아끼는 종친과 표준창시에 헌신한 저자에 대한 기본적 예의라 사료됩니다./ 벽천
碧泉 위윤기 !
우리가 사는 민주주의 사회는 우리와 선배들이 원해서 만든 사회입니다.
사실 민주주의는 아시다시피 효율성이 높은사회는 아닙니다.
절차와 형식을 갖추어 일을 처리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배가 그것을 선택해 지금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검증된 좋은 제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중이라고 예외는 없습니다.
어쩌면 더욱 절차와 예의를 더 갖추어 특정사안에 대히여 재고나 수정등을 요구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것이 절차의 민주성입니다.
절차를 무시하고 내용만가지고 (비록 맞는사안이라고 하더라도 )
선후배없이 하는 행동은 정당화 될수 없는 기본을 망각한 행동이리고 사료됩니다./ 무곡
위 내용 중, 함평현감 5년 재임..
곤양군수 재직시..
제가 2017년 10월경 해당 함평군(문화원), 사천군(문화원, 곤양향교)의 역대 현감, 군수 선생안 자료 및 승정원일기를 확인한 결과에 따르면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백강
오타인지 확인 필요합니다...
병조참의(정3품직)...병조참판(종2품직)
그러나 예물이 양에 차지 않자 사절을 수행한 군관을 잡아 가두며 사절을 쫓아냈다. 사태가 급박하자 조정은 공에게 병조참의의 임시 품계를 주며 1631년 3월 회답사로 다녀오게 했다./ 재치
알려드립니다! (재차 공지)
☆ 5월 17일자 본 밴드에 게시를 했습니다만, 홍보차원에서 다시 한번더 게시를 하오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 열악하고 척박한 환경속에서 태어난 옥동자 "천년세고선집 개정판"을 약1년기간(주3회전후) 으로 밴드에 게재하고 있습니다.
□ 밴드게재 직후부터 많은 관심과 호응은 물론 간혹 내용상의 진위여부에 대한 문의도 있어, 피드백(환류) 차원에서 내용상 하자여부를 중심으로 이의 신청을 받아 공론화의 장을 마련하는데 본 게재자가 일정한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 현재 선집에 대한 수정표를 저자에게 전달받고 이를 반영한 자료를 게재하고 있습니다만, 혹여 추가로 위문의 발전을 위한 긍정적인 의견이 있는 종친분들은 붙임 서식을 이용하여 의견을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3.05.17
천년세고선집 밴드게재자 위상환 드림.
주) 해당서식은 아래 하단에 첨부하였고, 대종회사무실(임실장)에도 전달하였습니다. 아울러 아래의 메일(wisung1987@naver.com)로 요구하시면 전송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쌤플 서식
관련 사항에 대하여 검토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되실 경우, 첨부 서식을 작성해서 보내주시면, 제대로 검토 밎 조치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무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