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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전쟁의 승리⑥ - 성령의 검
(엡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서울 신랑과 경상도 신부가 어느 날 국수를 삶아 먹다가 싸움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 이유는 신랑은 국수라 하고 신부는 국시가 옳다고 서로 우기는 것이었죠. 둘이 서로 자기표현이 옳다고 주장을 하다 지쳐 이웃에 지식 있는 노인에게 질문합니다.
"선상님요 국수와 국시가 다릅니꺼?" “예 다르지요. 국수는 밀가루로 만든 것이고 국시는 밀가리로 만든 것이지요." "그럼,밀가루와 밀가리는 어떤 차이가 있나예?" "예,밀가루는 봉지에 담믄 것이고 밀가리는 봉다리에 담믄 것입니다ᅵ" "봉지와 봉다리는 어떻게 다른가요?" "예,봉지는 가게에서 파는 것이고 봉다리는 점빵에서 파는 것입니다." "그럼 가게와 점빵은 어떻게 다른가요?" "예,가게는 아주머니가 있고 점빵은 아지매가 있습니다."
“그럼 아주머니와 아지매는 어떻게 다르지예?” “예,아주머니는 아기를 업고 있고 아지매는 얼라를 업고 있습니다.” “'그럼,아기와 얼라는 어떻게 다른건가요?” “예,아기는 누워 자고 얼라는 디비잡니다.”
이 유머에서 보여주는 의미는 똑같은 말을 표현에 있어서 다를 뿐임을 보여 줍니다. 오늘의 말씀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성령의 검’과 ‘하나님의 말씀’은 ‘곧’이라는 단어를 삽입해서 똑같은 말을 표현을 달리 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곧’이라는 단어는 가치에 있어서 같은 것과 또한 명칭에 있어서 다른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라는 말씀 속에서는 두 렙돈이 가치에 있어서 한 고드란트와 같다는 표현입니다만 명칭에 있어서 다르게 표현하나 한 사람을 말할 때도 사용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7:2에서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할 때 한 사람을 ‘의의 왕’ 또는 ‘살렘 왕’ ‘평강의 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곧’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부연 설명이 ‘성령의 검’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말씀을 두 가지로 성경에서는 사용하고 있는데 하나는 ‘로고스’(lovgo")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식과 지혜에 있어서 우주만물을 통틀어 가장 으뜸이신 분입니다. 그 분의 능력에 있어서도 그 분의 뜻하신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분을 우리의 지력(智力)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데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는 언어를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세상에는 의미 없는 소리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로고스에는 분명한 의미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 상관이 없는 말이라면 나에게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공허하게 들릴 뿐입니다.
저는 그 전에 한 코메디 같은 기자회견을 본 적이 있습니다. 유명한 가수 나훈아씨가 일본 야쿠자 두목의 애인을 건드려 보복으로 남자의 중요한 부분이 잘려 나갔다는 소리가 소문에 소문을 타고 자기 귀에도 들려졌던가 봅니다. 그래서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흥분하여 자기에 대한 변명을 하던 중 갑자기 책상 위에 올라가 바지의 지퍼를 내리려고 하면서 “정 못 믿겠으면 내려서 확인 하겠습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때의 모습이 떠올려집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있거나 없거나가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헛된 말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악한 마귀의 간계입니다. 거기에 빠져 살면 하나님께 대한 관심이 점차 사라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또 다르게 ‘레마’(rJh'ma)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성취되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로고스의 말씀이 내게 그대로 임하여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나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오래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내게 하신 말씀입니다. 야곱을 통하여 다윗을 통하여 약속하신 말씀이 오늘을 사는 내게도 같은 효력을 발휘하여 이뤄집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담겨 있었던 분들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이 땅에 태어났고 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였더니 그 말씀대로 이뤄짐을 체험하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본이 되어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그대로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0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예수님은 로고스의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나타내시려고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로고스가 내 안에서 열매를 맺힐 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열망은 내 안에 예수님의 인격이 나타나고 예수님의 삶이 재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성령의 검’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제 오늘 성령의 검을 손에 가짐으로써 비로소 완전 무장한 군인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의 영적 무장 가운데 성령의 검만이 유일한 공격 무기입니다. 진리의 허리띠나, 의의 흉배나, 복음의 신발이나 믿음의 방패나, 구원의 투구들은 모두 방어용 장비들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검이라고 말한 “마카이라”(mavcaira)라는 칼은 매우 독특한 칼입니다. 이 칼은 원수를 ‘반드시’ 죽이려 할 때 사용하던 특수용 칼이었습니다. 이 칼은 많은 연구 끝에 만들어 진 칼로서 약 50 센치, 즉 성경 표현으로 일 규빗의 길이가 되었습니다. 손가락에서부터 팔꿈치까지 정도의 길이입니다. 이 칼은 특공대들이 사용하였고 그 칼의 특징은 좌우에 날 선 검이었습니다. 즉, 본문의 검은 “마카이라”는 칼이며 좌우에 날선 검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칼로 어떻게 적을 공격합니까? 이 칼은 칼자루를 잡을 때 일반 칼과 반대로 잡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칩니다. 또는 칼날을 정면으로 하여 찌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이 검은 복부를 공격하는데 사용됩니다. 복부를 찌를 때는 주로 칼자루까지 몸 속 깊숙이 꽂게 되어 있습니다. 원수의 복부에 칼을 꽂으면 약 10초~30초가량 기다린 후에 그 칼을 끄집어내는데 그때 돌리면서 잡아당깁니다. 그러면 적의 창자 및 간, 내장 등이 칼에 딸려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그 칼이 한번 꽂혔다 빠지면 적군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칼이 바로 이 ‘마카이라’ 검입니다.
로마 병사는 이 “마카이라”는 검을 언제나 허리띠에 차고 다녔습니다. 즉, 성령의 검은 진리의 허리띠인 성경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 및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성령의 검을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 ‘레마’는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어떤 특별한 만남에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나에게 기억나면서 그 순간에 적용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를 내게 적용시키는 분은 성령이시며 적용된 그 말씀은 성령의 검이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 말씀에 힘입어 의지하고 순종하면 반드시 사탄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의 간계를 이기게 하는 성령의 검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사용하셨던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은 내 생명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증시켜 주십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예언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감동이란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페로’(fevrw)라는 단어로 “가져오다, 운반하다.”라는 의미와 ‘디아’(diav)로 “~을 통하여, ~동안, ~와 함께, ~때문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엔’(ejn) “~안에, ~에, 위에, ~와 함께.”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로 미루어 성령의 내 안에 담겨 있는 로고스의 말씀을 어떤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거기에 걸맞은 말씀을 떠올려 마귀의 공격을 무산시키는 힘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1~2절에서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란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내려와" 하나님의 아들과 세상의 구세주로 선포된 바로 직후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그리고 이제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기 위하여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들어 가셨다고 말씀합니다. 광야는 생존에 대한 치열한 전쟁터와 같은 곳입니다. 한 낮의 뙤약볕은 살인적인 무더위요 한 밤의 추위는 뼛속까지 스며들어와 웅크리고 있어도 덜덜 떨리는 추위입니다. 게다가 마실 물도 밤이슬에 의지해야 되었고 전갈과 더불어 각양 야생동물에 의한 위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40일을 주리셨습니다. ‘주리시다’의 ‘페이나도’(peinavw)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의 육체적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어떤 것을 열심히 욕구한다'라는 것과 영적인 생명에 대한 목마름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이 생명의 위급함에 도달하면 그 사람의 속사람이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귀는 예수님께 다가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이 과정을 필수적으로 통과하셨다고 하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더 말할 나위 없겠지요.
지난 시간에 고린도후서 13:5에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말씀속에 ‘시험하다’라는 단어는 ‘페라이조’(peiravzw)로서 사탄이 가져다 주는 시험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험을 통과하는데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레마’ 성령의 검입니다. 성령께서 저에게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 레마의 말씀을 통하여 ‘확증하라’는 ‘도키마조’ (dokimavzw)의 하나님 자녀로서의 확증을 받게 됩니다. 말씀 속에 내 생명이 감춰져 있습니다. 다른데서 생명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진시황은 죽지 않고 오래살고 싶어서 신하들에게 명하여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구해 온 불로초 중에 수은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 수은을 먹으니 처음에는 피부가 맑아지고 팽팽해졌지만 결국 수은 중독으로 사망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산해진미(山海珍味)음식을 먹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내 생명이 감춰있기에 그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약속에 포함된 사람들만이 구원받아 영생을 얻도록 합니다. 성령은 바로 기록된 말씀이 내게 응하여 그 말씀 속에서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청송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근무했던 박효진 장로가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책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두 부류의 사형수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형장에서 자기 목을 옭아매는 밧줄이 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온갖 저주와 욕을 하고 울부짖는 사람들과 예수를 믿어 환한 웃음과 더불어 회개와 감사가 넘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환경의 문을 먼저 열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으로 나의 생명의 원천이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시편 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밤이 되면 칠흑같이 어두워집니다. 또한 낮은 더워서 여행을 할 때는 주로 밤에 다니는데 앞길을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둡기에 신에 호롱불을 달고 걷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앞길을 알 수 없는 어둠에 밝히는 진리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기도하게 하시고 선포하게 하시므로 마귀의 간계를 이기도록 하십니다.
두 번째로 성령은 내 생명의 위치가 어디 있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마태복음 4:5~6에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흔들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며 자신을 증명해 보라고 다그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너를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실 것이 아니냐라는 질문입니다. 이런 마귀의 간계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기록하다’라는 말은 ‘그라포’(gravfw)인데 이는 '석판 위에 일종의 글자인 기호를 새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고 ‘시험하다’는 ‘에크페이라조’(ejkpeiravzw)로서 ‘철저히 시험하다’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록되었으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명백하게 돌판에 기록하여 없이 할 수 없는 것처럼 명백하게 증명되었음을 선언함과 동시에 그러한 증명에 대하여 또 다시 의문을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는 말씀을 순종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에 대한 확실한 정체성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반기문 UN사무총장의 송년사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학력(學力)은 높아졌지만 상식(相識)은 더 부족(不足)하고, 지식(知識)은 많아졌지만 판단력(判斷力)은 더 모자란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사람의 기원을 우연에 두고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을 아메바라는 단순세포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자기를 모릅니다. 그러므로 허무가 있고 삶의 기초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마귀는 바로 이런 약점을 지닌 인간을 공략합니다.
특히 믿음의 사람에게 공격해 오는 간계가 “네가 구원받은 자녀라면 이렇게 해봐라!”고 꼬드깁니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자칫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어떤 증명을 받아 보려고 한다면 이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보증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22에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하셨습니다. 성령으로 내 생명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십니다. 이 위치에서 떠나면 안됩니다. 사탄에 대하여 유다 1:6에서는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사탄은 오늘도 믿음의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회의감을 갖도록 합니다. 그때에 성령께서는 히브리서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불신과 의심을 제거해 버리고 믿음의 주님을 바라보며 내 생명의 위치는 예수님 안에 담겨 있음을 명백하게 하십니다.
세 번째는 내 생명의 방향을 정하여 주십니다.
여호수아 8:18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주리라 여호수아가 그의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그 성읍을 가리키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점령할 신앙의 고지 점에 대한 방향을 정하여 줍니다.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방향을 정해 주십니다. 무엇을 위하여 사는 것이 현명한지를 분명히 깨닫게 하십니다.
마태복음 4:8~9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며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마귀는 세상에 속한 영광을 바라보도록 유혹합니다. 세상에 가치를 두도록 합니다. 한국교회의 병폐는 번영신학이 들어오면서 생겨났습니다. 예수 믿어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하자라는 삼중 축복을 외치면서 세상의 부귀와 공명을 바라보도록 햇습니다. 예수 믿어서 땅에서 잘되는 것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지름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이유로 교회에서 중국에 살고 있는 교포를 한국에 초청하면 여의도의 63빌딩을 보여주면서 “우리나라가 여러분도 알다시피 6.25전쟁을 치르고 끼니걱정을 하는 참 못사는 나라였는데 예수 믿고 이렇게 잘 살게 되었다”고 가르치면서 예수 믿으면 여러분도 이렇게 잘 살 수 있다고 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6.25전쟁이 끝나고 우리나라는 세계120개국 가운데 119번째로 못사는 나라로 평가되었고 북한보다 못살았음을 통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나라가 불과 50년도 안되어 세계경제규모 11위에 달하는 저력을 보여 주었고 남한의 외화 보유고는 세계 7등이며 자동차를 작년에 8백만 대를 제작하여 230개 국가에 수출했고 1등부터 6등까지의 조선소가 모두 대한민국 조선소입니다. 작년에 라면 매출고만 2조 원인데 그중 1조 원을 수출하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민족을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목표점이 되어서도 안 되고 더욱이 가치관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땅에서 잘되는 것이 복음이다라고 교회에서 앞장서서 부르짖다 보니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죄악이 만연해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포르노 사이트 접속률은 세계 1위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어린이들조차 포르노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구대비 낙태율도 세계 1위입니다. 해마다 100만건 이상의 낙태 수술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즉 매일 1〜4천의 생명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낙태로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구대비 성형 수술도 세계1위입니다. 그야말로 외모지상주의가 판치는 나라입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유흥과 환락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인구대비 성관계 종사자의 숫자도 세계1위이고 1인당 위스키 소비율도 세계 1위입니다. 자살률도 OECD국가 가운데 3위입니다. 특히 여성 자살률과 청소년 자살률은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이처럼 높습니까? 입시 위주의 교육과 대학 서열의 사회적 구조 때문 아닙니까? 이처럼 우리나라는 쾌락주의와 허무주의와 성공주의와 외모 지상주의가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도 애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너진 이 세대를 바라보면서도 마음에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의 양심은 죽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에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세상의 영광이 우리의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 믿음의 성도의 바른 방향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리도전서 9:18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하는 것이 세상의 풍요로움을 구하면 주실 것입니다. 편안함을 추구하면 그 소원도 이뤄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런 권리를 다 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고 위에 있는 상급을 향하여 달려 갈 길 다가도록 충성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잘되는 비결은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